[밸류체인타임스=유제욱 수습기자] 14세기, 크림반도에 속한 타나마을에서 몽골인 전사가 사망하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마을사람과 몽골인 전사의 다툼으로 일어났다. 두 사람의 종교는 각각 크리스트교와 이슬람이었는데 종교적인 이유가 싸움의 원인인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크림반도 지역은 몽골의 영향력 안에 있었고, 자국민이 이방인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몽골은 크림반도로 군대를 파병한다.
몽골군은 타나마을을 순식간에 점령했지만 피의자를 찾을 수 없었다. 피의자는 이미 카파라는 항구도시로 도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몽골군은 카파로 찾아가 공성전을 펼쳤다. 그러나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도시가 생각보다 견고할 뿐 아니라, 진영 내에서 끔찍한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포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을 공략할 수 없게 되자 몽골군은 회군을 결정한다.
몽골군이 회군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카파 사람들의 마음에 소망이 비쳤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어디선가 끔찍하게 상한 시체들이 날아와 성 안으로 떨어졌고, 성은 곧 전염병이 들끓었다. 당시 몽골군 사령관이었던 쟈니베크 칸(몽골제국 킵자크 칸국의 10대 칸(재위: 1342년 ~ 1357년))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병사의 시체를 투석기 안에 넣고 성으로 쏘아 올린 것이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생지옥을 경험한 카파 사람들은 항구 도시의 이점을 활용해 상선을 타고 탈출했다. 총 4척의 상선에 승선한 사람들은 시칠리아, 마르세유, 발렌시아 등 유럽지역으로 대피했다. 이 탈출은 카파 사람 입장에선 생명을 위한 도약이었지만 유럽 전 지역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사자를 풀어놓은 셈이었다. 몽골군의 전염병은 훗날 유럽의 30~50% 인구를 사망에 이르게 한 ‘흑사병’이 되었다.
흑사병(페스트, The Black Death)은 본래 전염병이 아니라 중근동과 중앙아시아 언저리에 있는 풍토병이었다. 치사율은 높았지만 전염력은 약했다. 현재 확인되는 최초의 페스트균은 1800년경 사람의 뼈에서 발견된 균이다. 이 페스트균은 유럽을 공포에 빠뜨렸던 페스트균과는 다른 모양을 가진다.
영국 스털링 대학 연구진이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와 천산산맥 근방의 마을에서 약 100개의 무덤을 연구했다. 연구진은 이 무덤이 다른 소수민족의 무덤과는 다르게 동시대에 한꺼번에 형성됐음을 알아냈고, 시신의 뼈에서 유럽의 페스트균과 매우 흡사한 페스트균을 발견했다. 이 지역 역시 몽골제국의 소유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몽골군에게 페스트균을 퍼뜨렸고, 그대로 크림반도까지 옮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개인 간의 갈등이 국가적인 싸움으로 번졌고, 이는 곧 유럽대륙 규모로 확대되어 죽음을 몰고 왔다. 흑사병을 처음 접한 유럽인들은 치료는 물론,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온 유럽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흑사병은 1347~1351년까지 약 3년간 2천만 명가량의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흑사병 증상은 균에 노출된 후 1~4일 만에 나타난다. 발열, 두통, 쇠약증세, 폐렴으로 인해 피가 섞인 기침이나 젖은 기침 등이 동반되고, 림프절이 부어 종양형태의 환부가 생긴다. 치사율이 무척 높아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평균적으로 3일 안에 사망한다. 이 때문에 ‘젊은이가 아침에는 식구들과 밥을 먹고, 저녁에는 조상들과 먹는다’는 유행어도 돌았다.

흑사병은 페스트균이 쥐벼룩을 통해서 쥐에게 옮기고, 쥐가 사람에게, 사람은 또 사람에게 옮겨진다. 그러나 흑사병이 쥐벼룩으로 인해 전염된다는 것을 발견한 때는 1894년이다. 약 500년 동안은 제대로 된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중세 암흑기였던 14세기 사람들은 처음에 흑사병을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흑사병에 걸린 사람은 마을을 돌며 채찍에 맞아야 했다. 스스로 자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신의 심판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흑사병에 걸렸고, 남녀노소, 종교직책에 상관없이 퍼졌기 때문에 다른 원인을 찾아야 했다.
