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 김시원 인재기자] 1973년 10월 29일 프랑스 랭스에서 피레스가 태어났다. 부모님은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스페인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안토니오와 어머니는 이주민으로 앙골라 독립전쟁에 징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떠나 프랑스로 왔다. 여느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한 피레스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각자 자기 나라의 말을 자주 썼기 때문에 학교를 다녔을 당시 프랑스어를 매우 힘들어했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축구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프랑스 북동부의 메스 유스팀에 입단한 피레스의 나이는 10살이었다. 이후 19살에 메츠의 2군 팀 감독 힌슈베르거는 피레스를 중앙에서 끌어내 왼쪽 자리에 포지션을 바꾸었다.
이는 피레스의 커리어 중 가장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1993년 리옹과의 경기에서 피레스는 1군 데뷔 경기를 치렀고 빠르게 1군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동시에 메스의 순위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1995/96 시즌 피레스가 리그앙 올해의 영 플레이어에 선정되었을 때 메스는 리그 4위에 올랐다.
따라서 유럽의 클럽들은 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그중에 벤피카도 포함됐다. 벤피카는 피레스가 어린 시절에 지원했던 클럽 중 하나였다. 아버지 안토니오도 벤피카의 러브콜을 반겼으나 피레스가 계속 메스에서 뛰길 원했기 때문에 벤피카 이적은 무산됐다.
그 후 그해 4월 6일 피레스는 리그컵 결승에서 리옹을 상대로 승부차기에 성공하며 첫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 당시 피레스는 리그 3시즌 연속 두 자릿수 골을 넣었는데 1998년 피레스는 팀의 리그 준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어 이적이 기정사실화됐다.
피레스는 타리그가 아닌 같은 프랑스 리그의 마르세유로 이적했다 하지만 마르세유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1998년 월드컵을 참가한 그는 그라운드보다 벤치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 1999년 마르세유를 UEFA컵 준우승에 올려놓자 프랑스 국대는 다시 그를 불렀다.
유로 2000 대회에서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대회가 있었다. 유로 2000결승 트레제게의 역사적인 골 장면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골을 도운 사람은 바로 피레스였다. 이후 2000년 피레스는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아스널의 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선수 입장에서 빅클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에선 레알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피레스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아스널의 벵거 감독이었다. 유로 대회가 끝나자마자 벵거는 전화를 걸어 피레스를 설득했고, 유로 결승이 끝난 후 바로 아스널 전용기를 보냈다.
그렇게 150억 원의 이적료를 받으며 아스널로 이적하게 됐다. 오베르마스를 대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벵거 덕에 처음 6개월간 너무 힘들었지만 버티고 적응할 수 있었다. 놀라운 스피드와 높은 득점력으로 거너스 팬들에게 오베르마스의 그림자를 하나씩 지워갔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당시 4-4-2 전술에서 측면 윙어들은 전반 공격수들이 골을 넣을 수 있게 한정적으로 크로스를 올리는 역할만 도와주었다. 따라서 1999년 득점 순위를 보면 10명 모두 중앙 공격수가 차지했다. 최근 득점 왕을 분석해 보면 상위권에 윙어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고, 또 대부분이 주발과 반대 위치인 역발 윙어들이 득세한다는 점이었다.
메스에서 뛸 때 골 득점에 좀 더 특화되어 있던 피레스는 EPL로 왔을 당시 리그의 흐름이 킥앤러시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스날의 벵거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는 패스 게임이었다. 앙리나 베르캄프는 헤더 능력이 특출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레스는 크로스보다 패스로 풀어가는 사이드 플레이메이커로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당시 축구 문화에서는 오른발잡이가 오른쪽 포지션에서, 왼발잡이가 왼쪽 포지션에서 뛰어야 했는데, 축구팬들은 왼쪽 포지션에서 활동하는 오른발잡이 피레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팀 적응을 마친 피레스는 첫해 리그 8골과 10도움으로 벵거 감독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렸다. 오른쪽의 융베리가 돌파형 윙어라면, 피레스는 클래식과 현대적인 맛을 반반 섞은 느낌이었다.
2001년 한국에서 컨페더레이션컵이 열렸고, 프랑스의 우승과 함께 대회 MVP를 차지한 피레스는 이제 전 세계적인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작 2002년 월드컵은 부상으로 참가할 수 없게 됐다. 2년 차에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음에도 리그 9골과 15도움을 기록하며 도움왕을 차지했다. 이때 아스날은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피레스는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
15골, 14골, 14골은 3시즌 동안 터뜨린 환상적인 골수였다. 따라서 EPL 역대 최강의 왼쪽 라인을 논할 때 앙리-피레스-애슐리 콜의 콤비가 항상 등장했다. 물론 비에이라 또한 측면 공격에 힘을 크게 실어주기도 했다. 애슐리 콜이 빠지고 어린 클리쉬가 경기에 나올 때도 피레스는 잘했지만 정작 피레스가 빠지고 나서 그의 빈자리를 채울 선수는 없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어쨌든 이 세 명에 의해서 아스날은 왼쪽에서 다양한 패턴의 공격 작업을 선보일 수 있었고, 앙리와 피레스는 환상의 짝꿍으로 2003/04 시즌 무패 우승 당시 시즌 전체 골 57골을 합작했다. 당시 탑급 윙어들이 리그에서 7, 8골만 넣어도 찬사를 받았는데 피레스는 2연속 리그에서 두 자릿수 골을 기록했다.
