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s://www.artart.today/?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5257849&t=board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피카소의 영원한 라이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강렬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준 화가다. 그는 야수파(Fauvism)의 중심에 서서 전통적 회화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이후 독창적인 기법과 혁신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했다.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육신의 피로를 잊게 하는 푹신한 안락의자"처럼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의 예술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평화와 행복을 선사하는 데 집중했다. 이 글에서는 마티스의 삶과 예술적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작품이 지닌 의미와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연히 만난 예술의 길
1869년 12월 31일, 앙리 마티스는 곡물 상인이자 장식품 상점의 소유주인 아버지 '에밀 이폴리트 마티스(Émile Hippolyte Matisse)'와 도자기와 회화에 관심이 있는 가정용품 상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안나 엘리아제 마티스(Anna Hélène Matisse)'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앙리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의 위치한 작은 마을 '르 카토-캉브레지(Le Cateau-Cambrésis)'에서 태어났다.
앙리 마티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1890년대 초에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마티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원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고, 마티스는 가족들의 바람에 맞춰 법을 공부해 법률사무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앙리 마티스가 20살이 되던 해에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다. 마티스는 수술을 할 정도의 심한 맹장염을 앓았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있던 마티스가 지루하지 않도록 어머니는 물감 세트를 선물했다. 이것이 앙리가 미술에 눈을 뜨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후에 앙리 마티스는 이 선물을 '일종의 파라다이스'라고 회상하며, 자신이 창조하는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세계에 빠져든 마티스는 22살의 늦은 나이로 예술가의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마티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원했던 아버지는 크게 반대했다. 예대를 가기 위해 아버지의 지원이 필요했던 마티스는 긴 설득과 대화 끝에 "오직 클래식한 화풍만 그릴 것, 그렇지 않으면 등록금을 끊겠다"라는 조건이 붙은 허가를 받아낸다.
그렇게 마티스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게 된다. 실제로 마티스가 대학에 들어가 그린 초기작들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림체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https://blog.naver.com/49222/221089138097 캡처본)
마티스는 당시 성서의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이 알려졌던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를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모로는 마티스의 창의적인 잠재력을 일찍부터 알아보며, 마티스에게 "너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가 될 것이다"라며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도록 격려했다.
모로는 학생들에게 과거 대가들의 작품을 철저히 연구하도록 요구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접근법은 마티스가 전통과 단절하면서도 자신의 기법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일을 계기로 마티스는 이 기법에 눈을 떠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하게 된다. 특히나 빛과 색은 마티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다.
1896년 마티스는 친구이자 호주의 인상주의 화가 '존 피터 러셀(John Peter Russell)'을 찾아간다. 러셀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 자신의 친구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빛을 찾아다니는, 또 빛을 담은 영혼의 화가라 불리는 반 고흐의 작품은 마티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마티스는 큰 돈을 들여가며 유명 작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한다. 마티스의 콜렉션엔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폴 고갱(Paul Gauguin)', '폴 세잔(Paul Cézanne)'의 그림들이 있다. 마티스는 빚까지 져가며 작품을 사들였고, 급기야 파산 위기까지 내몰렸지만 새로운 화풍을 찾기 위해 광적으로 작품을 수집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ree_Bathers#/media/File:Trois_baigneuses,_par_Paul_C%C3%A9zanne,_Mus%C3%A9e_du_Petit_Palais.jpg / 폴 세잔 '목욕하는 세 여인들')
특히 마티스는 다양한 작품들 중 세잔의 그림에 크게 매료됐다. 바라보는 각도의 따라 변하는 빛의 모습을 담은 작품.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담아낸 세잔의 그림은 이후 마티스의 작품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인상주의는 마음의 신문이다"
-앙리 마티스
틈새에 깃든 사랑, 예술로 피어나다
1898년, 앙리 마티스는 29세의 나이에 '아멜리 노엘 파리르(Amélie Noellie Parayre)'와 결혼했다. 마티스와 아멜리는 마티스가 자신의 예술적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프랑스의 사회적 모임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 계기로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으며, 예술에 대한 마티스의 열정과 아멜리의 독립적이고 지적인 매력이 서로에게 끌림의 계기가 되었다.
