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Flickr]
[밸류체인타임스=강성찬 칼럼니스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어엿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정, 어머니는 초계 변씨로 그의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친구들과 전쟁 놀이 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느 때와 달리 전쟁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리에서 친구들과 전쟁 놀이를 하다가 지나가는 하인과 대감의 길을 이순신이 막아섰다. 이순신은 놀이에 빠져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는 전쟁 중이니 다른 곳으로 돌아가라.” 장난으로 여긴 대감과 하인은 이순신을 혼내주려고 했다. 이순신은 당황하지 않고 목검을 들어 공격 자세를 취했다.
옆에 있던 이순신보다 3살 많은 유성룡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순신 대신 대감에게 사죄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제 친구는 이 나라를 지킬 훌륭한 장군이 될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려는 충성심을 어여삐 여기시어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라고 말한다.
대감은 이순신에게 “임금님께서 그 길로 지나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장군이 되면 “임금님께서 전쟁터를 지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거침 없이 대답했다. 대감은 이순신에 대답에 놀라며 하인들에게 다른 길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1565년, 이순신은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에서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를 준비했다. 7년 후 1572년, 이순신이 28세였던 해에 준비하던 훈련원 별과를 치렀고, 시험을 보던 도중 말에서 떨어졌다.
이순신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기절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옆에 있던 버드나무까지 가서 껍질을 벗기고 다리에 묶어 다시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말을 올라타고 달렸다. 마지막까지 노력을 보인 이순신이었지만 시험에서 낙방을 하게 된다.
4년 뒤 1576년 나이 32세가 되던 해 그는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 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섰으며 1576년 12월에 동구비보권관을 거쳤다.
1580년 7월, 이순신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인 발포의 발포순군만호에 재직하고 있었다. 성박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이순신에게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우리나라의 재산인 오동나무를 벨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후 성박은 이순신을 부정적인 시선을 보게 되었다.
[출처:Flickr]
후임이었던 이용은 발포, 여도, 사도, 녹도에서 이탈자를 보고하지 않고 지휘하는 포구 3명만 보고하여 이용은 그에게서 장계를 회수했고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다. 하지만 오동나무 이야기를 들은 이용은 이순신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고,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했다.
그 후 1587년, 이순신이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게 된다. 이순신은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모아 녹둔도로 향한다. 사람들이 추수를 할 때 여진족이 논밭에 화살과 병기류 등을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하여 침입하기 시작한다. 이때 녹둔도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 이후 열다섯 필의 말들이 약탈 당하고, 그 일로 도망치는 와중에서 이순신과 이경록이 남아서 싸워 승리하게 된다. 이때 조선인 백성 60명을 구출한다. 기습과 침략이 계속되어 방어를 강화하고 반격하여 무찌르는 것을 반복하며 이순신은 추가 병력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 당해 패전 당했다.
1592년 5월 23일, 선조가 조선을 다스리던 시기에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함대 700척을 이끌고 부산포를 참략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와 동일하다. 일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순신은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내 병력 700여 명을 소집했다.
하지만 전쟁을 하는 것이 두려운 황옥현은 도주를 시도하다가 이순신의 칼에 참격을 맞았다. 6월 8일 일본함대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이순신은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고 징계를 썼다. 부산포에 침략했으며 이 이후 선조는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했다.
1592년 6월 16일, 옥포해전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군대를 이끌고 옥포를 침략한 일본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26척을 모두 침몰시켰으며, 포로를 모두 풀어주었다. 이순신이 일본을 상대로 한 전투의 첫 승리였다.
또 다시 일본은 옥포를 빼앗기 위해 공격했다. 적진포에서 일본의 13척을 침몰시켰지만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육지로 도망간 일본군을 쫓지 못했다. 이때 조선은 한양에서 싸우다가 평안도로 후퇴했다. 이후 김명원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고,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황해도를 넘겨주고 말았다.
1592년 7월 8일,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라우수영군의 병력이 합류해야 했지만 늦어지는 바람에, 이순신은 배의 방향을 틀어 노량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경상우수영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두 군이 함께 싸우며 전쟁에 흐름을 조선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일본군의 배 13척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일본군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군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 공격을 시도했으며, 일본군의 무기인 화포에 비해 성능이 우수한 지자총통을 활용하여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이 후퇴하더라도 이순신의 함대는 끝까지 쫓아가 추격을 계속했다.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한산도 대첩이다. 일본군이 전투를 하려고 진격하자 이순신은 학인직을 펼쳤고 일본군이 타고 있는 적선에 폭격을 쏟아냈다.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로 지속적인 폭격을 맞았다.
