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환기미술관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김환기는 한국의 자연, 전통, 그리고 그리움을 현대미술의 언어로 승화시켜,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어선 예술적 깊이를 보여준다.
푸른 꿈을 담은 점과 선
김환기의 대표작 ‘점화 시리즈’는 화면을 가득 메운 점과 선을 통해 한국적 사유와 미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걸작으로, 그의 예술 철학을 잘 보여준다. 특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은 그리움과 사색의 정수를 담아내며 관람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 작품은 1970년 제1회 한국일보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김환기의 후기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하며 세계 미술계에 한국적 추상을 알린 그는, 짧은 생애 동안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하여 구상과 추상을 통해 구현되었다.
어린 날, 바다와 함께 춤춘 예술의 첫 숨결
김환기는 1913년 4월 3일 현재의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인 '전라남도 진도군 기좌면 읍동'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아버지의 보호 아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김환기는 자연스레 예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김환기 집안은 1910년대에 이미 부농으로, 선박회사를 운영하면서 육지 운송업까지 확장했다. 특히 안창도와 기좌도를 연결하는 연륙제방공사와 간척사업, 읍동저수지 축조 공사를 맡아 넓은 땅과 재력을 축적하게 되었다.
김환기의 예술은 쪽빛 바다 곁에서 시작됐다. 섬에서 태어난 그는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집 앞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펼쳐지는 바다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김환기는 자연스레 화가라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지주가 되길 바랐고, 19세의 나이에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 속에서 미술을 배울 수 없는 한국을 떠나고 싶어했던 김환기는 이중섭, 천경자, 나혜석 예술가처럼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일본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아이를 낳았지만, 유학을 보내주지 않자 어머니의 도움으로 만 19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유복한 집안 덕분에 김환기는 일본에서 자유롭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김환기는 유화 물감을 마음껏 쓸 수 있었고, 예술에 더욱더 몰입할 수 있었다.
이국의 푸른 바람 속에서 피어난 예술의 날개
일본으로 간 김환기는 1933년 니혼대 미술부에 입학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연구생으로 참여했다. 당시 일본에는 유럽 미술이 썰물처럼 들이닥쳤는데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화풍에 영감을 받은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회화를 꿈꾸며 심기일전했다. 김환기도 미술사조를 통해 추상회화에 대한 열의를 키워나가게 된다. 그는 일본에서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어울리며 금세 두각을 드러냈고, 권위있는 미술전에서 '종달새 노래할 때'라는 작품으로 입선했다.
(출처: 환기미술관 캡처본 / 종달새 노래할 때)
동경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종달새 노래할 때>는 당시 그의 복합적인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인의 몸체나 팔의 경우 구체적인 묘사를 지양하고 머리에 올린 바구니 안은 그대로 투명하게 노출하면서 대담하고 실험성 강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한편 작품의 제목이나 화면의 모티브에는 한국적 서정성이 담겨 있어 그의 한국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출처: 환기미술관 캡처본 / 집)
한국적 모티브를 단순화된 형태로 평면 그림에 통합하려는 그의 실험은 ‘집’과 ‘장독대’에서 볼 수 있듯이 계속되었다. 나무문, 종이망문, 돌담, 계단, 도자기 등 한국의 전통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들은 그의 그림에 질서와 반복성을 더해 순수한 추상화로 발전시켰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환기는 추상미술에 대해 교우들과 단체를 결성하고, 문화예술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루면서 전통미에 대한 개안과 문학적인 소양을 다지게 된다. 그는 도서의 표지와 장정, 삽화를 그리거나 수필, 전시 비평글을 발표하고, 골동과 서화 등을 수집하며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
특히 김환기는 ‘달항아리’라 불린 백자대호에 대한 애정과 수집이 각별했다. 그는 달항아리를 흙과 유약의 오묘한 조화로 빚어진 조선백자의 부드럽고 미묘한 빛깔과 단순한 형태가 현존하는 미적가치 중 으뜸이라 여기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 칭송했고, 1940년대부터 작품의 소재로 적극 표출했다.
푸른 삶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색채
1942년 김환기는 부모님께서 이어준 부인과 헤어지고 안좌도를 떠났다. 고향을 떠나면서 집을 팔았고, 소작농들에게 자신의 논밭 모두를 분배해주었다. 집안에서 운영하던 서당은 안좌초등학교 교사들의 사택으로 제공했다.
서울 생활을 하던 김환기는 엘리트 신여성 김향안(金鄕岸, 1916~2004)을 만나 1944년 재혼했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卞東琳)이었다. 변동림은 1936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과 결혼했지만 이상의 갑작스런 일본행과 죽음으로 혼자가 된 형편이었다. 변동림은 김환기와 결혼한 뒤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이후 단지 부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의 동반자로서 평생을 함께 한다. 김향안은 문학적 재능이 있었고, 그림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또한 당시 문인들과 인연이 많아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향안은 김향안대로의 예술성을 확보하고, 김환기와 꾸준하게 교류해 나아가며 서로 의지가 되어 각자의 예술 세계를 넓혀갔다.