램파드는 미들라이커의 대표적으로 수많은 골을 터뜨린 미드필더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피레스가 윙어로 먼저 많은 득점의 길을 연 선구자였다. 찬란했던 피레스는 30살이 넘어가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2005년 들어오면서 안토니오 레예스, 홀렙 등에게 윙어 자릴 내주면서 출전시간이 줄었다.
2006년 초, 피레스는 아스날의 1년 재계약 제안에 불만을 품었다. 서른이 넘은 노장에게 다년 계약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스날 방침이긴 했다. 그러나 피레스는 2년 재계약에 벤치 자리도 감수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피레스는 챔스 결승전에서 교체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06 챔스 결승에서 피레스는 벵거 감독에 의해서 알무니아와 교체됐다. 챔스 결승 18분 만에 교체된 피레스의 마지막 아스날 경기였다. 피레스는 "이제 내가 없어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했고, 때마침 그동안 피레스를 노렸던 비야레알이 2년 제안을 해오자 피레스는 이에 동의했다.
벵거 입장에서도 피레스를 놓친 것은 훗날 후회가 될 일이긴 했지만 당시 도르트문트의 로시츠키와 이적 합의를 하면서 노쇠화가 뚜렷했던 피레스는 재계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국대 또한 아넬카의 루이 사하에 밀려서 더 이상 발탁되지 못했고, 2006년 월드컵 출전을 포기했다.
피레스는 비야레알로 넘어간 뒤에도 페예그레니 감독의 노란 잠수함 군단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아스날 팬들은 좀 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2000년대 EPL에서 거의 처음으로 인사이드로 파고드는 윙어로 나와 클래식에서 현대적 윙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로베르 피레스. 팀 동료였던 티에리 앙리, 라이벌 팀 맨유의 반니스텔루이를 제치고 EPL 기자단 투표 최고 선수상을 받은 이유엔 그가 새로운 길을 열고 EPL의 고정관념을 깨버린 포지션의 활약 덕분이 아니었을까. 피레스는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빛으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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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김시원 인재기자]
[밸류체인타임스= 김시원 인재기자] 1973년 10월 29일 프랑스 랭스에서 피레스가 태어났다. 부모님은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스페인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안토니오와 어머니는 이주민으로 앙골라 독립전쟁에 징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떠나 프랑스로 왔다. 여느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한 피레스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각자 자기 나라의 말을 자주 썼기 때문에 학교를 다녔을 당시 프랑스어를 매우 힘들어했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축구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프랑스 북동부의 메스 유스팀에 입단한 피레스의 나이는 10살이었다. 이후 19살에 메츠의 2군 팀 감독 힌슈베르거는 피레스를 중앙에서 끌어내 왼쪽 자리에 포지션을 바꾸었다.
이는 피레스의 커리어 중 가장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1993년 리옹과의 경기에서 피레스는 1군 데뷔 경기를 치렀고 빠르게 1군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동시에 메스의 순위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1995/96 시즌 피레스가 리그앙 올해의 영 플레이어에 선정되었을 때 메스는 리그 4위에 올랐다.
따라서 유럽의 클럽들은 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그중에 벤피카도 포함됐다. 벤피카는 피레스가 어린 시절에 지원했던 클럽 중 하나였다. 아버지 안토니오도 벤피카의 러브콜을 반겼으나 피레스가 계속 메스에서 뛰길 원했기 때문에 벤피카 이적은 무산됐다.
그 후 그해 4월 6일 피레스는 리그컵 결승에서 리옹을 상대로 승부차기에 성공하며 첫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 당시 피레스는 리그 3시즌 연속 두 자릿수 골을 넣었는데 1998년 피레스는 팀의 리그 준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어 이적이 기정사실화됐다.
피레스는 타리그가 아닌 같은 프랑스 리그의 마르세유로 이적했다 하지만 마르세유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1998년 월드컵을 참가한 그는 그라운드보다 벤치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 1999년 마르세유를 UEFA컵 준우승에 올려놓자 프랑스 국대는 다시 그를 불렀다.
유로 2000 대회에서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대회가 있었다. 유로 2000결승 트레제게의 역사적인 골 장면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골을 도운 사람은 바로 피레스였다. 이후 2000년 피레스는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아스널의 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선수 입장에서 빅클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에선 레알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피레스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아스널의 벵거 감독이었다. 유로 대회가 끝나자마자 벵거는 전화를 걸어 피레스를 설득했고, 유로 결승이 끝난 후 바로 아스널 전용기를 보냈다.
