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s://variety.com/2017/vintage/features/tolkien-lord-of-the-rings-1202506533 /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세상에는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하나의 우주를 창조해낸 작가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근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 바로 '존 로널드 루엘 톨킨(J.R.R. Tolkien)'이 있다.
그는 언어학자의 섬세함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고대 신화와 전설에 대한 깊은 이해로 중간계라는 방대한 세계를 구축했다. <호빗(The hobbit)>의 소박한 모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장대한 서사로 뻗어 나갔고,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전설들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독자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톨킨의 이야기는 단순한 판타지의 창조를 넘어, 인간의 고통과 희망, 사랑과 희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희망, 망각의 어둠 속에서 다시 노래하는 별의 언어. 톨킨은 자신만의 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빛을 좇을 수 있는가?"
-J.R.R. 톨킨
이번 기사에서는 톨킨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보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신화적 유산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작은 별이 드넓은 우주에 나오다
J.R.R 톨킨, 본명 '존 로널드 루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은 1892년 1월 3일 오렌지 자유국 블룸폰테인(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스테이트 블룸폰테인)에서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 '아서 루엘 톨킨(Arthur Reuel Tolkien)'과 어머니 '메이블 톨킨(Mabel Tolkien)'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톨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났지만 1896년 3~4살 때 아버지가 승진을 하여 영국의 버밍엄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사실상 영국 '버밍엄(Birmingham)'이 고향인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국 버밍엄에 이주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 관절, 중추신경계, 피하 조직을 침범하는 염증성 질환인 '류머티즘 열(rheumatic fever)'로 사망하고 만다. 당시 톨킨의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영국에 비자를 신청 후 장기방문 중이었다. 가정의 생계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어머니는 어린 톨킨을 외할아버지에게 보냈다. 그 후에는 영국 잉글랜드 주에 위치해 있는 '우스터셔주(Worcestershire)'로 이주했고, 이 시골 마을은 후에 톨킨의 작품에 큰 영감을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집안에 소득이 없자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풍경과 나무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톨킨을 보고 어머니는 식물학을 가르쳤으며, 그 당시에도 최대 관심사가 언어였던 톨킨에게 라틴어의 기초를 가르쳤다. 톨킨이 4살 무렵부터 라틴어 글을 읽고, 금세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으로 인하여 톨킨은 언어학자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를 주었고, 어린 톨킨은 <보물섬(Treasure Island)>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Pied Piper of Hamelin)>를 싫어했으나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는 심란해 하면서도 즐겼다. 그는 '조지 맥도널드(George MacDonald)'의 판타지 <레드 인디언>과 '앤드류 랑(Andrew Lang)'의
<페어리 북>을 좋아했는데, 이는 후에 톨킨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장 작은 사람조차도 미래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J.R.R. 톨킨
그의 어머니는 외가 모두가 열성적인 성공회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심한다. 톨킨의 어머니가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심하자 '성공회(Anglican)' 신자였던 친척들은 톨킨 일족에게 등을 돌리고 경제적 지원을 끊음으로써 톨킨 모자는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된다. 톨킨은 다시 영국 버밍엄 남부의 교외에 위치해 있는 '킹스 히스(Kings Heath)'로 이사를 간다. 톨킨은 그곳을 탐험하기를 좋아했으며, 후에 그의 소설에 종종 이름이 비슷하게 등장한다. 어머니가 심어준 신앙과 학문적 관심은 훗날 톨킨의 삶과 작품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T.C.B.S.와 문학적 시작
10대 시절, 톨킨은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학교(King Edward's School)'에 입학한다. 그는 조지 5세의 대관식 정렬식 때 버킹엄 궁전 게이트에 붙일 포스트를 함께 작업했으며, 학교에서 상당히 공부를 잘해 전교에서 인정받았던 학생이었다. 그 후 '성 필립 문법학교(St Philip's Grammar School)'에 입학한다.
톨킨이 12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은 없다고 생각한 C.S. 루이스와는 달리 톨킨은 그의 어머니가 믿음으로 인해 순교했다고 믿었으며 그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톨킨의 독실한 신앙은 성공회 신자인 C.S.루이스와의 대화에도 깊이 베어 있으며, 그의 작품 속에도 다양한 상징과 가치로 나타난다.
그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두 아들의 후견인으로 '버밍엄 오라토리오회'의 '프랜시스 자비어 모건' 신부를 지목했고, 톨킨은 '버밍엄 에지바스턴' 지역에서 페로트 폴리와 빅토리아풍 건물인 지역 급수소 근처에 살았다. 이들은 후에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어둠의 탑을 상상해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다른 요소로는 버밍엄 박물관에 무료로 전시했던 '프리 라파엘리티 브라더후드'와 '에드워드 번 존스'의 로마풍의 중세 그림들이었다고 전해진다.