김향안은 지속적으로 김환기의 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원조했다. 그가 서구 문명에 직접적으로 가닿았던 파리 시대를 열었을 때도 김향안은 그보다 먼저 파리에 정착하여 그를 인도했다. 그리고 김환기의 말년 시대로 평가받는 뉴욕에서의 고된 활동에서는 직접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갈 만큼 엄청난 헌신을 기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한 예술적 기질을 가졌던 인물이었으나 김환기의 예술을 신뢰했던 만큼 대단한 헌신과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 김환기의 예술 여정
1956년 파리로 떠난 김환기는 3년 동안 2차 대전 이후 격변기에 접어든 서구 미술 현장의 움직임을 직접 접하며 민족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회화 세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그의 형상은 점차 단순해지면서 두터운 화면 질감과 푸른 색조를 주조색으로 사용, 달과 산, 학, 구름 등 동양 자연주의의 초탈한 사유 세계로 나아갔다.
1963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김환기의 작품은 구상성이 점차 사라지고 추상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는 수평과 수직의 직선적인 구성으로 점화를 그렸으며, 1970년대에는 네모꼴로 테두리 지은 점들을 화면 전체에 반복적으로 그려낸 특유의 ‘점화’를 제작했다.
김환기의 ‘전면점화’는 그가 자라난 기좌도의 넓고 아득한 바다와 하늘의 별들을 닮았다. 점을 반복해서 찍어 선을 만들고, 그것이 모여 면이 되어 무한히 확장되는 우주를 표현했다. 점들은 화면에서 번지고 얼룩지며 풍부하고 다양한 짜임과 리듬을 형성한다.
(출처: 환기미술관 캡처본 / Universe 5-IV-71#200 )
1974년 7월 25일, 6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김환기의 작품은 한국 미술품 경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2019년 11월 23일, 그의 1971년작 <Universe 5-IV-71#200>은 크리스티 홍콩 경매서 한화 132억 3,600만 원에 낙찰되어 한국 미술품 중 최초로 한화 100억 원을 돌파한 작품이 되었다.
김환기의 예술은 한국의 전통과 현대성을 조화롭게 융합하여 세계 미술계에 한국적 추상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며, 한국 추상미술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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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
(출처: 환기미술관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김환기는 한국의 자연, 전통, 그리고 그리움을 현대미술의 언어로 승화시켜,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어선 예술적 깊이를 보여준다.
푸른 꿈을 담은 점과 선
김환기의 대표작 ‘점화 시리즈’는 화면을 가득 메운 점과 선을 통해 한국적 사유와 미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걸작으로, 그의 예술 철학을 잘 보여준다. 특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은 그리움과 사색의 정수를 담아내며 관람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 작품은 1970년 제1회 한국일보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김환기의 후기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하며 세계 미술계에 한국적 추상을 알린 그는, 짧은 생애 동안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하여 구상과 추상을 통해 구현되었다.
어린 날, 바다와 함께 춤춘 예술의 첫 숨결
김환기는 1913년 4월 3일 현재의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인 '전라남도 진도군 기좌면 읍동'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아버지의 보호 아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김환기는 자연스레 예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김환기 집안은 1910년대에 이미 부농으로, 선박회사를 운영하면서 육지 운송업까지 확장했다. 특히 안창도와 기좌도를 연결하는 연륙제방공사와 간척사업, 읍동저수지 축조 공사를 맡아 넓은 땅과 재력을 축적하게 되었다.
김환기의 예술은 쪽빛 바다 곁에서 시작됐다. 섬에서 태어난 그는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집 앞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펼쳐지는 바다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김환기는 자연스레 화가라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지주가 되길 바랐고, 19세의 나이에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 속에서 미술을 배울 수 없는 한국을 떠나고 싶어했던 김환기는 이중섭, 천경자, 나혜석 예술가처럼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일본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아이를 낳았지만, 유학을 보내주지 않자 어머니의 도움으로 만 19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유복한 집안 덕분에 김환기는 일본에서 자유롭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김환기는 유화 물감을 마음껏 쓸 수 있었고, 예술에 더욱더 몰입할 수 있었다.
이국의 푸른 바람 속에서 피어난 예술의 날개
일본으로 간 김환기는 1933년 니혼대 미술부에 입학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연구생으로 참여했다. 당시 일본에는 유럽 미술이 썰물처럼 들이닥쳤는데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화풍에 영감을 받은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회화를 꿈꾸며 심기일전했다. 김환기도 미술사조를 통해 추상회화에 대한 열의를 키워나가게 된다. 그는 일본에서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어울리며 금세 두각을 드러냈고, 권위있는 미술전에서 '종달새 노래할 때'라는 작품으로 입선했다.
