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의 춤, 클로드 모네의 삶과 예술 | 밸류체인타임스

황지민 수습기자
2024-12-07
조회수 1976

(출처: https://rarehistoricalphotos.com/claude-monet-studio-photos/ 캡처본)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수습기자]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변화를 화폭에 담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그는 빛의 다양한 시간대, 계절, 날씨 변화가 풍경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여 붓터치와 색채가 만들어내는 유려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작품을 창조해냈다.


“내가 얻는 풍요로움은 영감의 원천인 자연에서 비롯됩니다.”

-클로드 모네




빛을 만난 소년


클로드 모네는 1840년 11월 14일, 식료품 상인이었던 아버지 '클로드 아돌프 모네'와 노래를 사랑하는 예술적 감각을 가진 어머니 '루이즈 유스티느' 사이에서 차남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845년, 그의 아버지가 매제와 함께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던 프랑스 서북부에 위치한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모네는 자연과 바다의 풍경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출처: https://www.artart.today/artletter0209 캡처본)


지금은 아름다운 풍경화로 유명한 모네이지만, 순간적으로 피사체를 파악하고, 빠르게 그리는데 엄청난 재능을 발휘하여 '캐리커처'를 그렸다. 1851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르아브르 중등학교에서 예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지만 학교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모네는 화폭에 담을 대상을 찾아 르아브르를 돌아다니며 주변 사람들의 캐리커쳐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드로잉 솜씨가 남달랐던 그의 캐리커쳐는 동네에서 입소문을 타며 실제로 모네가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모네가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던 아버지를 설득하는데도 성공했다.


동네에서 유명해진 모네는 한 미술재료상의 진열장에 자신이 그린 캐리커처를 전시했다. 이때 모네는 같은 진열장에 놓인 '외젠 부댕(Eugene Boudin)'의 풍경화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부댕의 너무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웅장한 풍경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부댕의 그림이 자신의 그림 옆에 있는 것도 못마땅해했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출처: https://www.mk.co.kr/news/culture/9605353 캡처본)


그러나 부댕은 모네의 캐리처커에서 뛰어난 묘사력을 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이후 부댕은 모네를 만나고 싶어 여러 번 만남을 요청했으나 모네는 계속 거절했다. 하지만 부댕의 끈질긴 요청 끝에 두 사람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외광회화'를 추천한다. 19세기 당시에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외부에서 그림을 그리기란 많은 장비를 동반해야 했고,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흔하지는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회화가 각광을 받던만큼 작품을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시각각 풍경이 변하는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웠다. 대체로 다른 화가들은 바깥 장면만 빠르게 스케치한 후 화실에서 작업하거나 머릿속으로 그려 작품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튜브 물감이 발명되고 상용화되면서 야외에서도 간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빠르게 대상의 특징을 캐치할 수 있는 모네의 능력을 보고 풍경화가 부댕은 바깥에서 그리는 '외광회화'를 추천한 것이다. 모네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네가 자연의 빛을 인식하고 빠져들게 되어 자연풍경을 그리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결국 눈이 열렸다. 나는 정말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클로드 모네




 빛이 숨을 고르던 순간들


1859년, 모네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 감상을 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 파리의 화가들이 옛 거장들의 기술을 따라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반면, 모네는 그런 모습과 달리 자신의 도구를 들고 나와 자신만의 화풍을 그려나갔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91%90%EC%95%84%EB%A5%B4_%EB%A7%88%EB%84%A4 캡처본 / 에두아르 마네)


모네는 몇 년 동안 파리에 머물며 풍경화에 매진했고, 이 시기에 파리를 찾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를 비롯한 젊은 신진 예술가들과 교류하게 된다.


