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차시현 칼럼니스트)
[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임영진 성심당 대표는 아버지 임길순 창업주가 사망한 뒤 지독한 인력난에 시달렸다. 1974년, 당시 공장장을 포함한 제빵기술자 5명이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성심당은 당시 오너 셰프 체제가 아닌 공장장 체제였고, 임 대표 본인을 포함한 가족들은 겨우 간단한 빵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술자들은 그 부분을 약점으로 파고들었다. 가불을 요구하고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자 한순덕 창업주는 결국 그들에게 더 이상 가불을 해 줄 수 없다고 통보했고, 기술자들은 성심당을 떠나며 인력난이 시작됐다.
그렇게 결국 임영진 대표가 제빵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빠르게 기술을 습득했고 밤잠을 설치며 빵을 만들고 반죽을 연구하며 빵에 매력에 빠졌다. '기술자 없는 빵집'이 되어버린 성심당이 새롭게 변해가는 혁신의 씨앗이었다.
1980년은, 임영진 대표가 제빵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위기상황에 임 대표가 중심이 되어 본래의 성심당 모습을 되찾았다. 기술자들의 고집과 자기규율은 여전했으나 경영자와의 관계는 나름 돈독했다. 이전 임길순 창업주 때부터 정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시 성심당의 빵 종류는 단팥빵과 크림빵, 소보로와 도넛이 대부분이었고, 청소년층을 노려 크게 만든 맘모스빵은 제법 인기를 끄는 정도였다. 또한 대부분 비슷한 빵을 팔고 있었고, 제빵사들은 정해진 레시피를 웬만해선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용식 공장장이 성심당에 입사했다. 오 공장장과 임 대표는 호흡이 잘 맞았고 아이디어를 자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빵 이야기를 나눴다. 재료부터 만드는 법까지 빵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야깃거리였다.
두 사람이 매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현재 사람들이 성심당을 방문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튀김소보로가 그들의 머릿속에서 구상되기 시작했다. 임 대표는 당시 빵집들의 주메뉴인 단팥빵과 소보로, 도넛 세 가지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빵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개발을 거쳐 임 대표의 성심당만의 독특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열망과 오 공장장의 아이디어가 합쳐진 ‘튀김소보로’가 탄생했다.
임영진 대표는 튀김소보로 생산 라인을 손님이 볼 수 있도록 어두운 곳이 아닌 매장 안에 설치했다. 식중독으로 인해 먹을거리에 대한 사회의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손님들의 눈앞에서 빵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 제품에 대한 논란이 불식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튀김소보로는 첫 선을 보였고 고소한 냄새를 맡은 손님들이 하나둘씩 줄을 서기 시작했다. 줄을 서는 사람이 많아지자 줄 선 시간이 아까워 싹쓸이하는 손님도 등장했다.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고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번호표 아이디어가 나와 손님에게 번호표를 주고, 손님은 번호표에 살 개수를 적어 사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어떤 손님이 번호표를 두 개로 찢어 6개를 구매해 가는 사건도 발생해 다시 싸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튀김소보로 신드롬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선 아직 튀김소보로는 ‘미완성’이라고 말한다. 본래 계획은 초콜릿까지 묻혀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처 식기도 전에 다 팔려나가 완성될 틈이 없다. '미완성'인 튀김소보로가 성심당 자체이자 전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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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사진=차시현 칼럼니스트)
[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임영진 성심당 대표는 아버지 임길순 창업주가 사망한 뒤 지독한 인력난에 시달렸다. 1974년, 당시 공장장을 포함한 제빵기술자 5명이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성심당은 당시 오너 셰프 체제가 아닌 공장장 체제였고, 임 대표 본인을 포함한 가족들은 겨우 간단한 빵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술자들은 그 부분을 약점으로 파고들었다. 가불을 요구하고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자 한순덕 창업주는 결국 그들에게 더 이상 가불을 해 줄 수 없다고 통보했고, 기술자들은 성심당을 떠나며 인력난이 시작됐다.
그렇게 결국 임영진 대표가 제빵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빠르게 기술을 습득했고 밤잠을 설치며 빵을 만들고 반죽을 연구하며 빵에 매력에 빠졌다. '기술자 없는 빵집'이 되어버린 성심당이 새롭게 변해가는 혁신의 씨앗이었다.
1980년은, 임영진 대표가 제빵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위기상황에 임 대표가 중심이 되어 본래의 성심당 모습을 되찾았다. 기술자들의 고집과 자기규율은 여전했으나 경영자와의 관계는 나름 돈독했다. 이전 임길순 창업주 때부터 정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시 성심당의 빵 종류는 단팥빵과 크림빵, 소보로와 도넛이 대부분이었고, 청소년층을 노려 크게 만든 맘모스빵은 제법 인기를 끄는 정도였다. 또한 대부분 비슷한 빵을 팔고 있었고, 제빵사들은 정해진 레시피를 웬만해선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용식 공장장이 성심당에 입사했다. 오 공장장과 임 대표는 호흡이 잘 맞았고 아이디어를 자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빵 이야기를 나눴다. 재료부터 만드는 법까지 빵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야깃거리였다.
두 사람이 매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현재 사람들이 성심당을 방문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튀김소보로가 그들의 머릿속에서 구상되기 시작했다. 임 대표는 당시 빵집들의 주메뉴인 단팥빵과 소보로, 도넛 세 가지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빵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개발을 거쳐 임 대표의 성심당만의 독특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열망과 오 공장장의 아이디어가 합쳐진 ‘튀김소보로’가 탄생했다.
임영진 대표는 튀김소보로 생산 라인을 손님이 볼 수 있도록 어두운 곳이 아닌 매장 안에 설치했다. 식중독으로 인해 먹을거리에 대한 사회의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손님들의 눈앞에서 빵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 제품에 대한 논란이 불식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튀김소보로는 첫 선을 보였고 고소한 냄새를 맡은 손님들이 하나둘씩 줄을 서기 시작했다. 줄을 서는 사람이 많아지자 줄 선 시간이 아까워 싹쓸이하는 손님도 등장했다.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고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번호표 아이디어가 나와 손님에게 번호표를 주고, 손님은 번호표에 살 개수를 적어 사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어떤 손님이 번호표를 두 개로 찢어 6개를 구매해 가는 사건도 발생해 다시 싸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튀김소보로 신드롬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선 아직 튀김소보로는 ‘미완성’이라고 말한다. 본래 계획은 초콜릿까지 묻혀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처 식기도 전에 다 팔려나가 완성될 틈이 없다. '미완성'인 튀김소보로가 성심당 자체이자 전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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