또한, 거북선을 타고 일본군들에게 포탄을 발사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군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출처: 궁금해요, 이순신: 거북선으로 나라 지킨 조선의 명장(안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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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강성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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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강성찬 칼럼니스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어엿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정, 어머니는 초계 변씨로 그의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친구들과 전쟁 놀이 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느 때와 달리 전쟁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리에서 친구들과 전쟁 놀이를 하다가 지나가는 하인과 대감의 길을 이순신이 막아섰다. 이순신은 놀이에 빠져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는 전쟁 중이니 다른 곳으로 돌아가라.” 장난으로 여긴 대감과 하인은 이순신을 혼내주려고 했다. 이순신은 당황하지 않고 목검을 들어 공격 자세를 취했다.
옆에 있던 이순신보다 3살 많은 유성룡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순신 대신 대감에게 사죄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제 친구는 이 나라를 지킬 훌륭한 장군이 될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려는 충성심을 어여삐 여기시어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라고 말한다.
대감은 이순신에게 “임금님께서 그 길로 지나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장군이 되면 “임금님께서 전쟁터를 지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거침 없이 대답했다. 대감은 이순신에 대답에 놀라며 하인들에게 다른 길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1565년, 이순신은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에서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를 준비했다. 7년 후 1572년, 이순신이 28세였던 해에 준비하던 훈련원 별과를 치렀고, 시험을 보던 도중 말에서 떨어졌다.
이순신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기절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옆에 있던 버드나무까지 가서 껍질을 벗기고 다리에 묶어 다시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말을 올라타고 달렸다. 마지막까지 노력을 보인 이순신이었지만 시험에서 낙방을 하게 된다.
4년 뒤 1576년 나이 32세가 되던 해 그는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 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섰으며 1576년 12월에 동구비보권관을 거쳤다.
1580년 7월, 이순신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인 발포의 발포순군만호에 재직하고 있었다. 성박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이순신에게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우리나라의 재산인 오동나무를 벨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후 성박은 이순신을 부정적인 시선을 보게 되었다.
[출처:Flickr]
후임이었던 이용은 발포, 여도, 사도, 녹도에서 이탈자를 보고하지 않고 지휘하는 포구 3명만 보고하여 이용은 그에게서 장계를 회수했고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다. 하지만 오동나무 이야기를 들은 이용은 이순신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고,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했다.
그 후 1587년, 이순신이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게 된다. 이순신은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모아 녹둔도로 향한다. 사람들이 추수를 할 때 여진족이 논밭에 화살과 병기류 등을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하여 침입하기 시작한다. 이때 녹둔도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 이후 열다섯 필의 말들이 약탈 당하고, 그 일로 도망치는 와중에서 이순신과 이경록이 남아서 싸워 승리하게 된다. 이때 조선인 백성 60명을 구출한다. 기습과 침략이 계속되어 방어를 강화하고 반격하여 무찌르는 것을 반복하며 이순신은 추가 병력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 당해 패전 당했다.
1592년 5월 23일, 선조가 조선을 다스리던 시기에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함대 700척을 이끌고 부산포를 참략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와 동일하다. 일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순신은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내 병력 700여 명을 소집했다.
하지만 전쟁을 하는 것이 두려운 황옥현은 도주를 시도하다가 이순신의 칼에 참격을 맞았다. 6월 8일 일본함대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이순신은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고 징계를 썼다. 부산포에 침략했으며 이 이후 선조는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했다.
1592년 6월 16일, 옥포해전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군대를 이끌고 옥포를 침략한 일본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26척을 모두 침몰시켰으며, 포로를 모두 풀어주었다. 이순신이 일본을 상대로 한 전투의 첫 승리였다.
또 다시 일본은 옥포를 빼앗기 위해 공격했다. 적진포에서 일본의 13척을 침몰시켰지만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육지로 도망간 일본군을 쫓지 못했다. 이때 조선은 한양에서 싸우다가 평안도로 후퇴했다. 이후 김명원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고,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황해도를 넘겨주고 말았다.
1592년 7월 8일,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라우수영군의 병력이 합류해야 했지만 늦어지는 바람에, 이순신은 배의 방향을 틀어 노량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경상우수영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두 군이 함께 싸우며 전쟁에 흐름을 조선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일본군의 배 13척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일본군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군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 공격을 시도했으며, 일본군의 무기인 화포에 비해 성능이 우수한 지자총통을 활용하여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이 후퇴하더라도 이순신의 함대는 끝까지 쫓아가 추격을 계속했다.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한산도 대첩이다. 일본군이 전투를 하려고 진격하자 이순신은 학인직을 펼쳤고 일본군이 타고 있는 적선에 폭격을 쏟아냈다.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로 지속적인 폭격을 맞았다.
또한, 거북선을 타고 일본군들에게 포탄을 발사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군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출처: 궁금해요, 이순신: 거북선으로 나라 지킨 조선의 명장(안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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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강성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