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금명이가 먹고 자란 푸름의 원천 - 자아 분화의 힘 | 밸류체인타임스

연하진 칼럼니스트
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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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포스터



[밸류체인타임스=연하진 칼럼니스트] 

"아빠의 겨울에 나는 녹음(綠陰)이 되었다. 그들의 푸름을 다 먹고 내가 나무가 되었다."


2025년 넷플릭스 화제작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명대사 중 하나다. 싱그럽고 우거진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이 짧은 두 줄은, 부모의 희생적 사랑을 통해 성장한 딸 금명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세계 시청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고, 외국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눈물로 퉁퉁 부은 인증샷이 SNS에 올라올 정도였다. 


아이들은 말한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 자란다고 한다. 이는 매우 직관적이지만 간과되기 쉬운 현실이다. 지인으로부터 들은 6~7세 무렵 아이들의 소꿉놀이 일화가 기억난다. 아내 역할을 한 여자아이가 정성스레 차려준 장난감 식탁을, 남편 역할을 한 남자아이가 대뜸 “밥상이 이게 무엇이냐”며 식탁을 한 번에 엎어버린 사례다. 아이들이 가정 내 상황을 그대로 흡수하고 재현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모가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아도, 평소의 말투와 태도, 눈빛과 분위기가 아이들의 무의식에 깊이 새겨진다. 


드라마 속 금명은 아버지 관식의 헌신적인 사랑을 기억하면서도, 그의 사랑이 항상 어머니 애순을 향해 있었다고 말한다. ‘딸바보’ 아버지로 묘사되는 관식이 사실은 아내를 더 우선시했다는 이 대사는, 진정한 부부 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요즘 부부 갈등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자녀만 챙기고 배우자는 방치하는’ 부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결이다. 


부부 사이의 갈등이나 냉담함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아이들에게는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계적인 부부 관계 치료사 가트맨 박사 부부(John & July Gottman)는 부모의 갈등이 자녀의 스트레스 지수를 실질적으로 높인다고 밝혔다. 소변검사에서 확인된 아이들의 스트레스 수치는 단순한 감정뿐만 아니라 신체적 스트레스 반응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가트맨 박사 부부는 부모의 미성숙한 모습이 자녀의 감정발달과 지능발달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관식과 애순처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자녀에게 안정감과 푸름을 주는 일은 없다. 



   출처: unsplash



문제는 많은 부모들이 이를 간과한다는 점이다.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나라에서 부모는 자녀 교육에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지만, 정작 자기 삶의 질, 부부 관계의 만족도는 뒷전으로 밀려난 경우가 많다. “자녀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이혼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모순이다. 독극물이 가득한 물에서 물고기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리더십 분야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는 그의 저서 『성공하는 결혼생활의 7가지 습관』에서 오늘날 부부의 관계가 흔들리는 가장 큰 원인으로 “배우자 관계를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 것”을 꼽는다. 그는 일, 공동체 관계, 취미, 스포츠, 심지어 자녀보다도 배우자와의 관계가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건강한 부부 관계가 다른 모든 관계의 기반이 된다고 말한다. 


코비는 인간관계를 ‘감정은행계좌’에 비유하며 관계 유지의 핵심을 설명한다. 이는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배려, 약속 지키기, 경청 등의 행동을 통해 계좌에 ‘저축’이 이뤄지고, 무례함이나 무시 등의 부정적인 행동은 ‘인출’로 작용한다는 개념이다. 특히 배우자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위해 한 번의 인출을 만회하려면 최소 다섯 번 이상의 저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관계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의지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필수인 셈이다. 


그러나 갈등이 많은 부부일수록 “왜 내가 먼저 노력해야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기 쉽다. “배우자만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원망 섞인 말은 흔히 반복되는 레퍼토리다. 하지만 이런 말이 과연 진실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기업가이자 자기계발 전문가인 짐 론(Jim Rohn)은 “나는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다섯 사람의 평균”이라고 말한다. 이는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의미면서 동시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곧 나 자신을 반영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결국, 나의 삶과 관계는 내가 선택해온 사람들과 내가 맺은 방식의 결과일 수 있다. 


