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소가 울던 밤, 그리움은 화폭이 되었다. : 이중섭 | 밸류체인타임스

황지민 수습기자
2025-01-12
조회수 2478

(출처: https://m.blog.naver.com/kwwoolim/220902229706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한국의 빈센트 반고흐’라고 불리는 이중섭(1916~1956)은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뜨거운 열정과 고독을 화폭에 담아낸 가난한 화가로 기억된다. 그의 작품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고난과 슬픔, 그리고 그 속에서도 피어난 희망과 사랑을 깊이 응시한다.




소의 화가, 이중섭


이중섭은 특히 '소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인 소 그림은 단순한 동물 묘사를 넘어, 고단한 시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생명력과 인간의 투쟁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환경과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으며, 짧은 생애 동안 독창적이고 강렬한 화풍으로 한국 근대미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해당 기사에서는 이중섭의 삶과 예술 세계를 돌아보며, 그의 작품이 지닌 깊은 의미와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고자 한다.




어린 빛, 예술의 싹을 틔우다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현재의 '평안남도 숙천군 송덕리'인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이희주'와 어머니 사이에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이라는 현재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중섭은 어렸을 때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다. 평원 출신의 이중섭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지주집안이었고, 이중섭의 아버지는 부농이자 지주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출생지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는 외가의 집성촌이면서 외가 역시 부유했다. 외조부 이진태(李鎭泰)는 서북 농공은행장, 초대 평양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할 정도였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20년, 아버지 '이희주'가 세상을 떠났지만, 친가와 외가의 부유함 덕분에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었다.


1930년, 이중섭이 고등학생이 될 무렵 '오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오산고등보통학교'는 민족학교로서, 1907년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의 뜻을 담은 독립운동가들의 철학 하에 지어진 학교였다.


1931년, 이중섭은 '오산학교'에서 인생의 스승 '임용련'을 만나게 된다. 임용련은 1900년대 초반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해 유럽에서 1여 년 동안 유학을 다녀온 천재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다.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임용련은 중국으로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자신이 갈고닦아온 재능을 국가를 위해 써야 된다는 사명으로 오산학교의 선생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이때 이중섭은 그런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덕분에 임용련으로부터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의 화조를 배울 수 있었고, 특히 ‘조선인은 조선인다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명을 물려받기도 했다.


임용련은 이중섭에게 항상 무엇보다 연습과 노력을 강조했다. "밑그림을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이 하라, 그런 다음의 네 예술이 있다"라고 가르칠 정도였다. 이중섭은 스승 밑에서 수많은 습작을 남기며 자신의 화풍을 갈고닦았다.

 

(출처: https://sojoong.joins.com/archives/50466 캡처본)


이중섭은 많은 습작을 그리던 중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림의 대상이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소였다. 농사짓는 사람이 많았던 1900년대 당시, 한반도에 소는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가까운 소재였다. 


연습 또 연습을 거듭하는 이중섭에게 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으며, 더불어 ‘황소’는 우리나라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이중섭에게 소는 아주 각별한 의미였다.


"소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하다"

- 이중섭


스승 아래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가던 이중섭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자신의 그림을 출품한다. 당대 일본 미술계는 대단히 보수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미술을 장려하고 발던시킨다는 취지로 예술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그러나  친일적인 심사위원과 참가기준의 형평성 등을 통해 은연중에 조선인들의 참여를 억압했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심사 기준에 맞춰 기법과 형식, 소재까지 획일화된 그림을 그렸지만, 이중섭은 달랐다.


이중섭은 자신만의 강렬한 색과 선으로 황소의 모습을 담아냈다. 일본에서는 황소 그림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소 중에서도 황소가 조선의 민족 정서를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중섭은 그런 분위기를 보란듯이 비웃듯 자신만의 스타일로 황소 그림을 탄생시켰다. 이후 이중섭은 더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낯선 땅에서 피어난 예술의 날개


1936년 2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을 떠난 이중섭은 또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예술을 접해 화풍을 더욱더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4월 도쿄 교외 무사시노에 있던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 데이코쿠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1937년 4월,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문화학원(文化学院, 분카가쿠인)에 입학한다. 이 곳은 경직된 일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이념 아래 설립되어 일본 최초의 남녀 평등교육을 실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scenery-0000/RwFwb2fzL9sNCA 캡처본 / 풍경)