“1345년 3월 20일은 토성, 화성, 목성이 정렬된 날짜다. 그 사건으로 인해 공기가 악하게 바뀌었다"라는 주장부터 반유대주의까지 허무맹랑한 원인설이 난무했다. 기독교인은 무슬림이, 무슬림은 기독교인이 원인이라고 탓을 돌리며 종교 간 싸움을 하기도 했다.
치료법은 ‘바이카리’라는 민간요법이었는데 닭에서 털을 뽑은 다음, 환부에 밀착시키고, 닭이 흑사병에 걸리면 치료되었다고 판단하는 방식이다. 또는 소·대변을 연고로 만들어 환부에 바르기도 했다. 이 밖에 ‘흑사병에 걸리지 않은 4인조 도둑의 식초’라는 이름으로 와인, 정향, 로즈메리, 쑥, 삼초 등을 섞어만든 물약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유니콘의 뿔'을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이 병이 전파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격리’라는 개념이 생겼고, 법으로 발병자를 강제 감금시켰다. 부유한 이들은 도시에서 영지로 돌아갔고, 동시에 전파속도를 증가시켰다. 역병의사들은 병자를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병자에게서 ‘독기가 생성된다’는 ‘독기론’을 믿었다. 이 때문에 새 부리와 같은 마스크와 방호복을 입고 외진을 다녔다. 부지깽이를 들고 다녔는데 부지깽이의 용도는 환자의 생사 여부 확인용과 자기보호용으로 사용됐다.
흑사병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치료법은 14세기가 끝날 무렵에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6천에서 1억 명조차 되지 않는 유럽 인구 중 3천만 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제네바와 베네치아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인구 절반이 사라졌다. 이 당시 뚜렷한 치료제가 없었다. 흑사병은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빠뜨렸지만 무조건적인 종교권력자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인본주의가 기반이 된 르네상스로의 시작을 싹 틔웠다. 흑사병은 현재에도 존재하지만 지금은 간단한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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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유제욱 수습기자]
몽골군은 타나마을을 순식간에 점령했지만 피의자를 찾을 수 없었다. 피의자는 이미 카파라는 항구도시로 도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몽골군은 카파로 찾아가 공성전을 펼쳤다. 그러나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도시가 생각보다 견고할 뿐 아니라, 진영 내에서 끔찍한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포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을 공략할 수 없게 되자 몽골군은 회군을 결정한다.
몽골군이 회군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카파 사람들의 마음에 소망이 비쳤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어디선가 끔찍하게 상한 시체들이 날아와 성 안으로 떨어졌고, 성은 곧 전염병이 들끓었다. 당시 몽골군 사령관이었던 쟈니베크 칸(몽골제국 킵자크 칸국의 10대 칸(재위: 1342년 ~ 1357년))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병사의 시체를 투석기 안에 넣고 성으로 쏘아 올린 것이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생지옥을 경험한 카파 사람들은 항구 도시의 이점을 활용해 상선을 타고 탈출했다. 총 4척의 상선에 승선한 사람들은 시칠리아, 마르세유, 발렌시아 등 유럽지역으로 대피했다. 이 탈출은 카파 사람 입장에선 생명을 위한 도약이었지만 유럽 전 지역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사자를 풀어놓은 셈이었다. 몽골군의 전염병은 훗날 유럽의 30~50% 인구를 사망에 이르게 한 ‘흑사병’이 되었다.
흑사병(페스트, The Black Death)은 본래 전염병이 아니라 중근동과 중앙아시아 언저리에 있는 풍토병이었다. 치사율은 높았지만 전염력은 약했다. 현재 확인되는 최초의 페스트균은 1800년경 사람의 뼈에서 발견된 균이다. 이 페스트균은 유럽을 공포에 빠뜨렸던 페스트균과는 다른 모양을 가진다.
