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세계적인 투자자, '오마하의 현인' 워렌 에드워드 버핏 인생 히스토리 | 밸류체인타임스

문무경 인재기자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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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칠 수 있는 눈과 길 언덕만 있으면 된다… 워렌 버핏의 투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밸류체인타임스=문무경 인재기자] 17세기,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프랑스의 위그노였던 버핏가의 조상도 이때 이주해서 농사를 짓거나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최선을 다해 일하며 살았다. 1930년 8월 30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하워드와 레일라 부부의 삼 남매 중 둘째 아이 워렌 에드워드 버핏이 태어났다.


당시 주식 중개인이었던 하워드는 형편이 좋지 않았다. 1929년 말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 직후 때문이었다. 경제 대공황이란 1929년 10월에 뉴욕 월스트리트의 증권 시장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시작됐다. 10월 24일 목요일과 10월 29일 화요일에 일어난 대폭락으로 은행이 파산했고, 많은 실업자가 발행했으며, 그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하워드는 자신의 지인들과 힘을 모아 주식 중개 회사를 설립했다. 수익률은 낮았지만 이 회사는 지속적으로 수익을 냈다.


워렌은 어려서부터 숫자를 좋아했다. 스스로 돈을 벌고 사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버핏가는 종교집안이었기 때문에 하워드는 항상 워렌이 성직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워렌에겐 교회는 지루한 곳에 불과했다. 워렌은 교회보다 아버지 서재에서 주식이나 투자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워렌은 로즈 힐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워렌은 월반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워렌은 할아버지의 가게에서 코카콜라나 껌을 사고팔았다. 이때 기준으로 세운 20%의 수익률을 워렌은 계속 유지했다. 워렌은 7살 때 오마하 공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1000달러를 버는 1000가지 방법’이라는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워렌의 돈벌이 사업은 점점 다양해지고 규모도 커졌다. 워렌은 친구 액트와 함께 소식지 사업을 구상 중이었다. 워렌이 발행한 소식지 [마구간지기 소년의 선택]은 1부당 25센트에 판매됐다. 장사는 예상보다 더 잘 됐다. 하지만 얼마 뒤 워렌의 소식지는 면허 문제로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워렌의 10살 생일, 워렌은 자신의 생일 선물로 뉴욕 증권 거래소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공립 도서관에 있는 투자 관련 서적까지 다 섭렵한 워렌에게 전 세계 중심이자, 경제의 살아 있는 심장인 뉴욕 증권 거래소는 놀이공원보다 훨씬 신나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이때를 기준으로 워렌은 투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워렌이 11살이 되던 해, 시티즈 서비스라는 주식을 1주당 37달러에 누나 도리스와 함께 100달러의 자금으로 매수했다. 이 주식은 28달러까지 떨어졌지만, 40달러까지 올라 매도를 하게 됐다. 이 일이 워렌의 첫 주식 경험이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1년에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도 참전했다. 1942년, 하워드는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반대하며 하원 의원에 당선됐다. 뉴딜 정책은 정부가 경제와 화폐 공급을 강력하게 간섭하고, 고용을 창출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보수층에게서 사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워렌에게도 원하지 않던 변화가 생겼다. 하워드가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국회 의사당이 있는 워싱턴 근처로 이사를 가야 했다. 결국 워렌 가족은 오마하를 떠나 워싱턴으로 이사를 갔다. 워렌은 새로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도 집에서도 힘이 들었다.


결국 워렌은 오하마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곧 할아버지에게서 답장이 왔다. 할아버지는 워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전했다. 할아버지 덕에 워렌은 오하마로 돌아가게 되었다. 익숙한 환경이어서인지 워렌은 오마하에서 생활하면서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할아버지와의 좋은 고향 생활도 잠시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워렌은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1943년, 워싱턴 앨리스 딜 중학교에서 워렌은 운동도 하지 못하고 친구들과도 어색해했다. 워렌은 여전히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워렌의 성적도 떨어졌다. 워렌은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워렌은 아르바이트 중 신문을 배달하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아플 땐 엄마에게 배달을 부탁하기도 했다. 신문 배달은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한 가지 어려운 점은 구독료를 수금하는 일이었다. 그는 겨우 14살 때 처음으로 세금을 납부했다. 신문 배달로 번 1천 달러에 대한 세금이었다.