그렇게 150억 원의 이적료를 받으며 아스널로 이적하게 됐다. 오베르마스를 대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벵거 덕에 처음 6개월간 너무 힘들었지만 버티고 적응할 수 있었다. 놀라운 스피드와 높은 득점력으로 거너스 팬들에게 오베르마스의 그림자를 하나씩 지워갔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당시 4-4-2 전술에서 측면 윙어들은 전반 공격수들이 골을 넣을 수 있게 한정적으로 크로스를 올리는 역할만 도와주었다. 따라서 1999년 득점 순위를 보면 10명 모두 중앙 공격수가 차지했다. 최근 득점 왕을 분석해 보면 상위권에 윙어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고, 또 대부분이 주발과 반대 위치인 역발 윙어들이 득세한다는 점이었다.
메스에서 뛸 때 골 득점에 좀 더 특화되어 있던 피레스는 EPL로 왔을 당시 리그의 흐름이 킥앤러시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스날의 벵거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는 패스 게임이었다. 앙리나 베르캄프는 헤더 능력이 특출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레스는 크로스보다 패스로 풀어가는 사이드 플레이메이커로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당시 축구 문화에서는 오른발잡이가 오른쪽 포지션에서, 왼발잡이가 왼쪽 포지션에서 뛰어야 했는데, 축구팬들은 왼쪽 포지션에서 활동하는 오른발잡이 피레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팀 적응을 마친 피레스는 첫해 리그 8골과 10도움으로 벵거 감독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렸다. 오른쪽의 융베리가 돌파형 윙어라면, 피레스는 클래식과 현대적인 맛을 반반 섞은 느낌이었다.
2001년 한국에서 컨페더레이션컵이 열렸고, 프랑스의 우승과 함께 대회 MVP를 차지한 피레스는 이제 전 세계적인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작 2002년 월드컵은 부상으로 참가할 수 없게 됐다. 2년 차에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음에도 리그 9골과 15도움을 기록하며 도움왕을 차지했다. 이때 아스날은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피레스는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
15골, 14골, 14골은 3시즌 동안 터뜨린 환상적인 골수였다. 따라서 EPL 역대 최강의 왼쪽 라인을 논할 때 앙리-피레스-애슐리 콜의 콤비가 항상 등장했다. 물론 비에이라 또한 측면 공격에 힘을 크게 실어주기도 했다. 애슐리 콜이 빠지고 어린 클리쉬가 경기에 나올 때도 피레스는 잘했지만 정작 피레스가 빠지고 나서 그의 빈자리를 채울 선수는 없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어쨌든 이 세 명에 의해서 아스날은 왼쪽에서 다양한 패턴의 공격 작업을 선보일 수 있었고, 앙리와 피레스는 환상의 짝꿍으로 2003/04 시즌 무패 우승 당시 시즌 전체 골 57골을 합작했다. 당시 탑급 윙어들이 리그에서 7, 8골만 넣어도 찬사를 받았는데 피레스는 2연속 리그에서 두 자릿수 골을 기록했다.
램파드는 미들라이커의 대표적으로 수많은 골을 터뜨린 미드필더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피레스가 윙어로 먼저 많은 득점의 길을 연 선구자였다. 찬란했던 피레스는 30살이 넘어가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2005년 들어오면서 안토니오 레예스, 홀렙 등에게 윙어 자릴 내주면서 출전시간이 줄었다.
2006년 초, 피레스는 아스날의 1년 재계약 제안에 불만을 품었다. 서른이 넘은 노장에게 다년 계약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스날 방침이긴 했다. 그러나 피레스는 2년 재계약에 벤치 자리도 감수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피레스는 챔스 결승전에서 교체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06 챔스 결승에서 피레스는 벵거 감독에 의해서 알무니아와 교체됐다. 챔스 결승 18분 만에 교체된 피레스의 마지막 아스날 경기였다. 피레스는 "이제 내가 없어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했고, 때마침 그동안 피레스를 노렸던 비야레알이 2년 제안을 해오자 피레스는 이에 동의했다.
벵거 입장에서도 피레스를 놓친 것은 훗날 후회가 될 일이긴 했지만 당시 도르트문트의 로시츠키와 이적 합의를 하면서 노쇠화가 뚜렷했던 피레스는 재계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국대 또한 아넬카의 루이 사하에 밀려서 더 이상 발탁되지 못했고, 2006년 월드컵 출전을 포기했다.
피레스는 비야레알로 넘어간 뒤에도 페예그레니 감독의 노란 잠수함 군단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아스날 팬들은 좀 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2000년대 EPL에서 거의 처음으로 인사이드로 파고드는 윙어로 나와 클래식에서 현대적 윙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로베르 피레스. 팀 동료였던 티에리 앙리, 라이벌 팀 맨유의 반니스텔루이를 제치고 EPL 기자단 투표 최고 선수상을 받은 이유엔 그가 새로운 길을 열고 EPL의 고정관념을 깨버린 포지션의 활약 덕분이 아니었을까. 피레스는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빛으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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