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화 이글스)
[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정민철은 1992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동기들이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이었기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구속도 138km가 최고 구속이었기에 더욱 관심받지 못했다.
그렇게 시즌이 시작되었고, 정민철은 뜬금없이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된다. 1차 지명인 지연규가 스프링캠프에서 과도하게 구위를 끌어올린 탓에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LG와의 개막 2연전에서 만루홈런을 맞기도 했으나 불펜 투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해태전에서의 호투를 바탕으로 선발진에 합류하게 된다.
정민철은 데뷔 시즌 평균자책점 2.48, 195 3/2이닝, 14승 7패 7세이브 11완투로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으며 자신을 증명했으나 이 기록은 염종석의 기록에 묻히고 만다.
1993년에는 병역 문제로 인해 1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10경기를 완투, 13승을 기록해 승률 1위를 차지했다.
94년에는 2.15의 평균자책점, 196탈삼진, 218이닝을 소화하며 탁월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이 성적으로 10패를 기록하며 투수 골든글러브를 정명원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정명원은 마무리 투수였기 때문에 지금 시대와는 다른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95년에는 방어율 3.21, 13승을 기록했다.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당시 부상 중으로 162이닝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에서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했고, 3차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를 펼쳤고 이후 5차전에서 구원 등판해 2.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96년에는 방어율 3.03과 13승을 기록했으나 12패를 하며 탈삼진 1위마저도 기록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97년에도 데자뷔처럼 208이닝 출전 2.46 평균자책점 14승 11패를 기록했고, 타이틀마저도 탈삼진 1위만 기록하며 4년 동안 투수 골든글러브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98년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 연봉이 동결되었고, 99년에는 프로 데뷔 이후 최초로 18승을 기록하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으나 구위가 점차 떨어지며 혹사로 인한 기량 저하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민철은 FA로 일본 진출을 선언했고, 가장 먼저 정민철 영입에 나선 팀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고, MLB의 몇몇 팀들 또한 관심을 보이며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결국 정민철은 MLB 대신 요미우리와 계약금 1억 엔에 계약하며 일본 무대로 진출했다.
시즌이 시작된 후, 그는 주로 2군 경기에만 출전하다가 5월 중순이 되어서야 1군 첫 출전 기회를 잡았다. 첫 경기에서 인상적인 호투를 펼쳐 1군 잔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팀의 로테이션 문제로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한 달 뒤 1군으로 복귀했으나 두 경기에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고,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다음 시즌에도 부진이 이어지며 성적은 점점 하락했고, 결국 2년 만에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게 된다.
한화는 정민철 영입을 위해 당시 최고 수준인 4억 원의 계약금을 제시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된 후 정민철은 점차 부진했다. 구위는 여전했으나 요미우리에서의 불안정한 상황 탓에 몸 상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많은 경기에서 패배하며 주로 2군 경기에 출전해야 했다.
다음 시즌에는 기복이 심했지만 비교적 안정된 경기력을 보여 연봉 인상과 함께 수술도 받으며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2004년에는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이로 인해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김인식 감독의 격려에 힘입어 마음을 다잡고 재기를 위해 훈련에 매진했다.
2005년, 연봉이 1억 원 삭감된 채 시즌을 시작한 정민철은 투구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이전에는 구속에 의존했다면, 이제는 제구력을 앞세운 투수로 변신을 꾀했다. 또한 프로 데뷔 이후 사용했던 등번호 55번을 후배에게 넘기고 23번으로 변경했다.
6월 말까지 방어율 3점대와 7승을 기록하며 ‘에이스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6월 29일 팔꿈치 통증으로 교체된 이후 성적이 하락했다. 이 통증이 인대 파열로 이어지며 그의 선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기량이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던 정민철은 결국 2009년 시즌 후반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9월 은퇴식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며, 은퇴의 주된 원인으로는 2005년의 인대 파열 부상과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에이징 커브)가 꼽혔다. 은퇴 후 한화 이글스는 정민철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저작권자 © 밸류체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사진=한화 이글스)
[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정민철은 1992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동기들이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이었기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구속도 138km가 최고 구속이었기에 더욱 관심받지 못했다.