돈 버는 일 말고는 워렌의 중학교 생활은 불량스러웠다. 그런 워렌이 마음 아팠는지 아버지는 어느 날 워렌을 따로 불렀다. 워렌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존경하는 아버지에게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꾸지람을 듣고 1945년 3월, 고등학교에 진학한 워렌은 다시 열심히 공부했다. 토론 그룹과 골프팀에도 들어가 특별 활동도 했다. 결국 워렌은 3년이 걸리는 고등학교 과정을 2년 6개월 만에 마쳤다.  

사진=Flickr 

물론 고등학생 때도 돈 버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워렌은 신문 배달로 한 달에 175달러나 벌었는데, 이는 당시 학교 선생님 월급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그런데도 워렌은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워렌은 친구 댄리와 함께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핀볼 게임기 사업이었다. 당구장에 핀볼 게임기를 놓으려던 계획은 실패했지만 한 미용실에 수익을 5대5로 나누어 핀볼게임기를 놓기로 했다.


일주일 후 핀볼기계의 수익은 무려 25달러나 되었다. 일주일 만에 기계 값을 번 것이다. 소식을 들은 다른 가게 사장들에게도 제의를 받고 핀볼기계는 늘어났다. 늘다 보니 7대가 됐고, 결국 18대까지 늘어나 워렌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 줬다. 워렌은 중고 골프공을 닦아서 팔고, 경마장에 버려진 2등 마권을 주워서 환전하는 등 쉬지 않고 돈을 벌었다.


두 소년의 사업 아이디어는 끝이 없었다. 중고 롤스로이스를 사서 수리한 뒤 또래 친구들에게 대여하는 일을 했고,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워렌이 모은 돈은 5천 달러나 되었다.


워렌은 돈을 안정적으로 벌고 사업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아 대학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을 다니게 됐다. 1947년, 결국 워렌은 아버지의 뜻대로 대학에 진학했다. 경영학 분야 최고의 대학인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의 학부 과정에서 공부했지만 워렌에게는 시시하게 느껴졌다.


수업에 만족할 수 없었던 워렌은 3학년 때 네브래스카 링컨 경영대학으로 편입했다. 그의 목표는 하버드 경영 대학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고 싶다던 하버드 대학원에 떨어졌다. 워렌은 하버드 대학원에 떨어진 뒤 의기소침해졌다.


그의 아버지인 하워드는 3선 의원이었지만 의회 내에선 환영받지 못했다. 당내에서 투표할 때도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워드가 가진 고집스러운 엄격함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뒤를 받쳐 주는 인맥도 없었는데 인간관계를 무시해서 의회 내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워렌은 하워드가 놓친 부분을 바로잡고 싶었다.


사람은 살면서 모두 크건 작건 좌절의 순간을 경험한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우냐다. 워렌은 하버드 대학원은 가지 못했지만, 다른 기회를 얻었다. 컬럼비아 경영 대학원은 워렌의 입학을 허가했다.


워렌은 대학원을 다니기 위해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으로 갔다. 월스트리트란 뉴욕시 맨해튼 구 남부 구역에 있는 거리, 미국의 금융 중심지로, 복잡한 금융 거래와 투자의 국제적인 상징이 되었다. 이곳에 있는 뉴욕 증권 거래소의 주가 동향이 전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워렌은 탁월한 학생이었다. 그레이엄의 강의에서 유일하게 A+를 받았다. 이론과 경험을 무장하며 워렌은 점점 더 성장하고 있었다. 친구인 스탠백과 함께 주주 총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흥미 있는 회사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몇 년 후, 워렌은 그레이엄이 회장으로 있는 "가이코"에 순자산의 75%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했다. 그 일로 나중에 50%의 이익이 났을 때 팔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워렌은 그레이엄의 투자 회사인 "그레이엄 뉴먼"에 취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워렌은 그레이엄의 회사에 취직하지 못했다.


