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김혜선기자] 우리의 삶은 먹는 것으로 동력을 얻는다. 먹은 것을 에너지원으로 꾸려간 자취는 나의 삶이다. 조르바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세 부류가 있으며 누군가는 먹은 음식으로 뱃살과 똥만 만들고, 누군가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누군가는 하나님께 돌린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중에서]
조르바는 두목(책 속의 주인공)에게 이야기한다. 두목은 나름대로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잘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 이유는 까마귀가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며 걸음걸이를 흉내 낸 것처럼 두목도 자신의 걸음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까마귀가 비둘기의 걸음으로 걸으면 어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의 삶도 까마귀와 같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걸음걸이를 버리고 세상의 트렌드에 맞춰 살았다면 ‘해야만 하는’ 삶을 산 것이다. ‘해야만 하는’ 삶에는 주체적인 생각이 없고 내면의 자유를 사장시킨 채 남들의 방식을 따른다. 정신없이 살다가 ‘이게 아닌데.’ 하며 잠시 멈춰 생각하게 되는 순간은 한참의 시간 후다.
‘거대한 용은 ‘너는 해야 한다’라고 불린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려 한다’라고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2쪽]
‘너는 해야 한다'는 삶은 까마귀가 비둘기의 걸음걸이를 취한 삶이다. 반면 '나는 하려 한다'는 삶은 까마귀 자신의 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내딛는 삶이다. 자신의 걸음으로 가는 삶에는 자유가 있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기에 당당함과 자유가 있다. 발걸음에는 춤추는 것과 같은 생동감이 있다. 우리 주변에도 일하는 모습 자체로 율동감과 생동감이 흘러넘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눈동자는 빛나고 에너지는 출렁인다.

[사진출처 unsplash]
무기력하게 시간만 메꾸는 날들은 죽은 날이다. 나의 춤으로 나의 날을 채워야 한다. 아이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모든 것들이 호기심이며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서 발산되는 생기는 공기 중에 떠오른다. 생동감은 에너지인 까닭에 반드시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오늘 그대와 같이 일하는 이들은 그대에게서 생동감을 느끼는가?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은 포도주가 되고 여자가 되고 노래가 되어 인부들을 취하게 했다. 그의 손에서 대지는 생명을 되찾았고 돌과 석탄과 나무와 인부들은 그의 리듬으로 빨려 들어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262쪽]
광산의 갱도에서 인부를 지휘하며 일하는 조르바의 모습은 두목을 전율시킨다. ‘내가 찾던 광맥은 바로 이 모습이야! 더 이상 필요한 건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자신의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속도대로 자유롭게 일하는 이들에게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생동감과 율동감의 파장은 같이 일하는 이들뿐 아니라 바라보는 이들에게까지 전달된다. 일터에서 혹은 삶의 자리에서 율동감 있게 춤추듯 살아가고 있는가?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요즘,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며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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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김혜선기자]
[밸류체인타임스=김혜선기자] 우리의 삶은 먹는 것으로 동력을 얻는다. 먹은 것을 에너지원으로 꾸려간 자취는 나의 삶이다. 조르바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세 부류가 있으며 누군가는 먹은 음식으로 뱃살과 똥만 만들고, 누군가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누군가는 하나님께 돌린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중에서]
조르바는 두목(책 속의 주인공)에게 이야기한다. 두목은 나름대로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잘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 이유는 까마귀가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며 걸음걸이를 흉내 낸 것처럼 두목도 자신의 걸음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까마귀가 비둘기의 걸음으로 걸으면 어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의 삶도 까마귀와 같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걸음걸이를 버리고 세상의 트렌드에 맞춰 살았다면 ‘해야만 하는’ 삶을 산 것이다. ‘해야만 하는’ 삶에는 주체적인 생각이 없고 내면의 자유를 사장시킨 채 남들의 방식을 따른다. 정신없이 살다가 ‘이게 아닌데.’ 하며 잠시 멈춰 생각하게 되는 순간은 한참의 시간 후다.
‘거대한 용은 ‘너는 해야 한다’라고 불린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려 한다’라고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2쪽]
‘너는 해야 한다'는 삶은 까마귀가 비둘기의 걸음걸이를 취한 삶이다. 반면 '나는 하려 한다'는 삶은 까마귀 자신의 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내딛는 삶이다. 자신의 걸음으로 가는 삶에는 자유가 있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기에 당당함과 자유가 있다. 발걸음에는 춤추는 것과 같은 생동감이 있다. 우리 주변에도 일하는 모습 자체로 율동감과 생동감이 흘러넘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눈동자는 빛나고 에너지는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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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하게 시간만 메꾸는 날들은 죽은 날이다. 나의 춤으로 나의 날을 채워야 한다. 아이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모든 것들이 호기심이며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서 발산되는 생기는 공기 중에 떠오른다. 생동감은 에너지인 까닭에 반드시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오늘 그대와 같이 일하는 이들은 그대에게서 생동감을 느끼는가?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은 포도주가 되고 여자가 되고 노래가 되어 인부들을 취하게 했다. 그의 손에서 대지는 생명을 되찾았고 돌과 석탄과 나무와 인부들은 그의 리듬으로 빨려 들어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262쪽]
광산의 갱도에서 인부를 지휘하며 일하는 조르바의 모습은 두목을 전율시킨다. ‘내가 찾던 광맥은 바로 이 모습이야! 더 이상 필요한 건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자신의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속도대로 자유롭게 일하는 이들에게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생동감과 율동감의 파장은 같이 일하는 이들뿐 아니라 바라보는 이들에게까지 전달된다. 일터에서 혹은 삶의 자리에서 율동감 있게 춤추듯 살아가고 있는가?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요즘,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며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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