1898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마티스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지만, 아멜리는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믿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아멜리는 이후 40여 년간 그의 삶과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oman_with_a_Hat#/media/File:Matisse-Woman-with-a-Hat.jpg / 모자를 쓴 여인)
'모자를 쓴 여인'의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색채로 춤추는 야수파의 탄생
1905년 마티스는 주변 친한 작가들과 함께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시를 시작한다. 마티스와 친구들의 작품은 모두 어딘가 강렬하고 거칠었다. 1906년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과 함께 친구들의 작품들이 '살롱 다토미(Salon d'Automne)'에 전시된다. 그 방엔 고대 느낌의 조각상도 같이 있었다.
이를 본 한 평론가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다비드상 같다'라며 논평을 내놓았다. 이후 언론들은 이 표현을 빌려 마티스와 친구들의 작품들을 주로 비판의 의미인 '야수 그림'으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이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마티스와 친구들도 본인들의 화풍을 '야수파'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야수파 화풍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만큼 비판도 거세졌다. '사회 현실에 대한 깊은 생각은 결여되고 거짓스런 순수함만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마티스와 친구들은 이런 비판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의 밝고 순수한 색감과 행복을 그려내는 일에 매진했다.
(출처: https://henrimatisse.org/the-dessert-harmony-in-red.jsp / 붉은 색의 조화(Harmony in Red) )
1906년 마티스는 한 살롱에서 20세기의 대표적 큐비즘 작가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게 된다. 당시 피카소는 마티스보다 11살이나 어린 작가지만 금새 강한 라이벌 구조로 성장한다. 두 작가 모두 프랑스 태생이었고 정물, 여성의 얼굴 같은 비슷한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비교가 쉬웠다.
또 둘만의 차이도 선명했다. 피카소는 상상 속 대상을 우울하고 심각하게 그려냈다면 마티스는 자연 속 대상을 밝고 순수하게 그려냈다. 덕분에 입체파와 야수파의 대립구도는 나날이 커져갔고 둘의 유명세 또한 더해져갔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e_bonheur_de_vivre#/media/File:Bonheur_Matisse.jpg / 삶의 기쁨)
이 시기에 마티스는 '삶의 기쁨'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자연과 사람의 경계가 모호한 선, 아주 선명하고 강렬한 색, 맘껏 뛰노는 사람들 사이에 대한 표현은 보는 것만으로도 환희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정수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티스가 작품을 발표한 후 비판이 거세졌다.
당시 유럽사회는 전쟁 위험과 함께 많은 불안과 사회적 문제들이 있었는데, 마티스의 작품은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오로지 밝은 분위기만을 담아냈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 되었다. 영원한 라이벌 피카소도 이 작품의 반대하는 느낌의 우울한 느낌으로 경쟁작을 내놓기도 했다.
(출처: https://namu.wiki/w/%EC%95%84%EB%B9%84%EB%87%BD%EC%9D%98%20%EC%B2%98%EB%85%80%EB%93%A4 / 아비뇽의 처녀들)
그 작품은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1908년, 마티스는 '회화에 대한 주제들(Notes of a Painter)'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색채와 감정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고, 색채의 사용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회화를 단순히 시각적인 재현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봤다. 이 작품은 마티스가 색을 단순한 장식 요소가 아니라,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깊이를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사용하려 했음을 잘 보여준다.
마티스의 예술 철학은 점차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야수파는 결국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중요한 사조로 자리 잡았다. 색과 형태에 대한 마티스의 실험은 후속 세대 예술가들에게 자유롭고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했고, 이는 특히 추상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균형 잡힌 때 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이에게 휴식처 같은 그림을"
-앙리 마티스
안락의자 같은 예술이 무거워진 순간
평단의 비판에도 마티스는 본인만의 개성을 고민했다.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며 얻은 영감으로 이전보다 더 강렬한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1910년대를 전후로 마티스는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stanley6171/223358972773 캡처본)
하지만 이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한 이 사건은 마티스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마티스가 선보였던 순수하고 밝은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우울한 색채와 점차 어두워지는 대상들을 담은 작품들을 그려나갔다.