얼마 후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나 한국 등 곳곳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워렌도 주 방위군에서 복무하기 위해 오마하로 돌아왔다. 오하마에서 워렌은 웅변 및 화술 교정 학원에 등록했다. 워렌이 웅변 강습까지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수전 톰슨에게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전은 워렌의 여동생 로버타와 기숙사 룸메이트이기도 했고,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수전은 세련되고 귀여운 여인이었다.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포용력도 있었다.


워렌은 수전을 좋아했지만, 둘 사이는 진전이 없었다. 가족끼리 친한 데다 수전의 아버지가 워렌을 좋아해 수전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도, 워렌은 좀처럼 수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수전은 워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수전이 워렌을 보기 시작한 건 워렌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결국 워렌은 수전과 결혼하게 되었다.


1952년, 미주리 강이 범람해 오마하 상류 지역을 덮치는 홍수가 발생했다. 며칠 후 결혼식이 있던 워렌은 주 방위군에 소집되지 않기 바랐다. 며칠 뒤 결혼 당일, 머피 중대장에게서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소집 명령을 듣자 실망한 워렌이었지만 몇 분 뒤 우드 장군이 머피 중대장이 내린 지시를 수정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워렌과 수전은 무사히 결혼식을 치렀다.


워렌은 여전히 투자밖에 몰랐지만 신혼 생활은 행복했다. 주식과 경제에 관해서는 천재지만, 전구 하나 갈아 끼울 줄 모르는 생활 바보인 워렌을 수전은 아낌없이 사랑해 주었다. 워렌은 오마하 대학의 사회 교육 프로그램에서 투자 강의를 하기도 했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던 수강자들은 워렌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워렌은 아버지 회사에서 주식 중개인으로도 일했다. 그 즈음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벤저민 그레이엄에게서 편지가 왔다. 첫아이 수전 앨리스 버핏이 태어난 직후였다. 그러고는 뉴욕으로 이사를 가 한 달에 임대료가 175달러인 집에 살았다. 그레이엄과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워렌은 얼마 뒤 회사의 기대주로 자리 잡을 정도로 능력을 발휘했다.


그레이엄은 돈을 미래가 불안하지 않을 정도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엄은 대공황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투자의 개념을 정립하긴 했지만 돈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결국 그레이엄은 62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그레이엄 뉴먼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워렌은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워렌이 그레이엄 뉴먼에 온 이유는 그레이엄과 함께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956년, 워렌은 고향 오마하로 돌아와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워렌이 컬럼비아 경영 대학원에 입학할 때 가지고 있던 9,800달러는 이때 약 174,000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워렌은 투자 조합 회사인 '버핏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하고, 이 회사의 첫 번째 공식 회의를 열었다. 투자자로는 장인 톰슨(25,000달러 투자), 고모 앨리스(35,00달러 투자), 대학 친구 척 피터슨(5,000달러 투자), 누나 도리스와 매형 부부(10,000달러 투자), 척의 어머니(25,000달러 투자), 어린 시절 친구 댄 모넨(5,000달러 투자)이 있었다.


워렌은 상징적으로 100달러를 투자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을 수수료를 재투자할 예정이었다. 워렌이 자신의 판단만으로 투자를 하겠다는 원칙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 하워드와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여동생 로버타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버핏 어소시에이츠는 총 자본금 105,100달러로 출발했다.


워렌 덕분에 버핏 어소시에이츠는 투자하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고, 6개월 만에 자본금이 세 배가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1965년에는 약 250배인 2,600만 달러가 되었다. 처음에는 워렌을 불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차츰 워렌에게 투자를 맡기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족과 친구 외에 다른 사람들이 워렌에게 자금을 맡기면서 워렌은 진정한 자산 운용가, 즉 투자자가 되었다.