1911년 톨킨은 킹 에드우드 스쿨에서 '롭 길슨', '제프리 스미스', '크리스토퍼 와이즈맨'이라는 3명의 친구를 만나 'the T.C.B.S.'라는 일종의 모임을 결성한다. 모임의 이름은 'Tea Club, Barrovian Society'에서 딴 것으로, 멤버들이 학교 근처의 바로우 스토어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던 것에서 생각해낸 이름이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1914년 런던의 와이즈맨 집에서 다시 뭉쳤고 톨킨에게 이 모임은 그가 시를 쓰는데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911년 톨킨은 스위스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은 <호빗>의 주인공 '빌보 배긴스(Bilbo Baggins)'의 미스티 마운틴행 여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해 10월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교 엑스터 칼리지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인문학을 공부했지만 영어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1915년 졸업한다.
작은 별이 달을 만났을 때
프랜시스 자비어 모건 신부는 자상하면서도 규율 있는 모습으로 톨킨 형제에게 신앙과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아가 된 후 친척들의 냉담한 반응에 처했던 톨킨 형제에게 사비를 들여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톨킨은 그 덕분에 프랜시스 신부를 깊이 존경했고, 그의 사랑과 도움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톨킨이 16세가 되던 해 프랜시스 신부와 심각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톨킨이 3살 연상이었던 '이디스 브랫(Edith Mary)'과 사랑에 빠지고 교제하게 된 사실 때문이다. 프랜시스 신부는 이디스가 톨킨의 학업을 방해한다고 보고 21살이 되기 전까지 두 사람의 만남을 금지한다.
톨킨은 이 조건에 따랐지만 21세가 되던 생일 아침에 이디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시 받아주고 결혼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이디스는 톨킨이 자신을 잊을 줄 알고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지만 결국 톨킨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으며, 결혼하고 톨킨의 설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1916년 3월 22일, 둘은 워릭에 소재한 '세인트 마리 이마큘레이트 성당(St. Mary's Cathedral)'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랜시스 신부는 톨킨에게 계속해서 엄격하게 그 교제를 끊으라고 말하였고,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화해하게 된다.
프랜시스 신부가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한 이유는 옥스퍼드 대학 준비 중이던 톨킨의 장래를 걱정한 것과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이디스가 톨킨의 신앙에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프랜시스 신부의 태도는 톨킨에게 큰 아픔이었지만, 그렇다고 프랜시스 신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거두지 않았다.
후에 차남 '마이클 힐러리 톨킨(Michael Hilary Reuel Tolkien)'에게 쓴 편지에서 프랜시스 신부에 대해서 "진짜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와 같은 후견인이었다"고 묘사했다.
톨킨은 십 대 시절에 이미 본인의 ‘달’ 이디스와 사랑에 빠져 여러 어려운 시기를 거쳐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되고, 아내 이디스에게 평생 충실한다. 비록 이디스가 톨킨의 깊은 가톨릭 신앙을 진심으로 공유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 주로 옥스퍼드의 고전학자들과 영문학자들, 작가들로 이루어진 톨킨의 벗들에게 이질감과 일종의 질투심 같은 속앓이를 겪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디스와의 깊은 부부애는 톨킨에게 있어 삶의 중심이었다.
톨킨이 평생 해로한 배우자와의 관계는 그저 인생을 동반한 것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한 더없이 소중한 관계였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훗날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연인 ‘베렌과 루시엔’의 서사로 은유되어 톨킨이 아내에게 품은 진심 어린 애정이 작품 속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별이 빛을 잃던 날
1914년 7월 28일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톨킨은 영국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소위로 임관한다. 본인도 사실 처음에 원하지는 않았고 입대를 연기했지만 당시에는 자원하지 않으면 겁쟁이로 취급받는 분위기였다. 케녹 체이스의 13보충대대에서 11개월간 훈련한 뒤,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한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톨킨의 문학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반지의 제왕과 중간계를 비롯한 그의 모든 신화 체계에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로 승화된다.
톨킨은 그저 판타지의 아버지를 넘어 인간의 희망과 사랑, 희생을 신화적 언어로 풀어낸 작가다. 그의 삶 자체가 전쟁과 고통, 종교와 사랑, 우정과 문학적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 여정이었다. 그가 남긴 중간계 신화와 수많은 언어들은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독자의 가슴 속에서 ‘별들의 노래’로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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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
(출처: https://variety.com/2017/vintage/features/tolkien-lord-of-the-rings-1202506533 /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세상에는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하나의 우주를 창조해낸 작가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근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 바로 '존 로널드 루엘 톨킨(J.R.R. Tolkien)'이 있다.
