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namu.wiki/jump/vM94KQwhbZujSrFPQifrsY9BFMcs4xg2Va0fg0KzyBG4FHGkafhX9lE7UB%2FNy4t%2BgD3%2F11wcMes5NQEIwCsDeuEGiPqzlqUjN21OTaggtmpR0smozFBKIJJe7KffpxkF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는 이상(李箱)의 작품 〈날개〉 속에 등장하는 강렬한 문장으로, 그의 삶과 문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라는 혼란 속에서 시대를 앞서간 이상은 전통적인 문학의 틀을 깨부수며 독창적인 상상력과 실험정신으로 한국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핵과 가난, 시대적 억압 속에서 짧고도 고독하게 마무리되었다.
이상은 기존 문학적 관습을 거부하고, 고뇌와 혼돈을 초현실적 언어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작가였다. 그가 남긴 시와 소설은 당시에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모더니즘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짧은 생애 동안 혁신적인 작품들을 남긴 그의 이야기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는 표현만큼이나 강렬하고 잊히지 않는 흔적을 우리에게 남긴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삶과 문학 세계를 돌아보며, 이상이 한국 문학에 남긴 독창적 발자취를 탐구하고자 한다.
어린 날, 빛과 그늘의 자취
이상(본명: 김해경(金海卿))은 1910년 9월 23일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인 당시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3년 후인 1913년, 이상은 가족과 떨어져 백부 즉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으로 입양되었다. 백부 김연필은 일찍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유교와 학문을 교육시키며 그를 지원해주었으나, 애정은 전혀 주지 않은 채 엄하게만 대했다.
그 후, 백부는 북지에서 새로 여자를 데려왔고, 때문에 백모는 집을 나가게 되었다. 백부가 데려온 새로운 아내 '김영숙'은 아이까지 데려오며 자신의 아이와 이상을 차별하고 홀대했다. 백부 또한 백모가 이상을 차별하고 홀대하는 것을 목격함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린 조카 이상을 입양했는데도 아들이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영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 이상의 여동생인 김옥희는 이러한 유년 시절이 이상의 염세적인 성격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벽돌 사이에 피어난 문학의 싹
이상은 1917년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화가 구본웅과 동기생이 되어 오랜 친구로 남았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동광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통학교와 합병되자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보성고보에 재학 중,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화가 지망생이 되었으며 학업 성적은 상급 수준에 달했다. 1925년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이 입선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상은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 버려진 목단 열 끗을 정확히 그려내거나 자 없이도 반듯한 직선을 긋는 등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또한, 스스로 화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가난한 화가가 아닌 배곯을 일 없는 기술자가 되라는 백부 김연필의 반대로, 이상은 1927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지금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해 1929년 건축과를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둬 수석 졸업했다. 졸업식에 참여한 친부모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를 문경과 차별하는 백부모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동시에 그를 방치했던 친부모에게도 분노를 느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상은 졸업 후 건축 관련 부서인 조선총독부에서 특별채용되어 조선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출셋길에 오른다. 일과 병행하며 글쓰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0년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집필하며, 그림을 그려 미술 전람회에서도 임선을 하게 된다. ‘이상’이라는 필명 아래 깨어난 그의 언어는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깨어난 언어의 날개