특히나 이 시기에 마티스는 자신의 화풍과 당시 주류로 평가받던 입체파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시기에 마티스는 다시 밝고 순수한 작품 세계로 발길을 돌렸다.
"입체파 역시 흥미롭지만 나의 본성에 직접 와닿지 못한다"
-앙리 마티스
이후로는 마티스는 이전보다 더 밝고 순수한 작품들을 고민했다. 마티스의 작품 속에서 우울함을 찾아내는건 더 어려워졌다. 1940년대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 시기 마티스는 1차 세계대전과는 다르게 밝은 그림을 계속 그려나갔다.
사람들은 마티스가 의도적으로 사회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마티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파리는 함락됐고,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는 독재를 위해 예술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히틀러는 특히나 반전통에 기초한 '입체파'와 '야수파'와 같은 현대 작품들을 '저질 작품'으로 매도했다. 당시 마티스는 파리와는 거리가 있는 '니스'에 있었지만 파리가 함락당하자 주변 지인들은 마티스에게 프랑스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마티스는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니스에서 자신만의 작품활동을 고수해나갔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Dance_(Matisse)#/media/File:Matissedance.jpg / 춤)
"만약 모두가 파리를 떠난다면 누가 프랑스에 남게 되는가?"
-앙리 마티스
대작과 혁신의 시간: 가위로 그린 선, 컷아웃의 발견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도 평화가 찾아왔지만 1941년 마티스에게는 위암이라는 또다른 시련이 닥쳤다. 큰 수술을 거쳐 암의 전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수술의 여파로 마티스는 휠체어와 병상 생활을 했다. 마티스에게 작품을 창조한다는 의미는 신체적 도전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마티스의 행복에 대한 추구는 멈추지 않았다. 더 오랜기간에 걸쳐 깊고 또 밝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1941년부터 마티스는 종이 오리기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창조한 이 새로운 기법은 "컷-아웃(cut-out)"이라고 불리며, 그의 작품에서 색과 형태의 관계를 탐구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붓으로 그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색 종이를 오리고 배치하는 방식으로 창작하는 방법이었다.
마티스는 종이와 가위를 사용해 여러 형태와 색을 조합하면서, 색채와 형태의 본질을 탐구했으며, '이카루스(Icare)'와 같은 작품을 통해 예술의 자유로운 표현을 보여주었다.

(출처: https://www.nbntv.kr/news/articleView.html?idxno=280750 / 파란색 누드(Blue Nude)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파란색 누드(Blue Nude)'가 있다. 이 작품들은 마티스가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힘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47년 마티스는 프랑스 지금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Hermitage Museum)'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그곳에서 "파란 그림" 시리즈를 공개했다.
이 작품들은 전통적인 그림의 틀을 깨고, 매우 간결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색을 배치한 작품들이었다. 파란색의 사용은 마티스가 색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며, 그가 색을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 창작의 전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티스는 물리적으로 더욱 쇠약해졌고, 예술 작업에서의 제약이 더욱더 커져갔다. 그는 1951년에 "파란 그림" 시리즈를 넘어서, 더욱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들이 강조된 작품들을 제작했다.
(출처: https://www.artinsight.co.kr/m/page/view.php?no=66129)
1950년대 후반, 마티스는 '로잔 성당의 장식'이라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큰 예술적 도전을 맞이했다. 이 프로젝트는 스위스의 로잔에 있는 성당을 위한 장식 작업이었는데, 마티스는 주로 색종이 오리기 기법을 사용하여 교회 내부를 장식했다.
