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당의 역사
(창업주 임길순, 한순덕 부부 / 성심당 공식 홈페이지)
[밸류체인타임스=김시우 인재기자]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0년 12월 23일, 성심당의 창업주 임길순 대표와 그의 가족들은 함경남도 흥남시 바닷가에서 피난민들을 구할 피난선을 기다렸다. 천주교 신자였던 임길순 대표는 ‘우리 가족이 살아 돌아간다면, 남은 인생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 마지막 피난민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에 탑승하게 되었고, 임길순 대표와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
이후 임길순 대표와 가족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서울행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중 임길순 대표가 탑승한 기차가 고장 나 대전역에 멈춰 섰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다음 기차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었다. 임길순 대표는 의도치 않게 대전역에 머물게 되었고, 대흥동 성당에서 원조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대전역 앞에서 찐빵집을 차렸다.
빵을 단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임길순 대표는 여러 사람들에게 질문하며 배웠다. 천막으로 세운 작은 노점이었지만 임길순 대표는 그곳에 ‘예수의 마음'을 뜻하는 ‘성심당'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간판을 달았다. 장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찐빵을 나누어 주며 피난선을 기다리며 다짐했던 나눔을 실천했다.
성심당을 이끈 임영진 대표
당시 밀가루 값은 매우 저렴했고, 빵이 서양 음식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빵 수요가 높았다. 성심당의 매출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1967년에는 현재 성심당 케익부띠끄 자리인 은행동에 가게를 차렸다. 제빵 기술이 부족했던 임길순 대표는 직원을 고용하여 성심당을 운영했다.
1970년대 초반, 직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제빵 기술자들이 모두 잠적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제빵 기술자들을 잃은 성심당을 살리기 위해 아들까지 뛰어들어 제빵 기술을 배웠다. 제빵에 흥미가 생긴 아들이 직접 성심당의 빵을 만들기 시작했고, 성심당은 안정을 되찾았다.
1980년대에 오픈런을 불러일으킨 전설의 빵, ‘튀김소보로’
(임영진 대표와 가족 / 출처=성심당 sns)
그 아들이 현재 성심당의 대표이사 임영진 대표다. 1980년대 제과점의 인기 메뉴는 단밭빵과 소보로빵, 도넛이었다. 임영진 대표는 이 3가지 메뉴를 한 개의 빵에서 모두 맛볼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다가 ‘튀김소보로'를 개발했다.
(튀김소보로 / 출처=성심당 sns)
1980년 5월 20일, 튀김소보로를 출시했다. 튀김소보로는 오픈런이라는 개념도 없던 1980년도에 오픈런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튀김소보로 출시 이후 성심당은 인기 맛집 제과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튀김소보로의 인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하루 1만 개 이상씩 팔린다. 튀김소보로의 누적 판매량은 1억 개에 육박한다.
성심당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는 이유?
1990년대에는 빵집 프랜차이즈가 대세였다. 창업주 임길순 대표의 막내아들이었던 임기석 대표는 성심당을 프렌차이즈화하고 싶었다. 임영진 대표는 반대했지만 임기석 대표는 성심당이 소유한 건물을 저당 잡혀서 프랜차이즈 성심당을 세웠다. 형 임영진 대표는 작은 빵집 사장이고, 동생 임기석 대표는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대표가 된 것이다.
프랜차이즈화한 성심당의 빵은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당시 성심당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브랜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명 브랜드였던 성심당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빵맛이 뒷받침되어야 헀다. 공장에서 찍어낸 프랜차이즈화된 성심당의 빵으로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임기석 대표는 해외 진출까지 시도했고, 2003년 프랜차이즈 성심당은 부도를 맞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형 임영진 대표가 운영하는 대전의 작은 빵집 성심당뿐이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뒤인 2005년 1월 22일, 큰 화재로 대전 성심당마저 홀라당 타버렸다.
임영진 대표는 성심당의 경영이념을 지키며 팔다 남은 빵을 대전 지역 사회복지시설에 환원했고, 성심당에서 일하던 직원들에게도 가족처럼 따듯하게 대했다. 성심당의 선행 덕분에 성심당이 위기에 처하자 직원과 지역 사회에서 심적, 물적 지원을 보냈고, 화재 6일 만에 다시 단팥빵을 만들 수 있었다.