이중섭은 더욱더 선과 색이 선명해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표현을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작품 속에 한민족에 대한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ED%88%AC%EA%B3%84/DgE6eVkB87B-NA?hl=ko 캡처본 / 투계(1955)


빼앗긴 땅,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을 더 강렬한 색과 뚜렷한 선으로 그림 대상 속에 힘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 시기부터 그의 그림은 더욱더 간결해지면서도 거칠고 힘 있는 그림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랑과 예술


1939년, 이중섭은 같은 미술부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 2022)를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당시 이중섭은 굉장히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 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교내의 인기스타였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아고리'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あご, 아고)이 길었던 이(李, 리)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요즘 말로 '턱돌이'와 비슷한 셈이다. 후에 이중섭은 마사코의 한국 필명을 이남덕으로 지어주었다. 


당시 같은 반에 이(李) 씨가 3명이나 있어 서로 구분할 겸 해당 별명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스파라거스'는 둘이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자주 같이 먹고는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마사코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또 이중섭은 마사코를 '발가락군(ゆび君)'이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불렀는데, 전에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쳐서 이중섭이 치료해 준 것이 계기였다.


마사코의 집도 아버지가 미쓰이창고 주식회사 고위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역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일각에서는 마사코의 집안에서 이중섭과의 교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마모토 마사코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


"부모님은 결혼을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화가로 먹고살 수 있겠나'라며 걱정은 하셨지만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바보였어요. 저를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entity/%EC%9D%B4%EC%A4%91%EC%84%AD/m0hn8fnr?categoryId=artist 캡처본 / 망월)


1943년 이중섭은 일본에 권위있는 공모전에 '망월'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특별상을 수상했다. 둥근 달과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과 소의 모습을 통해 조국의 비운과 현실, 그리고 희망을 그려냈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진짜배기 소만 그릴거다. 소한테선 순수한 조선의 냄새가 나거든"

- 이중섭




고난 속에서의 창작


1940년대 중반, 이중섭은 조선 원산으로 귀국한다. 이 시기에 결혼이라는 개인적인 경사와 광복이라는 국가적인 경사를 동시에 맞이한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이 닥쳤다. 당시 원산에선 1925년 창당 후 1945년 최종통합되어 재건한 조선공산당, 즉 공산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중섭의 형 '이중석'이 대지주로 규탄받아 내무서에 갇혀 죽는 일이 발생했으며,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첫 아들의 이름을 짓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출처: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boys-playing-with-fish-0000/jwFM6jZNbESvkg?ms=%7B%22x%22%3A0.5%2C%22y%22%3A0.5%2C%22z%22%3A9.530884415062093%2C%22size%22%3A%7B%22width%22%3A1.8623039859103936%2C%22height%22%3A1.237500000000001%7D%7D / Boys Playing with Fish)


(출처: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seaweed-and-children-0000/owH6rxH8SzyjcQ?ms=%7B%22x%22%3A0.5%2C%22y%22%3A0.5%2C%22z%22%3A8.926102544334464%2C%22size%22%3A%7B%22width%22%3A2.0026935395314793%2C%22height%22%3A1.2375000000000003%7D%7D / 해초와 아이들)


이후, 이중섭은 아이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현실의 비극과는 멀어져 행복해보이는 아이들의 표정 속에 이중섭의 꿈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중섭의 바람과는 달리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비행기의 폭격으로 인해 이중섭의 집은 잿더미로 변했다. 쉴새없는 폭격으로 이중섭은 12월 흥남 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이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으로 피난한 이중섭은 남쪽에 친인척이 없어 스스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중섭은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부잣집 출신이라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산 적이 없다 보니, 자연히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신세를 진다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고 어쩌다 신세를 져도 어떻게든 갚아야만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에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서 재봉질을 하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이중섭도 부두에 나가 일을 하거나 선박에 페인트칠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family-0000/wQHJV92SVwrjZw 캡처본 / 가족)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잠에 들곤했다. 더 따뜻한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이중섭은 더 남단인 제주도로 피신한다. 제주도에 이르러서야 이중섭은 조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바닷가에 나가 매일 그림을 그렸다.


