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부터, 대한민국은 참혹한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인권침해와 자유를 제한받았고, 끔찍한 인간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본 천왕에게 동방요배하지 않으면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받는 것은 당연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만행이 계속되었다.

출처: 언스플레쉬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기독교 신자가 무수히 많으며 예수를 찬양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예수에 대한 외침이 계속되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 날, 그 시절에 대체 누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이어주었을까. 지금부터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지킨 목사님 중 한 분이신 손양원 목사에 대해 알아보자.
손양원 목사의 출생과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련
1902년 7월 7일 함안군 칠원읍, 손종일 장로에게 장남이 생겼다. 아들의 이름은 손양원으로, 독실한 기독교인 아버지 손종일의 사랑 속에서 예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듣고 자라났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손양원도 자유롭게 자라나야할 만 8세 때,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것을 요구했고 만약 천황을 신으로 받들어 섬기지 아니한다면 즉시 사살되거나 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손양원은 어린나이에 용감하게 동방요배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주이심을 외쳤다.
신실한 믿음 속에서 손양원은 더욱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나아갔다. 그가 39세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옥에 갇혀 끔찍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옥에서 고문받으면 받을 수록 손양원의 믿음은 더 굳건해졌으며 감옥 내에서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손양원은 간수들 사이에서 문제 수용자로 이름 나 독방에서 모래밥과 소금국을 먹으며 지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아들로 삼다
그렇게 끔찍한 감옥생활을 하던 중, 1945년 8월 15일이 되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손양원은 옥에서 풀려났고, 이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두 아들, 장남 손동인과 차남 손동신의 사망 소식이 찾아왔다. 그들은 좌익 청년의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라, 아니면 죽이겠다'란 강요 속에서, 예수를 선택하고 총살당한 것이다.
손양원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곤 바로 가해자 청년을 찾았다. 그것은, 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사형선고가 내린 그가 사망하지 않도록 막으려 함이었다. 이후 청년의 정확한 정보와 출신을 알고는 양아들로 삼아 예수님 안에서 자라나게 하였다.
손양원의 삶에서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 6.25 전쟁이 발발하며 가족들과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손양원은 애양원 식구들을 돌보기 위해 애양원에 남아있었고, 가족들은 모두 전쟁을 피해 떠나간 것이다. 그리고 1950년 9월 29일, 공산군이 손양원 목사의 거주지에 침입하면서 옥으로 끌고갔고 이로부터 15일 후, 손목사는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연 주님께로 향해 있는가
이후 손양원 목사의 삶은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과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숭고한 생애 앞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과연 손 목사처럼 건강한 믿음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 한 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재물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비교할 수 없이 귀하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결국 내 안의 세상적 가치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영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1910년 8월 29일부터, 대한민국은 참혹한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인권침해와 자유를 제한받았고, 끔찍한 인간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본 천왕에게 동방요배하지 않으면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받는 것은 당연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만행이 계속되었다.
출처: 언스플레쉬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기독교 신자가 무수히 많으며 예수를 찬양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예수에 대한 외침이 계속되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 날, 그 시절에 대체 누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이어주었을까. 지금부터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지킨 목사님 중 한 분이신 손양원 목사에 대해 알아보자.
손양원 목사의 출생과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련
1902년 7월 7일 함안군 칠원읍, 손종일 장로에게 장남이 생겼다. 아들의 이름은 손양원으로, 독실한 기독교인 아버지 손종일의 사랑 속에서 예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듣고 자라났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손양원도 자유롭게 자라나야할 만 8세 때,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것을 요구했고 만약 천황을 신으로 받들어 섬기지 아니한다면 즉시 사살되거나 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손양원은 어린나이에 용감하게 동방요배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주이심을 외쳤다.
신실한 믿음 속에서 손양원은 더욱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나아갔다. 그가 39세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옥에 갇혀 끔찍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옥에서 고문받으면 받을 수록 손양원의 믿음은 더 굳건해졌으며 감옥 내에서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손양원은 간수들 사이에서 문제 수용자로 이름 나 독방에서 모래밥과 소금국을 먹으며 지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아들로 삼다
그렇게 끔찍한 감옥생활을 하던 중, 1945년 8월 15일이 되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손양원은 옥에서 풀려났고, 이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두 아들, 장남 손동인과 차남 손동신의 사망 소식이 찾아왔다. 그들은 좌익 청년의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라, 아니면 죽이겠다'란 강요 속에서, 예수를 선택하고 총살당한 것이다.
손양원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곤 바로 가해자 청년을 찾았다. 그것은, 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사형선고가 내린 그가 사망하지 않도록 막으려 함이었다. 이후 청년의 정확한 정보와 출신을 알고는 양아들로 삼아 예수님 안에서 자라나게 하였다.
손양원의 삶에서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 6.25 전쟁이 발발하며 가족들과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손양원은 애양원 식구들을 돌보기 위해 애양원에 남아있었고, 가족들은 모두 전쟁을 피해 떠나간 것이다. 그리고 1950년 9월 29일, 공산군이 손양원 목사의 거주지에 침입하면서 옥으로 끌고갔고 이로부터 15일 후, 손목사는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연 주님께로 향해 있는가
이후 손양원 목사의 삶은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과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숭고한 생애 앞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과연 손 목사처럼 건강한 믿음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 한 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재물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비교할 수 없이 귀하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결국 내 안의 세상적 가치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영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