사진=Flickr 

투자금이 점점 늘어나면서 워렌은 버핏 어소시에이츠와는 별도로 '버핏 파트너십'을 설립, 운영하게 되었다. 소득세 신고, 우편물 발송, 배당금 지금, 주식 증권 관리, 계좌 관리 등 모든 일을 워렌은 혼자 처리했다.


1959년, 워렌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한 사람인 찰스 멍거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주식 시장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며 저녁 시간을 같이 보냈다. 워렌과 멍거는 그 후 서로 꾸준히 연락을 했다. 하지만 사업상 동료이자 파트너가 되는 건 몇 년 후의 일이다.


워렌은 결혼 6년 만에 드디어 집을 사고,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 회사 규모가 혼자 집에서 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워렌은 사무실을 내고 비서를 한 명 고용했다. 그리고 1960년, 워렌 버핏의 순 자산은 100만 달러가 넘었다. 어린 시절의 장담대로 꿈을 이룬 것이다.


워렌이 관리해야 하는 자본금은 400만 달러가 넘었고, 투자 회사는 11개였으며, 워렌에게 투자를 맡긴 사람만 해도 백 명이 넘었다. 1962년 3월, 시장이 하향 곡선을 그릴 때도 워렌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워렌은 아이들이 아버지의 관심을 더 받고 싶어 한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일에 빠져 있었다. 폭넓게 사회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투자를 결정하던 워렌이 달라진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주가가 반 토막이 났다. 카드 사용 빈도가 별로 달라지지 않자, 워렌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워렌은 무모할 정도로 편중된 결정을 내렸다. 평소 신중하던 워렌이 이렇게 불안해 보였던 이유는 아버지 하워드의 병이 깊었기 때문이다. 워렌의 정신적 지주였던 하워드는 오랫동안 암 투병을 했으나 이젠 가망이 없었다.


워렌은 병상을 지키고 있는 아내와 약속했기 때문에 매일 병실에 들러 아버지를 지켜봤지만, 마지막 며칠 동안은 차마 갈 가도 없었다. 일할 때만 한없는 절망과 슬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하워드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때도 워렌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곤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며칠 만에 사무실에 출근한 워렌은 또다시 무서운 속도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주식을 사들였다. 두 달 동안 워렌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쏟아부은 돈은 무려 300만 달러 가까이 되었다.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를 잃고 워렌은 한동안 이렇게 방황했다.


워렌이 대주주가 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자회사 때문에 소송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자회사 감시관이 콩기름 거래자가 콩기름의 양을 속인 줄 모르고 은행에 보증을 했고, 감시관의 보증을 믿고 대출을 해줬던 은행들이 배상금을 요구했던 것이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경영진은 6천만 달러를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주주들은 경영진의 결정에 반발했다. 워렌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배상금에 대한 재판의 증인으로 나섰다. 워렌은 은행들의 손해를 배상하겠다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경영진을 지지했다. 워렌의 판단이 맞았다. 배상금을 지불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주가가 다시 오르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워렌의 투자들은 성공적이었지만, 워렌의 투자가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962년부터 주당 7달러 50센트에 구입하기 시작한 '버크셔 해서웨이'가 그랬다. 의류 공장인 버크셔 해서웨이는 하향길로 들어선 섬유 사업체였다. 버크셔의 사장은 2년에 한 번씩 *공개 매입 방식으로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에 워렌은 공개 매입 때 수익을 남기고 버크셔 주식을 되팔 수 있다고 판단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개 매입 방식: 경영권을 지배하기 위해 주식의 매입을 희망하는 자가 매입 기간, 수량, 가격을 공표해서 증권시장 밖에서 공개적으로 매수하는 방법을 말한다.


며칠 후, 버크셔는 주식을 공개 매입하기 시작했다. 워렌은 자신과 약속했던 가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노했다. 버크셔의 사장은 말을 바꾸고 워렌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분노한 워렌은 주식을 팔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버크셔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버크셔를 장악하려는 워렌의 의지에 친구들은 당시 시장 가격으로 워렌에게 주식을 팔았다.