영국 스털링 대학 연구진이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와 천산산맥 근방의 마을에서 약 100개의 무덤을 연구했다. 연구진은 이 무덤이 다른 소수민족의 무덤과는 다르게 동시대에 한꺼번에 형성됐음을 알아냈고, 시신의 뼈에서 유럽의 페스트균과 매우 흡사한 페스트균을 발견했다. 이 지역 역시 몽골제국의 소유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몽골군에게 페스트균을 퍼뜨렸고, 그대로 크림반도까지 옮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개인 간의 갈등이 국가적인 싸움으로 번졌고, 이는 곧 유럽대륙 규모로 확대되어 죽음을 몰고 왔다. 흑사병을 처음 접한 유럽인들은 치료는 물론,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온 유럽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흑사병은 1347~1351년까지 약 3년간 2천만 명가량의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흑사병 증상은 균에 노출된 후 1~4일 만에 나타난다. 발열, 두통, 쇠약증세, 폐렴으로 인해 피가 섞인 기침이나 젖은 기침 등이 동반되고, 림프절이 부어 종양형태의 환부가 생긴다. 치사율이 무척 높아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평균적으로 3일 안에 사망한다. 이 때문에 ‘젊은이가 아침에는 식구들과 밥을 먹고, 저녁에는 조상들과 먹는다’는 유행어도 돌았다.
흑사병은 페스트균이 쥐벼룩을 통해서 쥐에게 옮기고, 쥐가 사람에게, 사람은 또 사람에게 옮겨진다. 그러나 흑사병이 쥐벼룩으로 인해 전염된다는 것을 발견한 때는 1894년이다. 약 500년 동안은 제대로 된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중세 암흑기였던 14세기 사람들은 처음에 흑사병을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흑사병에 걸린 사람은 마을을 돌며 채찍에 맞아야 했다. 스스로 자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신의 심판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흑사병에 걸렸고, 남녀노소, 종교직책에 상관없이 퍼졌기 때문에 다른 원인을 찾아야 했다.
“1345년 3월 20일은 토성, 화성, 목성이 정렬된 날짜다. 그 사건으로 인해 공기가 악하게 바뀌었다"라는 주장부터 반유대주의까지 허무맹랑한 원인설이 난무했다. 기독교인은 무슬림이, 무슬림은 기독교인이 원인이라고 탓을 돌리며 종교 간 싸움을 하기도 했다.
치료법은 ‘바이카리’라는 민간요법이었는데 닭에서 털을 뽑은 다음, 환부에 밀착시키고, 닭이 흑사병에 걸리면 치료되었다고 판단하는 방식이다. 또는 소·대변을 연고로 만들어 환부에 바르기도 했다. 이 밖에 ‘흑사병에 걸리지 않은 4인조 도둑의 식초’라는 이름으로 와인, 정향, 로즈메리, 쑥, 삼초 등을 섞어만든 물약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유니콘의 뿔'을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이 병이 전파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격리’라는 개념이 생겼고, 법으로 발병자를 강제 감금시켰다. 부유한 이들은 도시에서 영지로 돌아갔고, 동시에 전파속도를 증가시켰다. 역병의사들은 병자를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병자에게서 ‘독기가 생성된다’는 ‘독기론’을 믿었다. 이 때문에 새 부리와 같은 마스크와 방호복을 입고 외진을 다녔다. 부지깽이를 들고 다녔는데 부지깽이의 용도는 환자의 생사 여부 확인용과 자기보호용으로 사용됐다.
흑사병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치료법은 14세기가 끝날 무렵에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6천에서 1억 명조차 되지 않는 유럽 인구 중 3천만 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제네바와 베네치아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인구 절반이 사라졌다. 이 당시 뚜렷한 치료제가 없었다. 흑사병은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빠뜨렸지만 무조건적인 종교권력자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인본주의가 기반이 된 르네상스로의 시작을 싹 틔웠다. 흑사병은 현재에도 존재하지만 지금은 간단한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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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유제욱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