1861년 프랑스는 알제리와 전쟁을 벌이던 중 모네도 프랑스 군에 입대하여 알제리에 파병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독특한 빛과 색채를 경험하며, 자연의 빛을 포착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몇 가지의 그림을 그려 작품들을 남겼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후에 모네는 한 인터뷰에서 알제리의 이국적인 느낌이 자신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입대 1년 후인 1862년에 모네는 장티푸스로 인해 군 복무를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전역 후, 모네는 전통 예술에 환멸을 느껴 전통 미술 아카데미 대신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 화가의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함께 예술의 새로운 접근법을 고민하고 새로운 기법들을 연구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아들이 전통 회화를 그릴 것을 바랐던 모네의 아버지는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린다. 이는 모네를 가난으로 몰아넣었고, 생활고와 진로에 대한 고민 속에서 한때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하게 만들 정도로 깊은 우울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이 끊긴 상황에도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고수했다.


"나는 스튜디오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클로드 모네




빛과 사랑의 새벽, 인상주의가 움트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92%80%EB%B0%AD_%EC%9C%84%EC%9D%98_%EC%A0%90%EC%8B%AC_%EC%8B%9D%EC%82%AC _(%EB%AA%A8%EB%84%A4,_%ED%8C%8C%EB%A6%AC)#/media/%ED%8C%8C%EC%9D%BC:Monet_dejeunersurlherbe.jpg 캡처본 / 모네가 오마주한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5년 1월, 모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2년 전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큰 파란을 일으킨 동명의 작품을 오마주한 것이다. 19세기 당시 파리의 살롱전은 주류 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영예로운 전시였는데, 마네 역시 주류미술에서 유행하는 그림을 냈지만 보기 좋게 낙선하고 만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92%80%EB%B0%AD_%EC%9C%84%EC%9D%98_%EC%A0%90%EC%8B%AC_%EC%8B%9D%E C%82%AC#/media/%ED%8C%8C%EC%9D%BC:Edouard_Manet_-_Luncheon_on_the_Grass_-_Google_Art_Project.jpg 캡처본 / 에두아르 마네)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작품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당시 새로운 예술 움직임을 꿈꾸는 화가들에겐 큰 영감이 되었다. 모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모네는 마네가 거부당한 살롱전에 자신이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출품하고 싶었지만 작품이 너무 커서 제때 완성할 수 없었다. 대신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그림을 제출한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드레스를 입은 여인'에 등장하는 여성 '카밀'은 모네의 아내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날마다 새롭게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한다."

-클로드 모네



빛으로 피어난 인상주의의 시작


1860년대 후반부터 모네를 비롯한 신진 작가들은 보수적인 주류 미술 협회의 전시로부터 출품을 거절당했다. 결국 1873년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의 예술가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1874년 4월 첫 전시를 열었고, 모네는 이 전시에서 5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중에는 1872년 아침에 그린 '해돋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C%83%81,_%ED%95%B4%EB%8F%8B%EC%9D%B4#/media/%ED%8C%8C%EC%9D%BC:Monet_-_Impression,_Sunrise.jpg 캡처본)


하지만, 전시회 목록 담당자는 작품의 제목이 너무 평범하다며 모네에게 다시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모네는 '인상(Impression)'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인상, 해돋이'로 수정하여 제출했다.


당시 같이 열린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전시회는 매일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지만, 반면 모네와 친구들의 전시는 첫날 175명, 마지막 날 54명만 방문했다. 게다가 대부분은 전시 작품들을 비웃었고, '이들은 붓질조차 서투른 아마추어'라며 비난하였다.


특히 예술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벽지문양의 밑그림만도 못한 막연한 인상에 불과하다며 조롱했다. 모네를 비롯한 화가들은 이 조롱을 뒤집어 자신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사조 중 하나인 인상주의의 탄생이 되었다.


"모두들 내 작품을 논하고 이해하는 척 한다. 마치 이해해야만 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랑하면 될 것을.."

-클로드 모네




자연의 숨결로 그린 화폭


1876년 모네의 아내 카밀은 결핵으로 병을 앓던 중 32세의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모네는 죽은 아내를 보며 유화를 그렸는데, 미술 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는 이 작품을 죽음을 표현한 그간의 모든 작품 중 가장 강렬하고 주관적이라 표현했다.