승승장구하던 이상에게 최악의 순간이 찾아온다. 1931년 이상이 잦은 기침으로 병원을 방문했고, 22세에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당시 폐결핵은 치료가 너무 어려운 병 중 하나였으며, 1933년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해져 각혈 증세까지 보이게 되었다. 악화된 폐결핵으로 건축 일도 그만두고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요양 후 이상은 경성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온천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다방의 마담으로 두고 동거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당시 다방은 굉장한 선진 문물이었으며, 예술가와 지식이 모여드는 ‘살롱’의 역할을 했다. 여기서 이상은 당대 문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상을 비상한 사람이라고 여긴 문인들은 이상의 시를 신문에 연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상은 이때부터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의 문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이중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가톨릭청년에서 시 <꽃나무>와 <이런 시>를 발표했고, 이듬해인 1934년에는 순수문학 단체 구인회에 가입했다. 또한 이태준의 도움을 받아 조선중앙일보에서 오감도를 연재했지만, 독자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15회 만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신문사에서는 이상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편집국장들이 현재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등 유명 문인들이었다. 그래서 문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의 시는 최고의 문인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무는 별빛, 비극으로 마감된 짧은 숨결
1935년, 다방 제비를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한다. 인사동의 카페 ‘쓰루(B)’와 ‘다방 69’를 개업 양도하고, 명동에서 다방 ‘무기’를 경영하다 문을 닫은 후 성천, 인천 등을 오가며 생활했다. 1936년,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 취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
그 해 6월, 변동림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이상은 길거리에서 갑작스레 체포를 당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동 수상자로 붙잡혀 한 달 가까이 감옥에 갇혔다. 추운 감옥에서 한 달 내내 갇혀 있던 탓에 폐결핵으로 좋지 않았던 몸이 더욱 악화되며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풀려났지만 결국 1937년 26세에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둔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상 - 이런 시 中
이상의 삶은 짧았지만, 그의 문학은 한국 모더니즘의 중요한 기둥으로 남아 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독창적인 시도와 실험정신으로 문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상은 유럽의 실험적 시도를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자기화하여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예를 들어, ‘오감도 제4호’에서 숫자를 뒤집어 놓은 것은 유럽의 시각적 실험시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만의 독특한 시도였다.
이상은 흔히 천재 예술가로 평가되며, 그의 파격적인 문학적 기법은 그가 전위적 실험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기성적인 가치와 권위에 도전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상은 한글로 쓴 시뿐만 아니라 일본어로도 시를 남겼지만, 1933년 6월 1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한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정체성과 언어 선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이상의 실험정신과 독창성은 한국 문학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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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
(출처: https://namu.wiki/jump/vM94KQwhbZujSrFPQifrsY9BFMcs4xg2Va0fg0KzyBG4FHGkafhX9lE7UB%2FNy4t%2BgD3%2F11wcMes5NQEIwCsDeuEGiPqzlqUjN21OTaggtmpR0smozFBKIJJe7KffpxkF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는 이상(李箱)의 작품 〈날개〉 속에 등장하는 강렬한 문장으로, 그의 삶과 문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라는 혼란 속에서 시대를 앞서간 이상은 전통적인 문학의 틀을 깨부수며 독창적인 상상력과 실험정신으로 한국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핵과 가난, 시대적 억압 속에서 짧고도 고독하게 마무리되었다.
이상은 기존 문학적 관습을 거부하고, 고뇌와 혼돈을 초현실적 언어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작가였다. 그가 남긴 시와 소설은 당시에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모더니즘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짧은 생애 동안 혁신적인 작품들을 남긴 그의 이야기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는 표현만큼이나 강렬하고 잊히지 않는 흔적을 우리에게 남긴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삶과 문학 세계를 돌아보며, 이상이 한국 문학에 남긴 독창적 발자취를 탐구하고자 한다.
어린 날, 빛과 그늘의 자취
이상(본명: 김해경(金海卿))은 1910년 9월 23일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인 당시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3년 후인 1913년, 이상은 가족과 떨어져 백부 즉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으로 입양되었다. 백부 김연필은 일찍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유교와 학문을 교육시키며 그를 지원해주었으나, 애정은 전혀 주지 않은 채 엄하게만 대했다.