워렌은 결국 버크셔 해서웨이를 인수했다. 워렌은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아다녔다. 현 버크셔 사장의 아들인 잭 스탠든은 켄 체이스에게 안내를 맡겼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하층 계급 출신에게 안내를 맡기면 어떻게 하냐"라고 책망했다.


워렌에게는 출신에 대한 뼈아픈 상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놀림받았고, 그의 할아버지가 식료품점을 운영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놀림받았다. 워렌은 없어져야 할 악습이 바로 계급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워렌은 버크셔를 잘 아는 켄 체이스를 만났다. 워렌은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1965년 5월 10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워렌은 이사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켄 체이스는 사장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애초에 버크셔 해서웨이의 섬유 사업은 큰 수익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에, 워렌은 더욱더 열심히 새 투자 대상을 찾았다.


워렌은 더욱 바빠졌고, 가정을 돌볼 시간은 더욱 줄었다. 수전은 봉사 활동을 하며 외로움을 달랬지만, 남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투기 자본이 몰리면서 주식 시장은 과열되고 있었다. 워렌의 투자 조합은 계속 수익을 내고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예측은 우울했다.


1969년, 워렌은 버핏 투자 조합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조합원들에겐 주식이나 현금, 채권을 선택하게 해서 수익을 배분하고, 버핏 투자 조합은 1956년 설립 때부터 해산할 때까지 29.5%의 복리로 수익을 올렸다. 단 한 번의 손실도 기록하지 않았던 버핏 투자 조합을 운영하면서 워렌의 재산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며, 워렌은 쉴 생각은 없었다. 워렌의 판단은 맞았다. 1973년부터 시작된 오일 쇼크로 주식 시장은 점차 침체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주가 대폭락 사태까지 일어났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회도 불안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닉슨 대통령의 공화당 행정부의 불법 활동이 폭로되어 발생한 정치 스캔들이다.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비밀 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불법적으로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체포된 사건이다.


이 시기에 워렌도 순자산의 반을 잃게 되었다. 위기는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던 워렌은 '워싱턴 포스트'의 주식을 사들였다. 투자 조합 운영의 부담에서 벗어난 워렌은 버크셔 해서웨이를 키우고 있었다. 워렌은 버크셔의 주가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미래 가치는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1976년부터 경기는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워렌과 수전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다. 수전은 워렌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란 아이들은 더 이상 수전이 돌봐줄 필요가 없었고, 워렌 역시 수전과 함께할 여유가 없었다.


1977년, 워렌이 가정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던 수전은 결국 그 기대를 포기하고 워렌의 곁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렇지만 수전은 워렌과 끝까지 이혼하지 않았다. 여행이나 가족행사에도 함께 참여했고, 버크셔 해서웨이 이사회의 이사로 주주 총회에도 나란히 참석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워렌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로 꼽는 수전과 별거를 받아들이는 동안에도 버크셔 해서웨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비슷한 위기가 몇 번 더 찾아왔지만, 냉철한 현실 분석과 과감한 투자로 워렌은 점점 더 부자가 되었다.


1979년 워렌의 순 자산은 6억 2천만 달러에 달하고, 미국 경제 주간지인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400대 부자 명단에 올랐다. 1993년에는 재산이 더욱 늘어나 워렌 버핏은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의 재산은 무려 85억 달러에 이르렀다.