이 작업은 마티스의 마지막 큰 예술 프로젝트로, 그는 성당의 창문, 벽, 의자 등 모든 장식을 디자인했다. 특히 "성당의 창문(Chapel's Windows)" 시리즈는 그의 예술적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단순하면서도 깊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982014.html 캡처본)
앙리 마티스는 1954년 이후로도 계속해서 창작을 이어나갔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는 더 이상 큰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마티스는 1954년 11월 3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의 길을 열었으며, 특히 색채의 사용과 형태의 단순화는 그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단지 야수파를 창조한 예술가가 아니라, 미술의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한 혁신적인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색과 형태, 그리고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미술 애호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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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
(출처: https://www.artart.today/?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5257849&t=board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피카소의 영원한 라이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강렬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준 화가다. 그는 야수파(Fauvism)의 중심에 서서 전통적 회화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이후 독창적인 기법과 혁신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했다.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육신의 피로를 잊게 하는 푹신한 안락의자"처럼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의 예술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평화와 행복을 선사하는 데 집중했다. 이 글에서는 마티스의 삶과 예술적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작품이 지닌 의미와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연히 만난 예술의 길
1869년 12월 31일, 앙리 마티스는 곡물 상인이자 장식품 상점의 소유주인 아버지 '에밀 이폴리트 마티스(Émile Hippolyte Matisse)'와 도자기와 회화에 관심이 있는 가정용품 상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안나 엘리아제 마티스(Anna Hélène Matisse)'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앙리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의 위치한 작은 마을 '르 카토-캉브레지(Le Cateau-Cambrésis)'에서 태어났다.
앙리 마티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1890년대 초에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마티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원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고, 마티스는 가족들의 바람에 맞춰 법을 공부해 법률사무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앙리 마티스가 20살이 되던 해에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다. 마티스는 수술을 할 정도의 심한 맹장염을 앓았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있던 마티스가 지루하지 않도록 어머니는 물감 세트를 선물했다. 이것이 앙리가 미술에 눈을 뜨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후에 앙리 마티스는 이 선물을 '일종의 파라다이스'라고 회상하며, 자신이 창조하는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세계에 빠져든 마티스는 22살의 늦은 나이로 예술가의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마티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원했던 아버지는 크게 반대했다. 예대를 가기 위해 아버지의 지원이 필요했던 마티스는 긴 설득과 대화 끝에 "오직 클래식한 화풍만 그릴 것, 그렇지 않으면 등록금을 끊겠다"라는 조건이 붙은 허가를 받아낸다.
그렇게 마티스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게 된다. 실제로 마티스가 대학에 들어가 그린 초기작들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림체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https://blog.naver.com/49222/221089138097 캡처본)
마티스는 당시 성서의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이 알려졌던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를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모로는 마티스의 창의적인 잠재력을 일찍부터 알아보며, 마티스에게 "너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가 될 것이다"라며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도록 격려했다.
모로는 학생들에게 과거 대가들의 작품을 철저히 연구하도록 요구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접근법은 마티스가 전통과 단절하면서도 자신의 기법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일을 계기로 마티스는 이 기법에 눈을 떠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하게 된다. 특히나 빛과 색은 마티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다.
1896년 마티스는 친구이자 호주의 인상주의 화가 '존 피터 러셀(John Peter Russell)'을 찾아간다. 러셀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 자신의 친구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빛을 찾아다니는, 또 빛을 담은 영혼의 화가라 불리는 반 고흐의 작품은 마티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마티스는 큰 돈을 들여가며 유명 작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한다. 마티스의 콜렉션엔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폴 고갱(Paul Gauguin)', '폴 세잔(Paul Cézanne)'의 그림들이 있다. 마티스는 빚까지 져가며 작품을 사들였고, 급기야 파산 위기까지 내몰렸지만 새로운 화풍을 찾기 위해 광적으로 작품을 수집했다.