(출처=네이버 CCL)
다시 장사를 이어오던 성심당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대 후반, 프랜차이즈 빵집의 인기가 식으면서 사람들은 동네에서 오래된 빵 맛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성심당의 빵은 높은 퀄리티에 양도 푸짐했고, 가격까지 저렴했다. 성심당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심당이 대전이 미치는 영향
과거 프랜차이즈 사업 실패 후 성심당은 분점을 늘리는 것이 더 조심스러웠다. 현재는 대전에만 5개의 지점 외에 다른 지역에는 분점을 두지 않고 있다. 서울에 매장을 오픈해 달라는 제안에 임영진 대표는 “굳이 서울에서 영업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환경이 바뀌면 본질이 흐려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생명력을 잃는 것이다. 대전에 와야만 성심당을 만날 수 있다는 희소성도 성심당의 본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실제 성심당이 대전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이다. 성심당의 매장 수는 5개지만 영업이익은 315억 원이다. 3400여 개 매장을 가진 파리바게뜨의 영업이익은 199억 원, 1300여 개 매장을 가진 뚜레쥬르의 영업이익은 214억 원으로 대형 프랜차이즈를 훨씬 넘어섰다.
최근 3년간 성심당은 대전 여행 방문 장소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대전은 성심당의 도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미 SNS에는 '성심당 가려고 대전에 당일치기 여행’, ‘노잼 대전이지만 성심당 가려고 대전 간다'라는 글이 퍼지고 있다. 성심당 휴무날이면 ‘재난 상황이 벌어졌다', ‘대전 여행 금지'와 같은 유머 글도 올라올 정도다.
실제로 대전 관광 실태조사 결과 99.2%가 당일 치기 여행이고, 숙박 여행은 0.8%다. 성심당을 중심으로 대전에 방문하지만 이틀 이상 머물기에는 볼 거리가 충분하지 않다. 이에 성심당은 ‘ 빵 테마파크나 빵과 관련된 문화와 나눔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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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우 인재기자]
성심당의 역사
(창업주 임길순, 한순덕 부부 / 성심당 공식 홈페이지)
[밸류체인타임스=김시우 인재기자]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0년 12월 23일, 성심당의 창업주 임길순 대표와 그의 가족들은 함경남도 흥남시 바닷가에서 피난민들을 구할 피난선을 기다렸다. 천주교 신자였던 임길순 대표는 ‘우리 가족이 살아 돌아간다면, 남은 인생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 마지막 피난민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에 탑승하게 되었고, 임길순 대표와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
이후 임길순 대표와 가족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서울행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중 임길순 대표가 탑승한 기차가 고장 나 대전역에 멈춰 섰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다음 기차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었다. 임길순 대표는 의도치 않게 대전역에 머물게 되었고, 대흥동 성당에서 원조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대전역 앞에서 찐빵집을 차렸다.
빵을 단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임길순 대표는 여러 사람들에게 질문하며 배웠다. 천막으로 세운 작은 노점이었지만 임길순 대표는 그곳에 ‘예수의 마음'을 뜻하는 ‘성심당'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간판을 달았다. 장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찐빵을 나누어 주며 피난선을 기다리며 다짐했던 나눔을 실천했다.
성심당을 이끈 임영진 대표
당시 밀가루 값은 매우 저렴했고, 빵이 서양 음식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빵 수요가 높았다. 성심당의 매출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1967년에는 현재 성심당 케익부띠끄 자리인 은행동에 가게를 차렸다. 제빵 기술이 부족했던 임길순 대표는 직원을 고용하여 성심당을 운영했다.
1970년대 초반, 직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제빵 기술자들이 모두 잠적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제빵 기술자들을 잃은 성심당을 살리기 위해 아들까지 뛰어들어 제빵 기술을 배웠다. 제빵에 흥미가 생긴 아들이 직접 성심당의 빵을 만들기 시작했고, 성심당은 안정을 되찾았다.
