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스포츠서울)
[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최동원은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고, MLB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계약을 제안할 정도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최동원은 롯데 자이언츠(당시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하며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의 전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실력뿐만 아니라 혹사로도 유명했다.
1981년 실업야구 시절, 롯데가 소화한 총 324이닝 중 신인 최동원이 무려 206이닝을 던지며 팀을 코리아시리즈에 진출시켰다. 그 후에도 그의 혹사는 계속되었고, 최동원은 6차전까지 모두 등판해 롯데의 실업야구 마지막 우승에 기여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한 첫 시즌, 최동원은 연봉 협상 문제로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준수한 성적을 냈다. 208.2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2.89, 9승 16패, 148탈삼진을 기록했고, 9승 중 8승이 완투승일 정도로 강인한 투혼을 보여주었다. 특히 선발 등판 후 이틀 만에 구원 등판하는 등, 혹사 속에서도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1984년은 최동원이 전설적인 시즌을 보낸 해였다. 그는 27승을 거두며 리그 최다승 투수가 되었지만, 그중 17승이 구원승일 정도로 불규칙한 등판 스케줄을 소화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전설은 한국시리즈에서 만들어졌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 3, 5, 7차전에 등판해 4승 1패, 40이닝을 던지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610구를 던진 그의 투혼은 한국 야구 역사에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런 혹사는 그의 몸에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그는 점점 쇠약해졌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회를 설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당시 고액 연봉을 받는 에이스였음에도,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동료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구단들의 반대로 협회 설립은 무산되었고, 이후 롯데 구단은 보복성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실망한 최동원은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에 돌아왔으나, 예전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은퇴했다.
은퇴 후, 그는 프로팀의 투수 코치로 활동하며 신인 류현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선발로 추천해 한화의 프랜차이즈 투수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최동원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등번호는 롯데 구단의 첫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비록 구단의 결정이 늦어졌지만, 팬들의 요구에 의해 그의 등번호는 영구결번이 되었으며,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배 선수들이 선수협회를 창설해 한국 야구의 발전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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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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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차시현 칼럼니스트] 최동원은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고, MLB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계약을 제안할 정도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최동원은 롯데 자이언츠(당시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하며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의 전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실력뿐만 아니라 혹사로도 유명했다.
1981년 실업야구 시절, 롯데가 소화한 총 324이닝 중 신인 최동원이 무려 206이닝을 던지며 팀을 코리아시리즈에 진출시켰다. 그 후에도 그의 혹사는 계속되었고, 최동원은 6차전까지 모두 등판해 롯데의 실업야구 마지막 우승에 기여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한 첫 시즌, 최동원은 연봉 협상 문제로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준수한 성적을 냈다. 208.2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2.89, 9승 16패, 148탈삼진을 기록했고, 9승 중 8승이 완투승일 정도로 강인한 투혼을 보여주었다. 특히 선발 등판 후 이틀 만에 구원 등판하는 등, 혹사 속에서도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1984년은 최동원이 전설적인 시즌을 보낸 해였다. 그는 27승을 거두며 리그 최다승 투수가 되었지만, 그중 17승이 구원승일 정도로 불규칙한 등판 스케줄을 소화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전설은 한국시리즈에서 만들어졌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 3, 5, 7차전에 등판해 4승 1패, 40이닝을 던지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610구를 던진 그의 투혼은 한국 야구 역사에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런 혹사는 그의 몸에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그는 점점 쇠약해졌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회를 설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당시 고액 연봉을 받는 에이스였음에도,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동료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구단들의 반대로 협회 설립은 무산되었고, 이후 롯데 구단은 보복성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실망한 최동원은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에 돌아왔으나, 예전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은퇴했다.
은퇴 후, 그는 프로팀의 투수 코치로 활동하며 신인 류현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선발로 추천해 한화의 프랜차이즈 투수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최동원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등번호는 롯데 구단의 첫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비록 구단의 결정이 늦어졌지만, 팬들의 요구에 의해 그의 등번호는 영구결번이 되었으며,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배 선수들이 선수협회를 창설해 한국 야구의 발전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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