버크셔의 주주들에게 한 번도 손실을 입히지 않았던 워렌의 찬란한 기록은 2001년에 깨졌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5분부터 10시 30분 사이에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 세계 무역 센터 건물과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 건물이 테러를 당했다. 납치된 항공기가 빌딩으로 돌진해 순식간에 빌딩이 무너져 버렸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한 이 사건으로 2,800~3,500여 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미국은 화폐 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주식 시장도 폭락했다. 워렌은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큰 영향을 받을 미국 경제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워렌이 부담해야 할 손실도 막대했다. 911테러로 버크셔는 약 22억 달러의 보험금을 지불할 것이었다. 보험 약관에 테러 행위에 대한 보상은 포함되어 있지만, 위험에 대한 추가금을 설정하지 않았던 게 엄청난 실수였던 것이다. 911테러 이후 일부 보험 업체들은 보험 약관에서 테러리즘 항목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주요 사업인 보험업으로 큰 손실을 입고도 새로운 자금을 융통할 필요가 없었던 유일한 보험 회사였다. 911테러 이후 워렌은 사업 쪽보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카네기의 글을 보게 되었다. '부자로 죽는다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앤드루 카네기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실업가다. 미국의 제강업계를 지배해 '철강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워렌은 아버지를 기념해 만든 '버핏 재단'을 통해 기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뒤 재산을 어떻게 쓸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워렌은 기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워렌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워 세계 컴퓨터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한 빌 게이츠를 만났다. 빌 게이츠는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순위에서 1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사람이다. 나이 차이가 25년이나 나는데도 두 사람은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91년 미국 독립 기념일 휴가 때 처음 만났다. 워렌이 워싱턴 포스트 주식을 매입하며 알게 된 캐서린 그레이엄을 만났을 때였다. 워렌에게 컴퓨터란 싫어하는 야채 정도였다. 빌과 워렌은 만나자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은 아주 잘 통했다.


그동안 워렌은 인터넷을 포함한 기술 관련 회사들은 투자 대상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빌 게이츠를 만난 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을 구매했다. 빌 게이츠도 나중에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식을 샀다. 마침내 워렌도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1996년 초, 버크셔의 자산은 41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때 당시 그의 자산만 160억 달러였다. 워렌이 재산을 이만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투자 원칙 덕분이었다. 그리고 워렌 버핏이 세운 기록을 깨는 것이 전 세계 많은 투자자들의 목표가 되었다.


워렌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b주식(BRKb, 베이비 주식)을 발행했다. 기존의 비싼 주식이 a(BRKa)주식이고, b주식은 a주식의 30분의 1 가치를 지닌 주식이었다. 1996년 5월 이후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는 5만 명이 더 늘어났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주주 총회의 개최 장소를 경기장으로 옮겨야 했고, 그날은 주주들의 축제가 되었다.


그러던 2000년 2월 29일 밤, 야후 게시판에 익명의 글이 올라왔다. '워렌 버핏 병원에 입원 위독함"이라는 글이었다. 그리고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은 갑자기 폭락했다. 그날 밤, 집에서 브리지 게임을 하고 있던 워렌은 그 소동을 전혀 몰랐다. 이틀 동안의 소동으로 버크셔의 주가는 5% 넘게 떨어졌다.


사실을 해명하는 보도 자료를 내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됐다. 사실 워렌은 자신의 사후에 대한 여러 번 입장을 밝혔었다. 워렌이 정말로 예상하지 않았던 일은 2003년에 일어났다. 워렌은 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뽑혔다. 그러므로 그의 아내와 딸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들의 정상회의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연설날 당일 수전은 조직 검사 결과 구강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수술과 방사선 치료가 계속됐다. 워렌은 수전의 소식에 충격받았다. 워렌은 매주 주말마다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수전의 곁을 지켰다. 2004년 7월 29일, 수전은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오마하에서 비공식적으로 거행된 장례식에 워렌은 차마 참석하지 못했다. 수전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게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은 뒤엔 수전이 알아서 재단을 위해 재산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던 워렌은 수전의 죽음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민하던 워렌은 당시 이미 활발하게 자선 재단을 운영하고 있던 빌 게이츠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2004년, 워렌은 이사회를 열어 수전의 죽음으로 공석인 재단 이사로 빌 게이츠를 임명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25일, 역사에 기록될 기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워렌은 자신의 전 재산 중 85%를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워렌 버핏은 총 5군데의 재단에 기부금 총 370억 달러를 나누어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사람들은 워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일부 사람들은 워렌을 본받아 기부 행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은퇴하고 완전히 재단 일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현명한 가치 투자로 투자의 살아 있는 전설, 20세기 가장 위대한 투자자로 불리는 워렌 버핏은 언제부터인가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렸다. 이제 사람들은 워렌이 기부를 발표한 그 시간을 워렌 버핏의 '최상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워렌은 투자자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자선가들의 선구자가 되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부시 대통령은 상속세 폐지와 감세 공약으로 집권에 성공해 2001년, 이를 의회에 통과시켰다. 이 법률에 의하면 상속세는 점차 감세되다가 2010년에 완전히 없어지지만, 그 상속세를 영구 폐지하자는 법안이 제기된 것이다. 버핏은 정부의 정책에도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2008년 11월, 미국은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뉴욕 타임스 칼럼에는 '버핏 효과'라는 말이 등장했다. 버핏의 민주당 옹호 주장에 공감한 백인 보수주의자들이 골프장 등에선 공화당 후보를 찍는다고 말해 놓고, 투표장에선 조용히 오바마에게 투표한 현상을 말한다.