특히 마티스는 다양한 작품들 중 세잔의 그림에 크게 매료됐다. 바라보는 각도의 따라 변하는 빛의 모습을 담은 작품.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담아낸 세잔의 그림은 이후 마티스의 작품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인상주의는 마음의 신문이다"
-앙리 마티스
틈새에 깃든 사랑, 예술로 피어나다
1898년, 앙리 마티스는 29세의 나이에 '아멜리 노엘 파리르(Amélie Noellie Parayre)'와 결혼했다. 마티스와 아멜리는 마티스가 자신의 예술적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프랑스의 사회적 모임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 계기로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으며, 예술에 대한 마티스의 열정과 아멜리의 독립적이고 지적인 매력이 서로에게 끌림의 계기가 되었다.
1898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마티스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지만, 아멜리는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믿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아멜리는 이후 40여 년간 그의 삶과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oman_with_a_Hat#/media/File:Matisse-Woman-with-a-Hat.jpg / 모자를 쓴 여인)
'모자를 쓴 여인'의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색채로 춤추는 야수파의 탄생
1905년 마티스는 주변 친한 작가들과 함께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시를 시작한다. 마티스와 친구들의 작품은 모두 어딘가 강렬하고 거칠었다. 1906년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과 함께 친구들의 작품들이 '살롱 다토미(Salon d'Automne)'에 전시된다. 그 방엔 고대 느낌의 조각상도 같이 있었다.
이를 본 한 평론가가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다비드상 같다'라며 논평을 내놓았다. 이후 언론들은 이 표현을 빌려 마티스와 친구들의 작품들을 주로 비판의 의미인 '야수 그림'으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이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마티스와 친구들도 본인들의 화풍을 '야수파'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야수파 화풍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만큼 비판도 거세졌다. '사회 현실에 대한 깊은 생각은 결여되고 거짓스런 순수함만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마티스와 친구들은 이런 비판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의 밝고 순수한 색감과 행복을 그려내는 일에 매진했다.
1906년 마티스는 한 살롱에서 20세기의 대표적 큐비즘 작가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게 된다. 당시 피카소는 마티스보다 11살이나 어린 작가지만 금새 강한 라이벌 구조로 성장한다. 두 작가 모두 프랑스 태생이었고 정물, 여성의 얼굴 같은 비슷한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비교가 쉬웠다.
또 둘만의 차이도 선명했다. 피카소는 상상 속 대상을 우울하고 심각하게 그려냈다면 마티스는 자연 속 대상을 밝고 순수하게 그려냈다. 덕분에 입체파와 야수파의 대립구도는 나날이 커져갔고 둘의 유명세 또한 더해져갔다.
이 시기에 마티스는 '삶의 기쁨'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자연과 사람의 경계가 모호한 선, 아주 선명하고 강렬한 색, 맘껏 뛰노는 사람들 사이에 대한 표현은 보는 것만으로도 환희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정수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티스가 작품을 발표한 후 비판이 거세졌다.
당시 유럽사회는 전쟁 위험과 함께 많은 불안과 사회적 문제들이 있었는데, 마티스의 작품은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오로지 밝은 분위기만을 담아냈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 되었다. 영원한 라이벌 피카소도 이 작품의 반대하는 느낌의 우울한 느낌으로 경쟁작을 내놓기도 했다.
그 작품은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1908년, 마티스는 '회화에 대한 주제들(Notes of a Painter)'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색채와 감정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고, 색채의 사용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회화를 단순히 시각적인 재현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봤다. 이 작품은 마티스가 색을 단순한 장식 요소가 아니라,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깊이를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사용하려 했음을 잘 보여준다.
마티스의 예술 철학은 점차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야수파는 결국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중요한 사조로 자리 잡았다. 색과 형태에 대한 마티스의 실험은 후속 세대 예술가들에게 자유롭고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했고, 이는 특히 추상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균형 잡힌 때 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이에게 휴식처 같은 그림을"
-앙리 마티스
안락의자 같은 예술이 무거워진 순간
평단의 비판에도 마티스는 본인만의 개성을 고민했다.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며 얻은 영감으로 이전보다 더 강렬한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1910년대를 전후로 마티스는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한 이 사건은 마티스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마티스가 선보였던 순수하고 밝은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우울한 색채와 점차 어두워지는 대상들을 담은 작품들을 그려나갔다.
