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단 자국을 무대 펼쳐지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진영에 피 튀기는 혈전 6.25 전쟁과 비슷한 시기, 이와 비슷한 흐름대로 전쟁을 겪은 국가가 있었다. 바로 베트남이다. 이곳에서 발생한 베트남 전쟁은 6.25 전쟁의 양상과 너무나도 닮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유럽 열강들이 정신없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던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 하에 점령당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는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흔히 써먹던 방법을 구실 삼아 베트남을 식민지화했는데 자국의 가톨릭 선교사를 처형했다는 이유를 들이밀며, 늘 그렇듯 열심히 베트남의 등골을 빼먹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되고, 두 차례 큰 전쟁에 모두 참전했던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2차 대전 때는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 전체가 점령당한 적도 있으니 식민지는커녕 당장 집안 불을 끄는데 정신이 없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호시탐탐 독립을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또 다른 불청객이 베트남에 찾아오게 된다.
바로 일본 제국이었다. 프랑스가 2차 세계대전 때문에 동남아에 신경을 못 쓰는 상황을 노려 일본이 이곳을 침략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후에는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정부까지 세우고 물자를 수탈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무시하고 일본이 베트남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된 셈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엄청난 식량 수탈을 당하면서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기근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화는 1945년 8월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방을 맞고 전쟁의 항복을 선언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베트남도 이에 발맞춰 재빨리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하며 독립을 쟁취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유럽의 선악기에서 독립을 이룩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끝까지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다. 1946년 11월 23일,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함대를 이끌고, 하노이 근교의 항구 도시 하이퐁을 무차별적으로 포격했다.
이 과정에서 6000명의 베트남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고, 프랑스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하노이 중심지까지 장악했다. 또다시 식민지가 되고 싶지 않았던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기로 한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맞서 호찌민 주석과 보흥우엔잡 장군이 수립한 전략을 시행하는데, 이 전략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제1단계에서 베트남군은 방어에 열중하고, 양측의 힘이 비슷해지는 제2단계에 이르면 굴에서 나와 전쟁한다. 마지막인 제3단계에서는 적군을 폐쇄된 곳으로 몰리게 하는 최종 공세를 하는 것이다. 즉, 이 전략은 방어 세력 균형 총반격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전략에 몸을 바쳐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의 보급을 차단하며 주변의 고지로부터 무수하게 갈라진 첨호를 굴착해 나갔다.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화를 견디면서 베트남 병사들은 인내심과 끈기로 한 발 한 발 참호를 파 내려갔다. 일명 ‘땅굴 전략’이다.
프랑스의 상황도 열악했지만, 베트남군은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장비들을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짊어진 후 꼭대기까지 가져가서 다시 조립했다. 군수품 또한 민간인들이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군수 물자를 운반했다. 이 과정에서 타이어가 계속 펑크가 나서 후에는 헝겊을 말아 타이어 대신 끼워 넣었다.
베트남 군은 전쟁에 대해 상상을 초월하는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끈질긴 베트남 군의 총 반격으로 프랑스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고 있었다. 전쟁을 벌이며 흘러간 시간만 무려 7년째인 1954년 3월 전술 지형을 이용한 베트남의 계속된 압박에 프랑스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베트남은 마지막 남은 프랑스군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부상자를 포함한 1만 1천여 명의 프랑스군이 포로가 됐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프랑스와 7년 가까이 명분 없는 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베트남 문제를 놓고 제네바 협약이 시작됐다.
사실 과거에 프랑스가 베트남 남쪽을 계속해서 지배해 왔다. 남쪽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베트남인들이 많았고, 북쪽에는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가 많았다. 제네바 협정 결과,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나누고, 2년 뒤에 다시 이를 통합하여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제네바 협정 이후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이제 완전히 베트남에서 전군 철수했다. 프랑스의 이동과 함께 베트남 내의 민족 이동도 동시에 일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내전의 성격이 강했지만, 북쪽으로는 호찌민의 주도 아래 공산당원들이 올라오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공산당 혹은 가톨릭 신자들이 전부 내려오면서 지역의 이념 차이가 훨씬 극단화되어 버렸다.
