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이중 메시지, 들리지 않는 본심 | 밸류체인타임스

연하진 칼럼니스트
2025-07-03
조회수 528


[밸류체인타임스=연하진 칼럼니스트]

상담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이제는 기대를 내려놨어요”라는 말이다. 배우자나 자녀처럼 가까운 관계에서 실망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그 말이 실제 행동과 괴리가 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부모 내담자는 자녀가 공부뿐 아니라 교우 관계와 학교생활 전반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성적 같은 건 기대 안 해요. 그냥 정규 교육만 마치면 돼요”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녀에게 매일 공부를 시키고 직접 과제를 관리하고 있었다. 



말로는 기대를 내려놨다고 했지만, 자녀는 매일 부모가 시키는 공부 시간을 가장 괴로운 시간이라고 여겼다.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기분을 맞추려 애써온 탓에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욕구’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부모는 “성적은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자녀가 공부하기 싫은 기색만 보여도 깊은 한숨과 실망한 표정을 보이며 압박했다. 자녀는 이러한 태도에 고통을 호소했다. 이처럼 말과 행동이 서로 충돌하는 의사소통은 전형적인 이중구속(이중메시지, double bind)의 형태다.


   

(출처: unsplash)



이중구속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이상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해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하더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1950년대에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조현병(정신분열병)에 관한 연구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이중구속은 사고와 감정에 혼란을 일으키는 의사소통 패턴으로 설명된다.



이중구속은 권위자나 인정받고 싶은 관계에서 자주 발생하며, 일상 속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상사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라”라고 해놓고 막상 부하직원이 의견을 내면 질책하거나 묵살하는 경우가 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화 안 났어”라고 말하면서 싸늘한 표정과 분위기로 상대방을 위축시키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상황이다.



문제는 상대가 어느 하나의 메시지를 선택해도 다른 메시지에 어긋나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실패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이다. 권위를 중시하는 문화일수록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돌려 말하는 방식이 더 흔한데, 이는 오히려 혼란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특히 어린 아동이 반복적으로 이중 메시지를 겪으며 자라면, 정서적 혼란과 불안을 내면화해 성장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냉담한 태도를 보이거나, “먹고 싶은 거 골라”라고 해놓고는 결국 부모가 원하는 것으로 바꾸는 경우, 자녀는 ‘부모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을 느낀다. “공부가 다가 아니야, 친구들과도 잘 지내야지”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친구와 노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모순된 메시지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 아이는 언젠가 부모의 말이 또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된다. 




(출처: unsplash)



대부분의 갈등은 사실 ‘본심’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아서 생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명확하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오해나 상대방의 진심을 의심하게 되는 불안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중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사회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사람들이 취약성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며, 솔직한 감정 표현이 거절이나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느낀다고 지적한다. 이는 진짜 감정을 감추고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심리를 낳는다. 결국, 이러한 회피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전략이지만, 종종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만든다. 



"눈치없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표현은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필자 역시 학창 시절에 선생님이나 어른들로부터 이런 말을 종종 접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타인의 감정과 기대를 빠르게 읽고 이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눈치 빠름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상사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하는 상황에서도 후배들이 나서서 상사의 짐을 대신 들었지만, 지금은 상사가 부탁하지 않으면 ‘눈치껏’ 먼저 나서기보다는 자기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이 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MZ세대의 합리성과 개인 중심 사고를 반영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세대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2019년 시행) 등 제도적 변화 역시 영향이 크다. 권위와 위계에 기반한 행동 방식보다, 각자의 역할과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가 강조되면서, 명확한 의사 표현과 말과 행동의 일치가 더욱 중요해졌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기성세대에게는 ‘이기적’이거나 ‘각박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며,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줄이는 노력은 이중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중요한 과정이다.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더라도, 자기 인식과 자기 결정성을 회복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출처: unsplash)



혹시 나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반복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면, 무의식 중에 이중 메시지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음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점검해보자. 


1.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2. 그 욕구를 표현할 때, 내 감정과 언어는 일치하고 있는가?


3. 내 말이 상대방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가?


만약 상대방이 내 말을 따른 것 같지만, 여전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문제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본심을 명확히 전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진정한 소통은 ‘상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알고 정확히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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