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 = 이아림 칼럼니스트]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뉴스 보도 화면에 비치는 처참한 동네 풍경, 깨져버린 일상의 현실은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전쟁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위협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욕망의 표출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사진=Unsplash)
프랑스의 대표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왜 전쟁인가?』라는 저서에서 전쟁과 평화의 근원을 파헤친다. 저자는 고대 플라톤부터 마르크스, 마키아벨리, 홉스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정치철학자들의 견해부터 국가 간 소유욕의 '광기'의 형태와 같은 전쟁의 양면성을 섬세하게 고찰하며, 결국 '왜 인류는 그럼에도 전쟁을 하는가'라는 궁극적 질문에 도달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수많은 전문가들은 1945년 종전 이후 무력 분쟁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진짜 전쟁의 귀환'을 표현했다. 저자는 그럼에도 과거 수많은 포위전, 학살, 테러 등의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를 '전통적인 전쟁의 재현' 즉, 전쟁의 한 형태가 귀환한 것이라고 상황을 정의했다. 물론 지금도 뉴스에 보도되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전쟁'이 존재한다.
전쟁의 원인은 자원과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 종교 등 큰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다. 전쟁론의 교본으로 불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말하는 전쟁의 전통적인 주요 원인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물질적 이득이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물질과 자원은 유한한 반면 인간의 내장된 욕망은 무한하다. 도덕과 윤리의 법칙을 무시하는 '폭력'은 무한한 욕망에 기름칠한다. 상대에 대한 질투심과 시기심이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사진=Unsplash)
두 번째 원인은 공포다. 인접국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면 이에 대응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전쟁이 현실화되기까지 이 '공포'가 양측에 제공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마지막 근원은 '허영심'이다. 상징적 승리를 목적으로 한 수많은 전쟁은 역사책에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모든 역사적 사건의 전개, 결론은 여러 형태로 이뤄진 '전쟁'의 크고 작은 영향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로써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이 '전쟁'은 피와 잔인함, 파괴의 상징이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창조'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인류를 구한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은 1928년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했으나 2차 세계대전까지는 상용화되지 않았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은 1941년 미국이 참전하면서부터다. 미 정부의 지원으로 부상병들은 세균 감염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조직화된 폭력인 전쟁과 인간 사회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전쟁에 없을 줄 알았던 긍정적 측면의 존재는 역사로 인해 증명되었다. 인명 피해와 자원 낭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되는 등 많은 사회 혁신이 전쟁에서 비롯됐다. 인간과 문명의 연결고리는 '전쟁'을 통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엮인 결과로 드러난다.
'필요악'과 '절대악' 경계를 넘나드는 전쟁은 누구에게는 큰 상처와 아픔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새로운 창조의 근원을 제공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목표는 처참한 전쟁의 시간 속에서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 채 가치 없는 공격과 비난으로 전락하고 있다. 목표가 변질된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날 얻는 것은 무엇일까? 목표를 잃은 채 감정과 자원을 쏟아부었던 전쟁 국가에게 남는 것은 '승전국의 명성'보다 소중했던 평범한 일상을 잃은 고통일 뿐이다.
저작권자 © 밸류체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밸류체인타임스 = 이아림 칼럼니스트]
[밸류체인타임스 = 이아림 칼럼니스트]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뉴스 보도 화면에 비치는 처참한 동네 풍경, 깨져버린 일상의 현실은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전쟁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위협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욕망의 표출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사진=Unsplash)
프랑스의 대표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왜 전쟁인가?』라는 저서에서 전쟁과 평화의 근원을 파헤친다. 저자는 고대 플라톤부터 마르크스, 마키아벨리, 홉스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정치철학자들의 견해부터 국가 간 소유욕의 '광기'의 형태와 같은 전쟁의 양면성을 섬세하게 고찰하며, 결국 '왜 인류는 그럼에도 전쟁을 하는가'라는 궁극적 질문에 도달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수많은 전문가들은 1945년 종전 이후 무력 분쟁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진짜 전쟁의 귀환'을 표현했다. 저자는 그럼에도 과거 수많은 포위전, 학살, 테러 등의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를 '전통적인 전쟁의 재현' 즉, 전쟁의 한 형태가 귀환한 것이라고 상황을 정의했다. 물론 지금도 뉴스에 보도되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전쟁'이 존재한다.
전쟁의 원인은 자원과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 종교 등 큰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다. 전쟁론의 교본으로 불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말하는 전쟁의 전통적인 주요 원인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물질적 이득이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물질과 자원은 유한한 반면 인간의 내장된 욕망은 무한하다. 도덕과 윤리의 법칙을 무시하는 '폭력'은 무한한 욕망에 기름칠한다. 상대에 대한 질투심과 시기심이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사진=Unsplash)
두 번째 원인은 공포다. 인접국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면 이에 대응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전쟁이 현실화되기까지 이 '공포'가 양측에 제공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마지막 근원은 '허영심'이다. 상징적 승리를 목적으로 한 수많은 전쟁은 역사책에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모든 역사적 사건의 전개, 결론은 여러 형태로 이뤄진 '전쟁'의 크고 작은 영향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로써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이 '전쟁'은 피와 잔인함, 파괴의 상징이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창조'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인류를 구한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은 1928년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했으나 2차 세계대전까지는 상용화되지 않았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은 1941년 미국이 참전하면서부터다. 미 정부의 지원으로 부상병들은 세균 감염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조직화된 폭력인 전쟁과 인간 사회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전쟁에 없을 줄 알았던 긍정적 측면의 존재는 역사로 인해 증명되었다. 인명 피해와 자원 낭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되는 등 많은 사회 혁신이 전쟁에서 비롯됐다. 인간과 문명의 연결고리는 '전쟁'을 통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엮인 결과로 드러난다.
'필요악'과 '절대악' 경계를 넘나드는 전쟁은 누구에게는 큰 상처와 아픔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새로운 창조의 근원을 제공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목표는 처참한 전쟁의 시간 속에서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 채 가치 없는 공격과 비난으로 전락하고 있다. 목표가 변질된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날 얻는 것은 무엇일까? 목표를 잃은 채 감정과 자원을 쏟아부었던 전쟁 국가에게 남는 것은 '승전국의 명성'보다 소중했던 평범한 일상을 잃은 고통일 뿐이다.
저작권자 © 밸류체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밸류체인타임스 = 이아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