(출처: https://brunch.co.kr/@caesa76/206)


카밀의 죽음 이후 고통의 시간이 지나자 모네는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세기 최고의 그림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1880년대 초부터 모네는 프랑스 시골 지역을 그리기 시작한다. 풍경과 바다 경관을 그린 연작들을 남기며, 빛의 변화와 계절의 흐름을 포착하기 위해 같은 장면을 여러 번 기록해 일련의 그림으로 발전시켰다.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B%A0%A8_(%EB%AA%A8%EB%84%A4)#/media/%ED%8C%8C%EC%9D%BC:Le_bassin_a ux_nymph%C3%A9as_-_Claude_Monet.jpg 캡처본)


1883년, 모네는 프랑스 근교 지베르니에 있는 집과 정원을 빌리는데 점차 작품을 통해 재산이 늘어나면서 정원을 늘리고 가꾸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에 연못을 들인 것도 이 시기였다. 자연의 빛에 따라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연못은 모네에겐 더할 나위없는 영감이 되었다. 특히나 물 표면의 아슬아슬하게 떠있는 수련은 물에 떠있는 것인지 가라앉는 것인지 불분명한 형태의 인상을 만들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B%A0%A8_(%EB%AA%A8%EB%84%A4)#/media/%ED%8C%8C%EC%9D%BC:Le_bassin_aux_nymph%C3%A9as_-_Claude_Monet.jpg 캡처본)


이에 모네는 매일 정원으로 나가 수련을 그렸다. 때로는 형태가, 또 때로는 색이 변하는 수련의 모습에서 모네는 매순간 새로운 인상을 마주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B%A0%A8_(%EB%AA%A8%EB%84%A4)#/media/%ED%8C%8C%EC%9D%BC:WLA_lacma_Monet_Nympheas.jpg 캡처본)


초기에는 선명하던 형태도 날이 갈수록 인상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B%A0%A8_(%EB%AA%A8%EB%84%A4)#/media/%ED%8C%8C%EC%9D%BC:Claude_Monet_-_Nymph%C3%A9as_W1660_-_Mus%C3%A9e_Marmottan-Monet.jpg 캡처본)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은 모네의 수련연작 250점이 추상회화의 출발점이 됐다고 평가한다.


"물을 그릴 것이다. 아름답고 푸른 물을..."

-클로드 모네




빛과 그림자로 남긴 영원


20세기에 접어들어 모네의 눈에 백내장이 생긴 시련을 겪었다. 점점 시야가 뿌옇게 변했고 때문에 제대로 색을 감별하기 어려워졌다. 백내장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그림들은 이전보다 붉은 느낌을 띄었다.


(출처: https://steemit.com/mediteam/@kimoph/claude-monet-cataract-2)


실제로 백내장 환자들의 시야에는 다른 색보다 강한 빨간색이 더 쉽게 들어온다. 화가로서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네는 작품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3년 모네는 2번의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며, 수술 이후 어느 정도 시력이 회복됐지만 여전히 색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선 어려움이 있었다. 수술 후에 모네는 이전보다 훨씬 푸른 느낌의 수련들을 그려나갔다.


(출처: https://steemit.com/mediteam/@kimoph/claude-monet-cataract-2)


1926년 모네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오랜 친구 조르주 글레망소는 관 위에 드리워진 검은 천을 치우며 '모네에게 검은 색은 없다'고 외쳤고, 색으로 가득 찬 꽃무늬천으로 관을 덮었다.


"나의 인생은 내가 하는 일, 오직 그림만을 생각하며 지나가고 있다"

-클로드 모네


순간적인 인상을 담는다는 모네의 철학은 인상주의라는 시대를 바꾼 사조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20세기 이후 수많은 회화적 도전이 탄생했고, 또 예술은 지속적으로 진화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모네의 도전을 기억하며 작품 속에서 저마다의 감상을 느끼곤 한다. 1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클로드 모네의 대표작 ‘수련’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s://www.musee-orangerie.fr/fr/collection/les-nympheas-de-claude-m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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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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