1980년대에 오픈런을 불러일으킨 전설의 빵, ‘튀김소보로’
(임영진 대표와 가족 / 출처=성심당 sns)
그 아들이 현재 성심당의 대표이사 임영진 대표다. 1980년대 제과점의 인기 메뉴는 단밭빵과 소보로빵, 도넛이었다. 임영진 대표는 이 3가지 메뉴를 한 개의 빵에서 모두 맛볼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다가 ‘튀김소보로'를 개발했다.
(튀김소보로 / 출처=성심당 sns)
1980년 5월 20일, 튀김소보로를 출시했다. 튀김소보로는 오픈런이라는 개념도 없던 1980년도에 오픈런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튀김소보로 출시 이후 성심당은 인기 맛집 제과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튀김소보로의 인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하루 1만 개 이상씩 팔린다. 튀김소보로의 누적 판매량은 1억 개에 육박한다.
성심당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는 이유?
1990년대에는 빵집 프랜차이즈가 대세였다. 창업주 임길순 대표의 막내아들이었던 임기석 대표는 성심당을 프렌차이즈화하고 싶었다. 임영진 대표는 반대했지만 임기석 대표는 성심당이 소유한 건물을 저당 잡혀서 프랜차이즈 성심당을 세웠다. 형 임영진 대표는 작은 빵집 사장이고, 동생 임기석 대표는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대표가 된 것이다.
프랜차이즈화한 성심당의 빵은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당시 성심당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브랜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명 브랜드였던 성심당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빵맛이 뒷받침되어야 헀다. 공장에서 찍어낸 프랜차이즈화된 성심당의 빵으로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임기석 대표는 해외 진출까지 시도했고, 2003년 프랜차이즈 성심당은 부도를 맞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형 임영진 대표가 운영하는 대전의 작은 빵집 성심당뿐이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뒤인 2005년 1월 22일, 큰 화재로 대전 성심당마저 홀라당 타버렸다.
임영진 대표는 성심당의 경영이념을 지키며 팔다 남은 빵을 대전 지역 사회복지시설에 환원했고, 성심당에서 일하던 직원들에게도 가족처럼 따듯하게 대했다. 성심당의 선행 덕분에 성심당이 위기에 처하자 직원과 지역 사회에서 심적, 물적 지원을 보냈고, 화재 6일 만에 다시 단팥빵을 만들 수 있었다.
(출처=네이버 CCL)
다시 장사를 이어오던 성심당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대 후반, 프랜차이즈 빵집의 인기가 식으면서 사람들은 동네에서 오래된 빵 맛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성심당의 빵은 높은 퀄리티에 양도 푸짐했고, 가격까지 저렴했다. 성심당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심당이 대전이 미치는 영향
과거 프랜차이즈 사업 실패 후 성심당은 분점을 늘리는 것이 더 조심스러웠다. 현재는 대전에만 5개의 지점 외에 다른 지역에는 분점을 두지 않고 있다. 서울에 매장을 오픈해 달라는 제안에 임영진 대표는 “굳이 서울에서 영업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환경이 바뀌면 본질이 흐려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생명력을 잃는 것이다. 대전에 와야만 성심당을 만날 수 있다는 희소성도 성심당의 본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실제 성심당이 대전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이다. 성심당의 매장 수는 5개지만 영업이익은 315억 원이다. 3400여 개 매장을 가진 파리바게뜨의 영업이익은 199억 원, 1300여 개 매장을 가진 뚜레쥬르의 영업이익은 214억 원으로 대형 프랜차이즈를 훨씬 넘어섰다.
최근 3년간 성심당은 대전 여행 방문 장소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대전은 성심당의 도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미 SNS에는 '성심당 가려고 대전에 당일치기 여행’, ‘노잼 대전이지만 성심당 가려고 대전 간다'라는 글이 퍼지고 있다. 성심당 휴무날이면 ‘재난 상황이 벌어졌다', ‘대전 여행 금지'와 같은 유머 글도 올라올 정도다.
실제로 대전 관광 실태조사 결과 99.2%가 당일 치기 여행이고, 숙박 여행은 0.8%다. 성심당을 중심으로 대전에 방문하지만 이틀 이상 머물기에는 볼 거리가 충분하지 않다. 이에 성심당은 ‘ 빵 테마파크나 빵과 관련된 문화와 나눔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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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우 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