2011년 8월,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워렌은 부자 증세를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버핏의 주장에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당황했지만,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의 부호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다른 거부들도 할리우드 스타들도 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버핏 효과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현상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는 부자 증세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버핏은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미국의 최고 훈장 '자유 메달'을 수상했다.


사진=rawpixel.com 

2007년과 2011년에 워렌은 한국을 방문했다. 절삭 공구 업체인 대구텍 공장의 준공식과 제2공장 기공식에 참석하고, 경영 전반에 대해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 이후 버크셔 해서웨이 투자 목록에는 해외 주식 비중이 늘고 있었다. 워렌은 2004년 한국의 주식 목록을 점검하고, 개인적으로 기아 등 당시 저평가된 한국주식을 구매하기도 했다.


워렌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 기업의 주가가 상승하기 때문에 그의 방한은 환영과 동시에 우려도 낳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됐는데 세계적인 갑부답지 않은 소박한 취향도 눈길을 끌었다. 90세가 넘은 지금도 워렌이 즐겨 먹는 음식은 햄버거와 콜라다. 그리고 의외로 안 먹는 음식이 많은 편식쟁이이기도 하다.


식습관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건강하긴 하지만, 워렌도 물론 아플 때는 있었다. 1972년, 워렌은 저녁을 먹다 손가락 하나가 부어오른 채 집으로 돌아왔다. 왕진을 온 의사는 워렌을 급히 응급실로 보냈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워렌은 의식을 잃었다. 병명은 페니실린 알레르기였다. 사소한 감염으로 낮에 복용한 약이 알레르기를 일으킨 것이다.


1971년에 살모넬라균에 감염됐을 때도 워렌은 무척이나 엄살을 떨었다. 또 2000년에는 장에 종양이 생겨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때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미리 언론에 발표했다. 창자를 38cm나 잘라내는 수술이었지만 워렌은 다시 열정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워렌은 늘 "자신은 운이 좋았다"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에 대해 감사할 줄도 아는 어린 할아버지였다. 워렌은 1958년에 처음으로 산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 사람들은 워렌을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세계 최고의 부자, 투자의 귀재’ 등 그러나 워렌에게는 그런 외면적인 평가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내린 내면의 평가가 더 중요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중요성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2000년부터 1년에 한 번씩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가 경매에 붙여진다. 1만 달러로 시작되는 이 경매는 해가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 2011년에는 무려 262만 달러(한화 약 30억 원)에 낙찰됐다. 수익금은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되지만, 이 일에도 비판은 있었다.


2006년, 1주당 가격이 10만 달러를 돌파한 최초의 회사로 기록된 버크셔 해서웨이는 2023년 1주당 가격이 50만 달러를 돌파했다.


‘뭉칠 수 있는 눈과 길 언덕만 있으면 된다’는 워렌 버핏의 눈덩이 굴리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워렌 버핏은 2012년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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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문무경 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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