특히나 이 시기에 마티스는 자신의 화풍과 당시 주류로 평가받던 입체파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시기에 마티스는 다시 밝고 순수한 작품 세계로 발길을 돌렸다.
"입체파 역시 흥미롭지만 나의 본성에 직접 와닿지 못한다"
-앙리 마티스
이후로는 마티스는 이전보다 더 밝고 순수한 작품들을 고민했다. 마티스의 작품 속에서 우울함을 찾아내는건 더 어려워졌다. 1940년대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 시기 마티스는 1차 세계대전과는 다르게 밝은 그림을 계속 그려나갔다.
사람들은 마티스가 의도적으로 사회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마티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파리는 함락됐고,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는 독재를 위해 예술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히틀러는 특히나 반전통에 기초한 '입체파'와 '야수파'와 같은 현대 작품들을 '저질 작품'으로 매도했다. 당시 마티스는 파리와는 거리가 있는 '니스'에 있었지만 파리가 함락당하자 주변 지인들은 마티스에게 프랑스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마티스는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니스에서 자신만의 작품활동을 고수해나갔다.
"만약 모두가 파리를 떠난다면 누가 프랑스에 남게 되는가?"
-앙리 마티스
대작과 혁신의 시간: 가위로 그린 선, 컷아웃의 발견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도 평화가 찾아왔지만 1941년 마티스에게는 위암이라는 또다른 시련이 닥쳤다. 큰 수술을 거쳐 암의 전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수술의 여파로 마티스는 휠체어와 병상 생활을 했다. 마티스에게 작품을 창조한다는 의미는 신체적 도전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마티스의 행복에 대한 추구는 멈추지 않았다. 더 오랜기간에 걸쳐 깊고 또 밝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1941년부터 마티스는 종이 오리기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창조한 이 새로운 기법은 "컷-아웃(cut-out)"이라고 불리며, 그의 작품에서 색과 형태의 관계를 탐구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붓으로 그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색 종이를 오리고 배치하는 방식으로 창작하는 방법이었다.
마티스는 종이와 가위를 사용해 여러 형태와 색을 조합하면서, 색채와 형태의 본질을 탐구했으며, '이카루스(Icare)'와 같은 작품을 통해 예술의 자유로운 표현을 보여주었다.
(출처: https://www.nbntv.kr/news/articleView.html?idxno=280750 / 파란색 누드(Blue Nude)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파란색 누드(Blue Nude)'가 있다. 이 작품들은 마티스가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힘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47년 마티스는 프랑스 지금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Hermitage Museum)'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그곳에서 "파란 그림" 시리즈를 공개했다.
이 작품들은 전통적인 그림의 틀을 깨고, 매우 간결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색을 배치한 작품들이었다. 파란색의 사용은 마티스가 색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며, 그가 색을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 창작의 전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티스는 물리적으로 더욱 쇠약해졌고, 예술 작업에서의 제약이 더욱더 커져갔다. 그는 1951년에 "파란 그림" 시리즈를 넘어서, 더욱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들이 강조된 작품들을 제작했다.
1950년대 후반, 마티스는 '로잔 성당의 장식'이라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큰 예술적 도전을 맞이했다. 이 프로젝트는 스위스의 로잔에 있는 성당을 위한 장식 작업이었는데, 마티스는 주로 색종이 오리기 기법을 사용하여 교회 내부를 장식했다.
이 작업은 마티스의 마지막 큰 예술 프로젝트로, 그는 성당의 창문, 벽, 의자 등 모든 장식을 디자인했다. 특히 "성당의 창문(Chapel's Windows)" 시리즈는 그의 예술적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단순하면서도 깊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는 1954년 이후로도 계속해서 창작을 이어나갔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는 더 이상 큰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마티스는 1954년 11월 3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의 길을 열었으며, 특히 색채의 사용과 형태의 단순화는 그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단지 야수파를 창조한 예술가가 아니라, 미술의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한 혁신적인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색과 형태, 그리고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미술 애호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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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