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밸류체인타임스=오희초 기자] 서로 더 달라지고 멀어진다 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양극화는 최근 사회 현상에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경제의 급변과 산업 고용구조의 취약성 그리고 정책적 미흡한 대응이 만들어낸 사회 양극화는 비단 사회문제를 넘어 윤리와 인권의 문제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양극화의 그래프는 휘어질 대로 휘어졌고, 그 악순환은 다음 세대에 대물림 되고 있다. 부의격차는 개인의 노력 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성공의 열망을 희미하게 만들고, 이와 같은 현상은 절망계급들의 사회적 좌절감을 고조시킨다. 사회적 양극화의 또 다른 문제점은 우리 공동체의 기본질서 자체에 대한 회의와 의심도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최근, 이러한 사회문제를 극단적인 소재로 그려낸 영화가 있다.
더 퍼지(The Purge)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하다/ 몰아내다/ 제거하다’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영화에서 말하는 제거의 대상은 빈민-열등 계층이다.
미국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2013년에 첫 선을 보인 뒤 시리즈 물로 제작되어 2014년, 2016년, 2018년 그리고 곧 다가올 2021년에도 새로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인기몰이 작품이다.
실제로 사회 양극화가 불거질 때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래프의 모양은 알파벳U자를 연상케 한다.
빈익빈 부익부, 돈이 돈을 낳고 가난은 가난을 낳아 악순환이 지속된다. 누구도 쉽사리 그 굴레를 깨뜨릴 수 도 벗어날 수 도 없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조직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빈곤한 자들에게 해마다 많은 예산을 계획하고 사용한다. 사회적 간격이 비대해지며 그 예산은 해마다 늘어나고 재정의 범위 또한 넓어지고 깊어져 가고있다.
사회의 골칫거리라고도 불리는 범죄와 강력범의 사례들은 왜인지 부유한 계층이 아닌 빈곤한 계층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여러 방면에서, 사회 속 빈곤한 계층이 결코 정부와 국가에게 마냥 달가운 이미지는 아니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비교적 부유한계층은 국가의 자산과 국력을 충당하는 일등공신들이며, 나라의 막중한 책임의 몫을 감당하고 있는 의로운 이들처럼 보인다.
이런 사회적 구조가 악으로 치달았을 때의 미래를 그린 영화 ‘더 퍼지’는 미국의 고용∙소득 격차 분배도가 한껏 U자로 구부러졌을 때,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퍼지 데이’ 정책이다.
이 영화 속 미국은 범죄율 0%에 상당한 국가 자산을 비축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이 퍼지 정책 덕분이었다.
일년에 단 12시간, 그 반나절 동안은 어떠한 범죄와 살인도 묵인되는 범죄의 날을 만든 것이다.
깊은 밤 사이, 거리의 노숙자와 집이 없는 자들은 살인에 목마른 자들의 희생양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의 손실 거리가 되는 자들이나 이름없는 자들이 끌려 나와 죽임을 당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이 누구인지 왜 인지 묻지 않은 채 다음 날을 받아들인다.
범죄자들은 합법적인 살인의 날만을 기다렸다 한을 풀고, 또 같은 범죄자들끼리 한데 모여 서로 죽고 죽이니. 과연 이 제도의 이름이 왜 Pudge인지 감이 잡힌다. 퍼지의 또 다른 의미는 ‘정화’이다.
사실 사회적 문제를 이리 손쉽게 해결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실용적인 해결방안이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되는 부분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돈과 더 나은 정책이 아닌 국민과 사람 때문이다.
사람을 위한 영토와 법의 의미가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며 더 나은 의미를 가진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상실한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
마치 두통의 문제가 너무 커서 머리를 없애버리는 격의 비상식적 이야기가 아닌가!
이 막장처럼 느껴지는 하나의 소재가 해를 거듭하며 더 업그레이드된 막장이 될 수 있음을 시리즈로 보면, 악(惡)에는 정말이지안착할 바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더 퍼지 시리즈 중 2014년에 개봉한 ‘더 퍼지: 거리의 반란’편은 유난히 더 각성적이다.
퍼지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몇몇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가히 우아함 그 자체였다.
값비싼 드레스와 수트를 입은 관중들은 오늘 퍼지 엔터테인먼트의 사냥감으로 나온 자들을 경매로 사며 즐거워한다. 그 모습이그렇게 우아할 수 가 없다.
