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김민찬 칼럼니스트] 마블 팬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카메오의 대명사이자, ‘마블 코믹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스탠리는 만화계를 포함한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스탠리는 잭 커비, 스티브 딧코 등의 작가들과 함께 마블 코믹스의 초석을 다졌으며, 마블의 모든 역사를 일평생 함께했다. 스탠리는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마블이라는 거대한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 왔을까?
(사진= 잭커비, 스티브 딧코, 그리고 스탠리 등의 작가들이 참여한 마블 코믹스 오리진 스토리가 담긴 코믹스)
스탠리는 1922년 12월 28일 뉴욕 맨해튼 웨스트엔드 가에서 태어났다. ‘스탠리 마틴 리버’는 어려서부터 독서와 영화를 좋아했고, 작문 능력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연기 연습도 하며 여러 방면으로 꿈을 넓혀갔으나,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안정적인 직업을 얻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2번째로 큰 바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탠리는 공장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는 혹독한 대우를 받게 된다. 이후 크리스마스 기간에 해고된 스탠리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스탠리는 193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화 회사 타임리 코믹스(Timely Comics)에 입사한다. 타임리 코믹스는 마블 코믹스의 전신이 되는 회사다.
스탠리는 타임리 코믹스에서 마틴 굿맨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타임리 코믹스는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마틴 굿맨의 조수 직책을 오래 하지 못했다. 스탠리는 스토리, 설정 등을 담당하는 각본가로 일하게 된다. 약 40년간 타임리 코믹스에서 근무하며 잭 커비 등의 만화가와 친분을 쌓는다.
스탠리는 필명인 스탠 리(Stan Lee)라는 이름으로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판타스틱 4>,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이 있다. 스탠리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잭 커비와 함께 작업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타임리 코믹스가 추후 마블 코믹스로 사명을 변경하는 데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1942년 육군 통신부에 입대한 스탠리는 각본가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부대 내에서 보훈 교육용 영화의 각본을 쓰거나 훈련용 매뉴얼을 만화로 만드는 등의 업무를 맡았다. 스탠리의 만화 덕분에 훈련 기간이 6개월에서 6주로 줄어들 정도로 만화는 효과적인 힘을 발휘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스탠리는 1947년 타임리 코믹스가 사명을 변경한 아틀라스 코믹스(Atlas Comics)로 복귀했다. 아틀라스 코믹스의 인력 부족으로 인해 스탠리가 편집장, 아트 디렉터, 수석 작가 등 다방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약 40년 동안 일했던 스탠리는 1980년대 이후 일선에서 은퇴하고 편집 위원과 마블의 명예회장 자리에 앉는다. 또한 영화계에 한 획을 그었던 마블 원작 코믹스의 실사화, 즉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 이전 작품들의 총지휘를 맡았다. 스탠리는 이러한 마블 영화들에 카메오로 자주 출연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코믹스를 몰랐던 팬들도 영화를 통해 인지도와 친밀감을 더욱 높였다.
이 외에도 스탠리는 당시 미국에 있던 CCA(Comics Code Authority)라는 만화 규율 위원회에 맞서 싸운 전적도 있다. 당시 CCA는 음주, 마약 등의 요소가 불건전하다고 판단하여 만화에 이런 요소가 등장할 경우 출판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음주나 마약이 부정적으로 표현한 캠페인 만화조차도 규제받는 상황이 되자 스탠리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나섰다.
그들은 마약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만화를 그린 후, CCA의 검토를 무시한 채 출판하기 시작했다. 스탠리의 마블 코믹스와 함께 당대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던 기업 DC 코믹스도 이러한 행위에 동참했다. 코믹스계의 거장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CCA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고, 2000년대 이후 힘을 잃은 CCA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이후 출판된 만화들은 규제가 완화되어 보다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탠리는 1994년에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아이스너 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5년에는 같이 일하던 동료였던 잭 커비의 이름을 딴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2008년에는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에서 국가 예술 훈장을 부여받으며 만화계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남겼다.
(사진=디즈니 플러스에서 스트리밍 중인 다큐멘터리 <스탠리>에서의 모습)
2018년 11월 12일, 스탠리는 자택에서 폐렴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별세했다. 이로 인해 스탠리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작품은 마블의 인피니티 사가를 마무리 짓는 작품, <어벤져스: 엔드 게임>이 되었다. 팬들과 마블의 배우들, 그리고 일론 머스크나 NASA 등도 스탠리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캡틴 마블>에서 캡틴 마블 역을 맡은 배우 브리 라슨이 스탠리 사망에 대한 추모 글을 자신의 SNS에 올리며, 자신이 새로 구매한 상품을 자랑하는 듯한 사진을 함께 올려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캡틴 마블>의 오프닝에서 기존의 마블 영웅들의 등장 대신 스탠리를 추모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스탠리의 SNS에는 사망 전 마지막으로 작성된 글이 남아 있다. “Excelsior”이라는 말은 본래 라틴어로 “더욱더 높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스탠리는 생전에 이 말을 자주 인용했다. 실제로 스탠리가 주도적으로 이끈 마블도 더욱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며 살아생전까지 승승장구했다.