동경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종달새 노래할 때>는 당시 그의 복합적인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인의 몸체나 팔의 경우 구체적인 묘사를 지양하고 머리에 올린 바구니 안은 그대로 투명하게 노출하면서 대담하고 실험성 강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한편 작품의 제목이나 화면의 모티브에는 한국적 서정성이 담겨 있어 그의 한국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적 모티브를 단순화된 형태로 평면 그림에 통합하려는 그의 실험은 ‘집’과 ‘장독대’에서 볼 수 있듯이 계속되었다. 나무문, 종이망문, 돌담, 계단, 도자기 등 한국의 전통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들은 그의 그림에 질서와 반복성을 더해 순수한 추상화로 발전시켰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환기는 추상미술에 대해 교우들과 단체를 결성하고, 문화예술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루면서 전통미에 대한 개안과 문학적인 소양을 다지게 된다. 그는 도서의 표지와 장정, 삽화를 그리거나 수필, 전시 비평글을 발표하고, 골동과 서화 등을 수집하며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
특히 김환기는 ‘달항아리’라 불린 백자대호에 대한 애정과 수집이 각별했다. 그는 달항아리를 흙과 유약의 오묘한 조화로 빚어진 조선백자의 부드럽고 미묘한 빛깔과 단순한 형태가 현존하는 미적가치 중 으뜸이라 여기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 칭송했고, 1940년대부터 작품의 소재로 적극 표출했다.
푸른 삶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색채
1942년 김환기는 부모님께서 이어준 부인과 헤어지고 안좌도를 떠났다. 고향을 떠나면서 집을 팔았고, 소작농들에게 자신의 논밭 모두를 분배해주었다. 집안에서 운영하던 서당은 안좌초등학교 교사들의 사택으로 제공했다.
서울 생활을 하던 김환기는 엘리트 신여성 김향안(金鄕岸, 1916~2004)을 만나 1944년 재혼했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卞東琳)이었다. 변동림은 1936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과 결혼했지만 이상의 갑작스런 일본행과 죽음으로 혼자가 된 형편이었다. 변동림은 김환기와 결혼한 뒤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이후 단지 부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의 동반자로서 평생을 함께 한다. 김향안은 문학적 재능이 있었고, 그림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또한 당시 문인들과 인연이 많아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향안은 김향안대로의 예술성을 확보하고, 김환기와 꾸준하게 교류해 나아가며 서로 의지가 되어 각자의 예술 세계를 넓혀갔다.
김향안은 지속적으로 김환기의 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원조했다. 그가 서구 문명에 직접적으로 가닿았던 파리 시대를 열었을 때도 김향안은 그보다 먼저 파리에 정착하여 그를 인도했다. 그리고 김환기의 말년 시대로 평가받는 뉴욕에서의 고된 활동에서는 직접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갈 만큼 엄청난 헌신을 기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한 예술적 기질을 가졌던 인물이었으나 김환기의 예술을 신뢰했던 만큼 대단한 헌신과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 김환기의 예술 여정
1956년 파리로 떠난 김환기는 3년 동안 2차 대전 이후 격변기에 접어든 서구 미술 현장의 움직임을 직접 접하며 민족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회화 세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그의 형상은 점차 단순해지면서 두터운 화면 질감과 푸른 색조를 주조색으로 사용, 달과 산, 학, 구름 등 동양 자연주의의 초탈한 사유 세계로 나아갔다.
1963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김환기의 작품은 구상성이 점차 사라지고 추상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는 수평과 수직의 직선적인 구성으로 점화를 그렸으며, 1970년대에는 네모꼴로 테두리 지은 점들을 화면 전체에 반복적으로 그려낸 특유의 ‘점화’를 제작했다.
김환기의 ‘전면점화’는 그가 자라난 기좌도의 넓고 아득한 바다와 하늘의 별들을 닮았다. 점을 반복해서 찍어 선을 만들고, 그것이 모여 면이 되어 무한히 확장되는 우주를 표현했다. 점들은 화면에서 번지고 얼룩지며 풍부하고 다양한 짜임과 리듬을 형성한다.
1974년 7월 25일, 6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김환기의 작품은 한국 미술품 경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2019년 11월 23일, 그의 1971년작 <Universe 5-IV-71#200>은 크리스티 홍콩 경매서 한화 132억 3,600만 원에 낙찰되어 한국 미술품 중 최초로 한화 100억 원을 돌파한 작품이 되었다.
김환기의 예술은 한국의 전통과 현대성을 조화롭게 융합하여 세계 미술계에 한국적 추상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며, 한국 추상미술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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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