그 후, 백부는 북지에서 새로 여자를 데려왔고, 때문에 백모는 집을 나가게 되었다. 백부가 데려온 새로운 아내 '김영숙'은 아이까지 데려오며 자신의 아이와 이상을 차별하고 홀대했다. 백부 또한 백모가 이상을 차별하고 홀대하는 것을 목격함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린 조카 이상을 입양했는데도 아들이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영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 이상의 여동생인 김옥희는 이러한 유년 시절이 이상의 염세적인 성격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벽돌 사이에 피어난 문학의 싹
이상은 1917년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화가 구본웅과 동기생이 되어 오랜 친구로 남았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동광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통학교와 합병되자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보성고보에 재학 중,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화가 지망생이 되었으며 학업 성적은 상급 수준에 달했다. 1925년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이 입선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상은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 버려진 목단 열 끗을 정확히 그려내거나 자 없이도 반듯한 직선을 긋는 등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또한, 스스로 화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가난한 화가가 아닌 배곯을 일 없는 기술자가 되라는 백부 김연필의 반대로, 이상은 1927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지금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해 1929년 건축과를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둬 수석 졸업했다. 졸업식에 참여한 친부모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를 문경과 차별하는 백부모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동시에 그를 방치했던 친부모에게도 분노를 느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상은 졸업 후 건축 관련 부서인 조선총독부에서 특별채용되어 조선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출셋길에 오른다. 일과 병행하며 글쓰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0년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집필하며, 그림을 그려 미술 전람회에서도 임선을 하게 된다. ‘이상’이라는 필명 아래 깨어난 그의 언어는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깨어난 언어의 날개
승승장구하던 이상에게 최악의 순간이 찾아온다. 1931년 이상이 잦은 기침으로 병원을 방문했고, 22세에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당시 폐결핵은 치료가 너무 어려운 병 중 하나였으며, 1933년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해져 각혈 증세까지 보이게 되었다. 악화된 폐결핵으로 건축 일도 그만두고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요양 후 이상은 경성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온천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다방의 마담으로 두고 동거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당시 다방은 굉장한 선진 문물이었으며, 예술가와 지식이 모여드는 ‘살롱’의 역할을 했다. 여기서 이상은 당대 문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상을 비상한 사람이라고 여긴 문인들은 이상의 시를 신문에 연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상은 이때부터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의 문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이중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가톨릭청년에서 시 <꽃나무>와 <이런 시>를 발표했고, 이듬해인 1934년에는 순수문학 단체 구인회에 가입했다. 또한 이태준의 도움을 받아 조선중앙일보에서 오감도를 연재했지만, 독자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15회 만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신문사에서는 이상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편집국장들이 현재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등 유명 문인들이었다. 그래서 문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의 시는 최고의 문인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무는 별빛, 비극으로 마감된 짧은 숨결
1935년, 다방 제비를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한다. 인사동의 카페 ‘쓰루(B)’와 ‘다방 69’를 개업 양도하고, 명동에서 다방 ‘무기’를 경영하다 문을 닫은 후 성천, 인천 등을 오가며 생활했다. 1936년,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 취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
그 해 6월, 변동림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이상은 길거리에서 갑작스레 체포를 당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동 수상자로 붙잡혀 한 달 가까이 감옥에 갇혔다. 추운 감옥에서 한 달 내내 갇혀 있던 탓에 폐결핵으로 좋지 않았던 몸이 더욱 악화되며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풀려났지만 결국 1937년 26세에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둔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상 - 이런 시 中
이상의 삶은 짧았지만, 그의 문학은 한국 모더니즘의 중요한 기둥으로 남아 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독창적인 시도와 실험정신으로 문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상은 유럽의 실험적 시도를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자기화하여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예를 들어, ‘오감도 제4호’에서 숫자를 뒤집어 놓은 것은 유럽의 시각적 실험시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만의 독특한 시도였다.
이상은 흔히 천재 예술가로 평가되며, 그의 파격적인 문학적 기법은 그가 전위적 실험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기성적인 가치와 권위에 도전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상은 한글로 쓴 시뿐만 아니라 일본어로도 시를 남겼지만, 1933년 6월 1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한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정체성과 언어 선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이상의 실험정신과 독창성은 한국 문학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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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