스탠리가 사망한 이후 마블은 도전적인 시도를 지속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많은 팬들이 떠나가고 추락한 마블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와 <데드풀과 울버린>,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과 같은 추억을 자극하는 영화들로 기존 팬들을 사로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마블이 다시 한번 더욱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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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김민찬 칼럼니스트] 마블 팬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카메오의 대명사이자, ‘마블 코믹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스탠리는 만화계를 포함한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스탠리는 잭 커비, 스티브 딧코 등의 작가들과 함께 마블 코믹스의 초석을 다졌으며, 마블의 모든 역사를 일평생 함께했다. 스탠리는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마블이라는 거대한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 왔을까?
(사진= 잭커비, 스티브 딧코, 그리고 스탠리 등의 작가들이 참여한 마블 코믹스 오리진 스토리가 담긴 코믹스)
스탠리는 1922년 12월 28일 뉴욕 맨해튼 웨스트엔드 가에서 태어났다. ‘스탠리 마틴 리버’는 어려서부터 독서와 영화를 좋아했고, 작문 능력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연기 연습도 하며 여러 방면으로 꿈을 넓혀갔으나,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안정적인 직업을 얻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2번째로 큰 바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탠리는 공장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는 혹독한 대우를 받게 된다. 이후 크리스마스 기간에 해고된 스탠리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스탠리는 193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화 회사 타임리 코믹스(Timely Comics)에 입사한다. 타임리 코믹스는 마블 코믹스의 전신이 되는 회사다.
스탠리는 타임리 코믹스에서 마틴 굿맨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타임리 코믹스는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마틴 굿맨의 조수 직책을 오래 하지 못했다. 스탠리는 스토리, 설정 등을 담당하는 각본가로 일하게 된다. 약 40년간 타임리 코믹스에서 근무하며 잭 커비 등의 만화가와 친분을 쌓는다.
스탠리는 필명인 스탠 리(Stan Lee)라는 이름으로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판타스틱 4>,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이 있다. 스탠리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잭 커비와 함께 작업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타임리 코믹스가 추후 마블 코믹스로 사명을 변경하는 데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1942년 육군 통신부에 입대한 스탠리는 각본가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부대 내에서 보훈 교육용 영화의 각본을 쓰거나 훈련용 매뉴얼을 만화로 만드는 등의 업무를 맡았다. 스탠리의 만화 덕분에 훈련 기간이 6개월에서 6주로 줄어들 정도로 만화는 효과적인 힘을 발휘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스탠리는 1947년 타임리 코믹스가 사명을 변경한 아틀라스 코믹스(Atlas Comics)로 복귀했다. 아틀라스 코믹스의 인력 부족으로 인해 스탠리가 편집장, 아트 디렉터, 수석 작가 등 다방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약 40년 동안 일했던 스탠리는 1980년대 이후 일선에서 은퇴하고 편집 위원과 마블의 명예회장 자리에 앉는다. 또한 영화계에 한 획을 그었던 마블 원작 코믹스의 실사화, 즉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 이전 작품들의 총지휘를 맡았다. 스탠리는 이러한 마블 영화들에 카메오로 자주 출연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코믹스를 몰랐던 팬들도 영화를 통해 인지도와 친밀감을 더욱 높였다.
이 외에도 스탠리는 당시 미국에 있던 CCA(Comics Code Authority)라는 만화 규율 위원회에 맞서 싸운 전적도 있다. 당시 CCA는 음주, 마약 등의 요소가 불건전하다고 판단하여 만화에 이런 요소가 등장할 경우 출판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음주나 마약이 부정적으로 표현한 캠페인 만화조차도 규제받는 상황이 되자 스탠리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나섰다.
그들은 마약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만화를 그린 후, CCA의 검토를 무시한 채 출판하기 시작했다. 스탠리의 마블 코믹스와 함께 당대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던 기업 DC 코믹스도 이러한 행위에 동참했다. 코믹스계의 거장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CCA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고, 2000년대 이후 힘을 잃은 CCA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이후 출판된 만화들은 규제가 완화되어 보다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탠리는 1994년에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아이스너 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5년에는 같이 일하던 동료였던 잭 커비의 이름을 딴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2008년에는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에서 국가 예술 훈장을 부여받으며 만화계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남겼다.
(사진=디즈니 플러스에서 스트리밍 중인 다큐멘터리 <스탠리>에서의 모습)
2018년 11월 12일, 스탠리는 자택에서 폐렴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별세했다. 이로 인해 스탠리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작품은 마블의 인피니티 사가를 마무리 짓는 작품, <어벤져스: 엔드 게임>이 되었다. 팬들과 마블의 배우들, 그리고 일론 머스크나 NASA 등도 스탠리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캡틴 마블>에서 캡틴 마블 역을 맡은 배우 브리 라슨이 스탠리 사망에 대한 추모 글을 자신의 SNS에 올리며, 자신이 새로 구매한 상품을 자랑하는 듯한 사진을 함께 올려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캡틴 마블>의 오프닝에서 기존의 마블 영웅들의 등장 대신 스탠리를 추모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스탠리의 SNS에는 사망 전 마지막으로 작성된 글이 남아 있다. “Excelsior”이라는 말은 본래 라틴어로 “더욱더 높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스탠리는 생전에 이 말을 자주 인용했다. 실제로 스탠리가 주도적으로 이끈 마블도 더욱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며 살아생전까지 승승장구했다.
스탠리가 사망한 이후 마블은 도전적인 시도를 지속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많은 팬들이 떠나가고 추락한 마블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와 <데드풀과 울버린>,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과 같은 추억을 자극하는 영화들로 기존 팬들을 사로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마블이 다시 한번 더욱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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