미국 정신과 의사이자 가족치료의 선구자인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은 ‘자아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라는 그의 핵심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아 분화란 한 개인이 태어나고 자란 가족, 즉 원가족(family of origin)으로부터 정서적으로 얼마나 독립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쉽게 말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답게 설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의미한다. 자아 분화 수준이 높을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 확고한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자율적이며, 타인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객관적인 사고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대인관계에서도 다른 사람의 평가나 기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지키면서도 건강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아버지 관식은 1960~70년대 가부장제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시절, 제주도 어촌에서 서슬 퍼런 집안 어른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하는 애순을 위해서라면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혼 후 남성과 집안 어른들만이 따로 먹는 밥상 앞에서도, 애순과 자신의 딸이 있는 밥상으로 과감히 돌아 앉는 등 철저히 아내 편이 되어준다. 그는 자신의 원가족의 기대나 전통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족을 지키며 소신 있게 행동한다. 이러한 모습은 관식이 높은 자아 분화 수준을 가진 인물임을 잘 보여준다. 


보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자아 분화 수준을 가진 사람에게 익숙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배우자를 선택한다고 한다. 관식의 딸 금명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고, 훗날 그와 닮은, 아내를 아끼는 마음이 깊은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관식 또한 사위될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듯한 면모를 발견하고 흡족해하며 딸의 결혼을 허락한다.



출처: unsplash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보고 배운 모습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이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결국 그 익숙함에서 비롯된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러한 경향은 부부 관계는 물론, 친구, 직장 동료, 공동체 등 다양한 인간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부모의 삶은 곧 자녀의 관계 맺기 방식과 정서적 토대를 형성하는 거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아 분화 수준이 낮을 경우, 개인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분리해내지 못하고, 뚜렷한 주관 없이 타인의 인정과 수용을 얻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개별성을 희생하게 된다. 이는 자아 분화와 대비되는 ‘융합(fusion)’ 개념으로 설명되는데, 특히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관계에서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얽혀 있을수록 분화 능력은 더욱 약화된다. 


그 결과, 감정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고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며, 스트레스 상황에 극도로 취약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마보이’, ‘마마걸’이 바로 낮은 자아 분화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그 반대 양상으로는 가족과 단절하며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형태도 나타날 수 있다. 


갈등이 잦은 부부일수록 자아 분화 수준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상대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이 어떤 정서적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는 작업이 중요하다. 희망적인 부분은 자아 분화가 선천적으로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과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웬은 가족 구성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원가족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정서적 독립을 이루면, 그 변화는 가족 전체 체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분화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전한다. 즉, 한 사람이 바뀌면 가족 전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뜻이다. 


자아 분화 수준을 높이기 위한 첫걸음은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상대방, 배우자나 자녀, 지인보다 자신의 내면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느끼는 불안, 분노, 실망 등의 감정이 단지 타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잠재된 감정의 반응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아 분화의 핵심은 감정과 사고를 구분하고 이 둘을 균형 있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이를 위한 실천적인 방법으로, 필자는 감정, 원인, 자기 해석을 분리해 표현하는 연습을 권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나”라는 말에는 감정의 원인과 자기 해석이 뒤섞여 있다. 이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나는 지금 화가 난다.” (감정)

“그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행동, 원인)

“그가 나를 무시했다고 느꼈다.”(자기 해석)


보웬의 이론에 따르면, 자아 분화는 원가족 안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 왔는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어린 시절 가족 내에서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하려 애쓰거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왔던 경험이 있다면, 그러한 습관은 현재의 인간관계에서도 반복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오랜 습관과 무의식적 반응은 혼자 힘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심리상담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폭싹 속았수다> 속 관식과 애순이 자녀 금명에게 전한 ‘푸름’은, 그들 부부가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는 건강한 관계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성년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내가 가진 ‘푸름’이 자녀의 삶에 울창한 녹음으로 드리워질 만큼 충분히 채워져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부 간 갈등 속에서 서로의 푸름을 소진하고, 그 결과 자녀가 정서적으로 겨울 한 가운데 남겨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금, 부부의 행복을 위한 ‘자기 인식’이라는 첫 걸음을 내디뎌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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