경매로 낙찰된 사냥감을 가둬 논 방에 고급 무기를 들고 모인 그들은 사냥에 앞서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한다.
“미국을 정화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신 새로운 미국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미국의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서 국비를 충당하고 손수 처리하는 그들은 정의롭고 부유하며 우아한 가장 멋진 인간형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사냥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만 빼면.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처단하는게 정의라고 일컬어지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한 가지만 뒤집으면 된다. 사람에 대한 본 가치가 무너졌을 때, 생명을 해칠 권한을 부여 받는 한 줄의 법 제정이 쓰여진다.
영화 속 시민들 또한 저조한 범죄율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위협에 내몰며 오직 국가만을 위한 법에 놀라울 정도로 협조한다. 일을벌이는 자들도 당하는 자들도 이미 우선순위가 뒤집힌 듯하다.
그 누가 감히 사람 죽이는 것을 들어 정화함 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표현한 모멸감을 기억해야 한다. 2014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미국의 훗날을 상상하며 그려냈지만, 그 년도는 겨우2023년이었다.
저녁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된 퍼지 데이는 날이 밝아오는 아침, 마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종료된다. 나는 영화 속 퍼지를마치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같은 장소와 상황에 서 있으나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도래한 듯한 느낌. 그리고 지금부터 나를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나는 법의 이름아래 보호된다는 기분.
사실 법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을 보호하고 지키는 수단으로, 법의 테두리 안에선 안전이 보장되어 안도할 수 있는 것.
국가의 존재 목적도, 법의 의의도 사람과 생명을 위한 것이다. 재산이나 명성의 정도는 사람의 가치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성 자체에 그 가치를 가진다. 반사회적 성향의 사람이나 국가에 재정적 손해가 되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교정과 보살핌의 대상이지 희생의 대상이 될 순 없다.
우리는 사회의 양극화가 심각의 궤도를 걷고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는 때 일수록 우선되는 가치 바로잡기에 유념해야한다. 해를거듭할수록 젊은 세대의 삶의 형태가 효율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찾아 변화하고 있다. 효율적인것은 능률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정확한 우선순위가 빠진 효율은 가치가 배제된 방법론의 난무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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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오희초 기자]
[밸류체인타임스=오희초 기자] 서로 더 달라지고 멀어진다 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양극화는 최근 사회 현상에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경제의 급변과 산업 고용구조의 취약성 그리고 정책적 미흡한 대응이 만들어낸 사회 양극화는 비단 사회문제를 넘어 윤리와 인권의 문제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양극화의 그래프는 휘어질 대로 휘어졌고, 그 악순환은 다음 세대에 대물림 되고 있다. 부의격차는 개인의 노력 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성공의 열망을 희미하게 만들고, 이와 같은 현상은 절망계급들의 사회적 좌절감을 고조시킨다. 사회적 양극화의 또 다른 문제점은 우리 공동체의 기본질서 자체에 대한 회의와 의심도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최근, 이러한 사회문제를 극단적인 소재로 그려낸 영화가 있다.
더 퍼지(The Purge)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하다/ 몰아내다/ 제거하다’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영화에서 말하는 제거의 대상은 빈민-열등 계층이다.
미국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2013년에 첫 선을 보인 뒤 시리즈 물로 제작되어 2014년, 2016년, 2018년 그리고 곧 다가올 2021년에도 새로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인기몰이 작품이다.
실제로 사회 양극화가 불거질 때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래프의 모양은 알파벳U자를 연상케 한다.
빈익빈 부익부, 돈이 돈을 낳고 가난은 가난을 낳아 악순환이 지속된다. 누구도 쉽사리 그 굴레를 깨뜨릴 수 도 벗어날 수 도 없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조직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빈곤한 자들에게 해마다 많은 예산을 계획하고 사용한다. 사회적 간격이 비대해지며 그 예산은 해마다 늘어나고 재정의 범위 또한 넓어지고 깊어져 가고있다.
사회의 골칫거리라고도 불리는 범죄와 강력범의 사례들은 왜인지 부유한 계층이 아닌 빈곤한 계층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여러 방면에서, 사회 속 빈곤한 계층이 결코 정부와 국가에게 마냥 달가운 이미지는 아니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비교적 부유한계층은 국가의 자산과 국력을 충당하는 일등공신들이며, 나라의 막중한 책임의 몫을 감당하고 있는 의로운 이들처럼 보인다.