그렇게 시즌이 시작되었고, 정민철은 뜬금없이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된다. 1차 지명인 지연규가 스프링캠프에서 과도하게 구위를 끌어올린 탓에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LG와의 개막 2연전에서 만루홈런을 맞기도 했으나 불펜 투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해태전에서의 호투를 바탕으로 선발진에 합류하게 된다.
정민철은 데뷔 시즌 평균자책점 2.48, 195 3/2이닝, 14승 7패 7세이브 11완투로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으며 자신을 증명했으나 이 기록은 염종석의 기록에 묻히고 만다.
1993년에는 병역 문제로 인해 1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10경기를 완투, 13승을 기록해 승률 1위를 차지했다.
94년에는 2.15의 평균자책점, 196탈삼진, 218이닝을 소화하며 탁월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이 성적으로 10패를 기록하며 투수 골든글러브를 정명원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정명원은 마무리 투수였기 때문에 지금 시대와는 다른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95년에는 방어율 3.21, 13승을 기록했다.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당시 부상 중으로 162이닝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에서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했고, 3차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를 펼쳤고 이후 5차전에서 구원 등판해 2.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96년에는 방어율 3.03과 13승을 기록했으나 12패를 하며 탈삼진 1위마저도 기록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97년에도 데자뷔처럼 208이닝 출전 2.46 평균자책점 14승 11패를 기록했고, 타이틀마저도 탈삼진 1위만 기록하며 4년 동안 투수 골든글러브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98년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 연봉이 동결되었고, 99년에는 프로 데뷔 이후 최초로 18승을 기록하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으나 구위가 점차 떨어지며 혹사로 인한 기량 저하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민철은 FA로 일본 진출을 선언했고, 가장 먼저 정민철 영입에 나선 팀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고, MLB의 몇몇 팀들 또한 관심을 보이며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결국 정민철은 MLB 대신 요미우리와 계약금 1억 엔에 계약하며 일본 무대로 진출했다.
시즌이 시작된 후, 그는 주로 2군 경기에만 출전하다가 5월 중순이 되어서야 1군 첫 출전 기회를 잡았다. 첫 경기에서 인상적인 호투를 펼쳐 1군 잔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팀의 로테이션 문제로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한 달 뒤 1군으로 복귀했으나 두 경기에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고,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다음 시즌에도 부진이 이어지며 성적은 점점 하락했고, 결국 2년 만에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게 된다.
한화는 정민철 영입을 위해 당시 최고 수준인 4억 원의 계약금을 제시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된 후 정민철은 점차 부진했다. 구위는 여전했으나 요미우리에서의 불안정한 상황 탓에 몸 상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많은 경기에서 패배하며 주로 2군 경기에 출전해야 했다.
다음 시즌에는 기복이 심했지만 비교적 안정된 경기력을 보여 연봉 인상과 함께 수술도 받으며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2004년에는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이로 인해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김인식 감독의 격려에 힘입어 마음을 다잡고 재기를 위해 훈련에 매진했다.
2005년, 연봉이 1억 원 삭감된 채 시즌을 시작한 정민철은 투구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이전에는 구속에 의존했다면, 이제는 제구력을 앞세운 투수로 변신을 꾀했다. 또한 프로 데뷔 이후 사용했던 등번호 55번을 후배에게 넘기고 23번으로 변경했다.
6월 말까지 방어율 3점대와 7승을 기록하며 ‘에이스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6월 29일 팔꿈치 통증으로 교체된 이후 성적이 하락했다. 이 통증이 인대 파열로 이어지며 그의 선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기량이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던 정민철은 결국 2009년 시즌 후반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9월 은퇴식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며, 은퇴의 주된 원인으로는 2005년의 인대 파열 부상과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에이징 커브)가 꼽혔다. 은퇴 후 한화 이글스는 정민철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저작권자 © 밸류체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