그는 언어학자의 섬세함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고대 신화와 전설에 대한 깊은 이해로 중간계라는 방대한 세계를 구축했다. <호빗(The hobbit)>의 소박한 모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장대한 서사로 뻗어 나갔고,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전설들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독자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톨킨의 이야기는 단순한 판타지의 창조를 넘어, 인간의 고통과 희망, 사랑과 희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희망, 망각의 어둠 속에서 다시 노래하는 별의 언어. 톨킨은 자신만의 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빛을 좇을 수 있는가?"
-J.R.R. 톨킨
이번 기사에서는 톨킨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보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신화적 유산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작은 별이 드넓은 우주에 나오다
J.R.R 톨킨, 본명 '존 로널드 루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은 1892년 1월 3일 오렌지 자유국 블룸폰테인(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스테이트 블룸폰테인)에서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 '아서 루엘 톨킨(Arthur Reuel Tolkien)'과 어머니 '메이블 톨킨(Mabel Tolkien)'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톨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났지만 1896년 3~4살 때 아버지가 승진을 하여 영국의 버밍엄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사실상 영국 '버밍엄(Birmingham)'이 고향인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국 버밍엄에 이주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 관절, 중추신경계, 피하 조직을 침범하는 염증성 질환인 '류머티즘 열(rheumatic fever)'로 사망하고 만다. 당시 톨킨의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영국에 비자를 신청 후 장기방문 중이었다. 가정의 생계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어머니는 어린 톨킨을 외할아버지에게 보냈다. 그 후에는 영국 잉글랜드 주에 위치해 있는 '우스터셔주(Worcestershire)'로 이주했고, 이 시골 마을은 후에 톨킨의 작품에 큰 영감을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집안에 소득이 없자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풍경과 나무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톨킨을 보고 어머니는 식물학을 가르쳤으며, 그 당시에도 최대 관심사가 언어였던 톨킨에게 라틴어의 기초를 가르쳤다. 톨킨이 4살 무렵부터 라틴어 글을 읽고, 금세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으로 인하여 톨킨은 언어학자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를 주었고, 어린 톨킨은 <보물섬(Treasure Island)>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Pied Piper of Hamelin)>를 싫어했으나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는 심란해 하면서도 즐겼다. 그는 '조지 맥도널드(George MacDonald)'의 판타지 <레드 인디언>과 '앤드류 랑(Andrew Lang)'의
<페어리 북>을 좋아했는데, 이는 후에 톨킨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장 작은 사람조차도 미래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J.R.R. 톨킨
그의 어머니는 외가 모두가 열성적인 성공회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심한다. 톨킨의 어머니가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심하자 '성공회(Anglican)' 신자였던 친척들은 톨킨 일족에게 등을 돌리고 경제적 지원을 끊음으로써 톨킨 모자는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된다. 톨킨은 다시 영국 버밍엄 남부의 교외에 위치해 있는 '킹스 히스(Kings Heath)'로 이사를 간다. 톨킨은 그곳을 탐험하기를 좋아했으며, 후에 그의 소설에 종종 이름이 비슷하게 등장한다. 어머니가 심어준 신앙과 학문적 관심은 훗날 톨킨의 삶과 작품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T.C.B.S.와 문학적 시작
10대 시절, 톨킨은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학교(King Edward's School)'에 입학한다. 그는 조지 5세의 대관식 정렬식 때 버킹엄 궁전 게이트에 붙일 포스트를 함께 작업했으며, 학교에서 상당히 공부를 잘해 전교에서 인정받았던 학생이었다. 그 후 '성 필립 문법학교(St Philip's Grammar School)'에 입학한다.
톨킨이 12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은 없다고 생각한 C.S. 루이스와는 달리 톨킨은 그의 어머니가 믿음으로 인해 순교했다고 믿었으며 그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톨킨의 독실한 신앙은 성공회 신자인 C.S.루이스와의 대화에도 깊이 베어 있으며, 그의 작품 속에도 다양한 상징과 가치로 나타난다.
그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두 아들의 후견인으로 '버밍엄 오라토리오회'의 '프랜시스 자비어 모건' 신부를 지목했고, 톨킨은 '버밍엄 에지바스턴' 지역에서 페로트 폴리와 빅토리아풍 건물인 지역 급수소 근처에 살았다. 이들은 후에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어둠의 탑을 상상해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다른 요소로는 버밍엄 박물관에 무료로 전시했던 '프리 라파엘리티 브라더후드'와 '에드워드 번 존스'의 로마풍의 중세 그림들이었다고 전해진다.