이런 사회적 구조가 악으로 치달았을 때의 미래를 그린 영화 ‘더 퍼지’는 미국의 고용∙소득 격차 분배도가 한껏 U자로 구부러졌을 때,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퍼지 데이’ 정책이다.
이 영화 속 미국은 범죄율 0%에 상당한 국가 자산을 비축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이 퍼지 정책 덕분이었다.
일년에 단 12시간, 그 반나절 동안은 어떠한 범죄와 살인도 묵인되는 범죄의 날을 만든 것이다.
깊은 밤 사이, 거리의 노숙자와 집이 없는 자들은 살인에 목마른 자들의 희생양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의 손실 거리가 되는 자들이나 이름없는 자들이 끌려 나와 죽임을 당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이 누구인지 왜 인지 묻지 않은 채 다음 날을 받아들인다.
범죄자들은 합법적인 살인의 날만을 기다렸다 한을 풀고, 또 같은 범죄자들끼리 한데 모여 서로 죽고 죽이니. 과연 이 제도의 이름이 왜 Pudge인지 감이 잡힌다. 퍼지의 또 다른 의미는 ‘정화’이다.
사실 사회적 문제를 이리 손쉽게 해결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실용적인 해결방안이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되는 부분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돈과 더 나은 정책이 아닌 국민과 사람 때문이다.
사람을 위한 영토와 법의 의미가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며 더 나은 의미를 가진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상실한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
마치 두통의 문제가 너무 커서 머리를 없애버리는 격의 비상식적 이야기가 아닌가!
이 막장처럼 느껴지는 하나의 소재가 해를 거듭하며 더 업그레이드된 막장이 될 수 있음을 시리즈로 보면, 악(惡)에는 정말이지안착할 바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더 퍼지 시리즈 중 2014년에 개봉한 ‘더 퍼지: 거리의 반란’편은 유난히 더 각성적이다.
퍼지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몇몇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가히 우아함 그 자체였다.
값비싼 드레스와 수트를 입은 관중들은 오늘 퍼지 엔터테인먼트의 사냥감으로 나온 자들을 경매로 사며 즐거워한다. 그 모습이그렇게 우아할 수 가 없다.
경매로 낙찰된 사냥감을 가둬 논 방에 고급 무기를 들고 모인 그들은 사냥에 앞서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한다.
“미국을 정화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신 새로운 미국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미국의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서 국비를 충당하고 손수 처리하는 그들은 정의롭고 부유하며 우아한 가장 멋진 인간형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사냥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만 빼면.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처단하는게 정의라고 일컬어지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한 가지만 뒤집으면 된다. 사람에 대한 본 가치가 무너졌을 때, 생명을 해칠 권한을 부여 받는 한 줄의 법 제정이 쓰여진다.
영화 속 시민들 또한 저조한 범죄율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위협에 내몰며 오직 국가만을 위한 법에 놀라울 정도로 협조한다. 일을벌이는 자들도 당하는 자들도 이미 우선순위가 뒤집힌 듯하다.
그 누가 감히 사람 죽이는 것을 들어 정화함 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표현한 모멸감을 기억해야 한다. 2014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미국의 훗날을 상상하며 그려냈지만, 그 년도는 겨우2023년이었다.
저녁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된 퍼지 데이는 날이 밝아오는 아침, 마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종료된다. 나는 영화 속 퍼지를마치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같은 장소와 상황에 서 있으나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도래한 듯한 느낌. 그리고 지금부터 나를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나는 법의 이름아래 보호된다는 기분.
사실 법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을 보호하고 지키는 수단으로, 법의 테두리 안에선 안전이 보장되어 안도할 수 있는 것.
국가의 존재 목적도, 법의 의의도 사람과 생명을 위한 것이다. 재산이나 명성의 정도는 사람의 가치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성 자체에 그 가치를 가진다. 반사회적 성향의 사람이나 국가에 재정적 손해가 되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교정과 보살핌의 대상이지 희생의 대상이 될 순 없다.
우리는 사회의 양극화가 심각의 궤도를 걷고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는 때 일수록 우선되는 가치 바로잡기에 유념해야한다. 해를거듭할수록 젊은 세대의 삶의 형태가 효율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찾아 변화하고 있다. 효율적인것은 능률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정확한 우선순위가 빠진 효율은 가치가 배제된 방법론의 난무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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