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 후기의 정치와 개혁역사 | 밸류체인타임스

국세연 칼럼니스트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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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unsplash]


[밸류체인타임스 = 국세연 칼럼니스트] 조선 후기, 19세기의 한반도는 세도 정치로 인해 문란한 정치가 지속되었다. 어린 나이의 고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나라 밖과 안을 한 번에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올바른 정치를 위해 세도 가문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잡고 있던 비변사를 폐지하여 의정부와 삼군부가 정치와 군사 업무를 분담해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흥선대원군은 외부 침략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등하여 국내에 급격히 늘어난 천주교인들을 막고자 천주교를 금지했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신자와 천주교를 설파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살해하는 병인박해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프랑스 귀에도 들어가며 8달 후인 9월에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되었다.


그 이후 독일 상인 중 한 명이 조선과의 통상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무덤을 도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다행히 이 사건을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선은 외국과의 교역에 더욱 예민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미양요 사건까지 겹쳐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를 강경히 발표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 체제는 조선 내부에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고종이 직접적인 정치를 시작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달리 개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의 아내인 명성황후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고종은 통상 수교 정책을 완화하고 개화 정책을 시작했으며,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적극적인 개항을 준비했다.


하지만 1882년 구식 군인과 도시 하층민의 불만으로 인해 임오군란이 발생했을 대, 고종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수습했다. 이 사건의 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돌려 청나라로 납치하게 하여 재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고종은 다른 나라와의 수교를 위해 청나라에는 ‘영선사’, 미국에는 ‘보빙사’, 일본에는 ‘수신사’를 파견하며 조선의 개화를 시도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적극적으로 조선 내부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간섭을 막기 위해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1895년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고종은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겠다”라는 대국을 선포했다. 고종은 다른 나라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거센 입장을 표명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해 35년 동안 강점당하는 지옥의 길로 들어선다.


흥선대원군과 고종, 그리고 명성황후는 각자 자신의 이념대로 나라를 개혁하려 노력했다. 신문물에 반대하기도 했고, 개혁을 주장하기도 헀다. 현대에서는 그들의 사건을 역사책으로 접할 뿐이다. 흥선대원군의 반외세적인 성향을, 고종과 명성황후와 같은 개방적인 성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성장을 이루고 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았을지는 각자의 생각에 달려있다. 그들의 행적을 이해하고 나라를 위해 투신한 깊은 마음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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