1911년 톨킨은 킹 에드우드 스쿨에서 '롭 길슨', '제프리 스미스', '크리스토퍼 와이즈맨'이라는 3명의 친구를 만나 'the T.C.B.S.'라는 일종의 모임을 결성한다. 모임의 이름은 'Tea Club, Barrovian Society'에서 딴 것으로, 멤버들이 학교 근처의 바로우 스토어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던 것에서 생각해낸 이름이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1914년 런던의 와이즈맨 집에서 다시 뭉쳤고 톨킨에게 이 모임은 그가 시를 쓰는데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911년 톨킨은 스위스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은 <호빗>의 주인공 '빌보 배긴스(Bilbo Baggins)'의 미스티 마운틴행 여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해 10월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교 엑스터 칼리지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인문학을 공부했지만 영어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1915년 졸업한다.
작은 별이 달을 만났을 때
프랜시스 자비어 모건 신부는 자상하면서도 규율 있는 모습으로 톨킨 형제에게 신앙과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아가 된 후 친척들의 냉담한 반응에 처했던 톨킨 형제에게 사비를 들여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톨킨은 그 덕분에 프랜시스 신부를 깊이 존경했고, 그의 사랑과 도움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톨킨이 16세가 되던 해 프랜시스 신부와 심각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톨킨이 3살 연상이었던 '이디스 브랫(Edith Mary)'과 사랑에 빠지고 교제하게 된 사실 때문이다. 프랜시스 신부는 이디스가 톨킨의 학업을 방해한다고 보고 21살이 되기 전까지 두 사람의 만남을 금지한다.
톨킨은 이 조건에 따랐지만 21세가 되던 생일 아침에 이디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시 받아주고 결혼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이디스는 톨킨이 자신을 잊을 줄 알고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지만 결국 톨킨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으며, 결혼하고 톨킨의 설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1916년 3월 22일, 둘은 워릭에 소재한 '세인트 마리 이마큘레이트 성당(St. Mary's Cathedral)'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랜시스 신부는 톨킨에게 계속해서 엄격하게 그 교제를 끊으라고 말하였고,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화해하게 된다.
프랜시스 신부가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한 이유는 옥스퍼드 대학 준비 중이던 톨킨의 장래를 걱정한 것과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이디스가 톨킨의 신앙에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프랜시스 신부의 태도는 톨킨에게 큰 아픔이었지만, 그렇다고 프랜시스 신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거두지 않았다.
후에 차남 '마이클 힐러리 톨킨(Michael Hilary Reuel Tolkien)'에게 쓴 편지에서 프랜시스 신부에 대해서 "진짜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와 같은 후견인이었다"고 묘사했다.
톨킨은 십 대 시절에 이미 본인의 ‘달’ 이디스와 사랑에 빠져 여러 어려운 시기를 거쳐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되고, 아내 이디스에게 평생 충실한다. 비록 이디스가 톨킨의 깊은 가톨릭 신앙을 진심으로 공유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 주로 옥스퍼드의 고전학자들과 영문학자들, 작가들로 이루어진 톨킨의 벗들에게 이질감과 일종의 질투심 같은 속앓이를 겪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디스와의 깊은 부부애는 톨킨에게 있어 삶의 중심이었다.
톨킨이 평생 해로한 배우자와의 관계는 그저 인생을 동반한 것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한 더없이 소중한 관계였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훗날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연인 ‘베렌과 루시엔’의 서사로 은유되어 톨킨이 아내에게 품은 진심 어린 애정이 작품 속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별이 빛을 잃던 날
1914년 7월 28일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톨킨은 영국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소위로 임관한다. 본인도 사실 처음에 원하지는 않았고 입대를 연기했지만 당시에는 자원하지 않으면 겁쟁이로 취급받는 분위기였다. 케녹 체이스의 13보충대대에서 11개월간 훈련한 뒤,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한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톨킨의 문학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반지의 제왕과 중간계를 비롯한 그의 모든 신화 체계에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로 승화된다.
톨킨은 그저 판타지의 아버지를 넘어 인간의 희망과 사랑, 희생을 신화적 언어로 풀어낸 작가다. 그의 삶 자체가 전쟁과 고통, 종교와 사랑, 우정과 문학적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 여정이었다. 그가 남긴 중간계 신화와 수많은 언어들은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독자의 가슴 속에서 ‘별들의 노래’로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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