(출처: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seogwipo-fantasy-0098/sgEecB5UOf8ZCw?ms=%7B%22x%22%3A0.5%2C%22y%22%3A0.5%2C%22z%22%3A9.13944577384968%2C%22size%22%3A%7B%22width%22%3A1.545134490629925%2C%22height%22%3A1.2375000000000003%7D%7D 캡처본 / 서귀포의 환상)


이 시기에 그려진 '서귀포의 환상'을 보면 바다, 아이들, 과일과 같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이 밝게 표현되어 있다. 태양과 바다, 모래, 게, 그가 바라본 제주도의 풍경은 희망에 차 있다.


"난 그림을 그릴거야. 저 파도소리를 들으니 그런 기분이 드는군"

- 이중섭


하지만 행복도 잠시, 아내는 폐결핵을 앓게 되고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다. 일본에 사는 장인의 사망 소식까지 전해졌다. 결국 아내는 두 아들 '이태성'과 '이태현'을 데리고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의 생활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는 그림 그릴 재료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drawing-on-aluminum-cigarette-packing-foil-0000/QwE39FJLBG5dCw?ms=%7B%22x%22%3A0.5%2C%22y%22%3A0.5%2C%22z%22%3A8.928461385511328%2C%22size%22%3A%7B%22width%22%3A1.6969066289438337%2C%22height%22%3A1.2374999999999998%7D%7D 캡처본 / Drawing on Aluminum Cigarette Packing Foil)


그는 자신이 핀 담배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평생 동안 그려왔던 소재들이 담겨 있다. 은박지 속 그림 하나하나는 제각기 다른 사연이 표현되어 있으며, 사연 많았던 그의 삶 만큼이나 이야기 많은 그림들이 담겨 있다. 특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많은 작품을 담았다. 이중섭은 절망의 상황에도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가족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계속해서 가족을 그리워하던 이중섭은 지인의 도움을 통해 밀입국하여 1주일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했다. 불법체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족들의 설득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river-of-no-return-0000/SAGM-gUXSITaZA?ms=%7B%22x%22%3A0.5%2C%22y%22%3A0.5%2C%22z%22%3A8.601379138016922%2C%22size%22%3A%7B%22width%22%3A3.2811407530334544%2C%22height%22%3A1.2375%7D%7D 캡처본 / 돌아오지않는 강)


그가 한국에 돌아와 그린 '돌아오지 않는 강'을 보면 어두운 색조에 황폐한 느낌을 통해 가족과의 이별로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가족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막노동과 그림을 병행했다.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a-bull-0000/wgHIgQLkdMGnyw 캡처본 / 소)


1955년 이중섭은 야심차게 준비한 개인전을 서울에서 열었지만, 총 45점의 작품 중 23점만이 팔렸으며 심지어 판매한 작품 대금은 거의 받지 못했다. 낙담한 이중섭은 개인전이 끝난 후 자신의 남은 작품을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몇몇 작품들은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1955년 7월,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데다 개인전이 기대에 못 미치는 수입을 내자 상심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 자학 증세 등이 생겨 친구 구상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엔 성베드로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다. 박고석이 살고 있던 정릉으로 와 한묵, 조영암과 생활하게 되었다.

(출처: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9022684&menuNo=200023 캡처본 / 덤벼드는 소)


모든 것을 포기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이중섭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소를 그렸다. 위풍당당하고 강렬했던 소는 온데간데 없고 늙고 지친 소 한 마리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이후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 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쳐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은 '덤벼드는 소'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0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시대의 정신을 담았던 예술가는 지독한 가난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오늘은 건강해져서 ... 또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빨리 전시회를 열어 ... 그림을 팔아서 돈과 선물을 많이 사 들고 갈 테니까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려 주세요"

- 이중섭


이중섭의 삶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개인적인 고통이 교차하는 복잡한 여정이었다. 그의 작품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피어난 희망과 사랑을 담아냈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이중섭은 독창적이고 강렬한 화풍으로 한국 근대미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의 이야기는 예술가로서의 고독과 헌신, 그리고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 정신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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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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