프랑스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남 베트남에는 미국의 지원으로 응오딘지엠이 초대 총통으로 올랐고, 북베트남에는 호찌민이 그대로 장악함에 따라 이제 베트남 땅에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간접적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 남북의 베트남은 냉전 구도에 따른 대리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문제는 남베트남이었다. 지금까지 프랑스의 간접 지배를 받아온 남베트남 국민의 눈에는 프랑스나 현재 지원해 주고 있는 미국이나 똑같은 침략자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달갑지 않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정치에 매우 부패하고 무능했고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는 어떤 움직임도 모두 공산주의로 몰았다. 2년 동안 1만 2천 명을 죽이는 공포 정치를 실시한다.
남베트남을 안정적인 국가로 이끌기는커녕 국민들에게 분배된 땅을 다시 회수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펼쳤다. 전통적으로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서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불교계를 탄압하기까지 한다. 이로 인해 베트남 사이공 도로 한복판에서 한 스님이 불신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불만으로 가득한 남베트남 곳곳에서는 봉기가 일어났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막장에 대응해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악질 부패 독재 정권으로 인식했다.
이 정권은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응오딘지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963년 10월 2일, 케네디는 CIA에서 한 달이 넘도록 세밀하게 검토한 계획을 승인했고, CIA는 남베트남 군부와 접촉하여 쿠데타 계획에 착수했다. 11월 1일, 쿠데타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어 응오딘지엠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양손이 묶여 총살을 당해 죽게 된다.
남베트남은 혼란에 휩싸였다. 비록 응오딘지엠이 죽게 됐지만 이후에 정권을 잡은 지도자들도 남베트남의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했고, 이전보다 더한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민심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남베트남에는 일명 베트콩이라 불리는 공산주의 조직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북쪽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반드시 남하하여 서방 세력으로부터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겠다는 계획 철저하게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수의 베트콩들이 남베트남 곳곳에서 일명 ‘빨치산 투쟁’을 하고 있었고, 북베트남은 이들에게 지령을 내려 물자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즉 남베트남 정권을 내부로부터 붕괴되게끔 통제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국 또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 미국은 몇 년 전에 퍼진 6.25 한국전쟁의 사례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화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엄청난 지원으로 한국의 공산화는 막아냈지만 이와 똑같은 상황이 베트남에도 벌어지자 신경을 더욱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북베트남에 의한 적과 동일을 막아야 했다. 6.25 전쟁과 다르게 베트남의 상황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6.25 전쟁의 경우 김일성이 38선을 넘어 침공해오는 명백한 도발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군사를 파병할 수 있는 명분이 충분했지만, 베트남의 경우 북베트남 정규군은 17도선 위에서 가만히 있고 남베트남의 베트콩만이 남베트남 내에서 무장봉기를 한 상황이라서 미국이 개입할 확실한 명분이 없었다.
정말 미국 마음 같아서는 그냥 북베트남을 혼쭐 내주고 싶었지만 만약 베트남 17도선을 넘어갈 경우 소련과 중국이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할 수도 없었다. 이 조건을 무시하고 선제 공격을 감행한다면, 3차 세계대전을 발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미국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바로 그때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군사 개입을 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근처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이 미군 구축함 USS 매덕함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통킹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전쟁 개입의 구실을 잡은 미국은 곧바로 미 지상군 투입을 명령했고,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00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이로써 이전까지 전운이 감돌던 베트남의 상황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쟁의 양상으로 돌입하게 된다.
심지어 다음 해에는 베트콩이 미 대사관을 폭탄 테러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더욱 험악해진다. 천문학적인 국가재정을 투입하면서 야심차게 전쟁을 준비하는 미국이었지만 미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정권 스스로 일어서서 위기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베트남을 민주주의 국가로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또한 6.25 전쟁 때에 북한처럼 북베트남이 알아서 북위 17도선을 내려와 침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마주할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미국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면서 북베트남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북베트남은 미국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교묘하게 남베트남의 적화통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중립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한 일명 ‘호찌민 루트’를 통해 끊임없이 남쪽의 베트콩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도 이 호찌민 루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국제적으로 중립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즉, 미국은 북베트남과 싸우는 동시에 남베트남에서 숨어서 공격하는 베트콩과도 싸웠다. 특히 베트콩들은 지하의 ‘구찌터널’이라고 불리는 수십 킬로미터의 땅굴을 파면서 지속적으로 미군을 괴롭혔다.
구찌터널 땅굴에는 그 안에 베트콩의 지휘부와 막사가 존재해서 아예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몸집이 작은 베트콩 한 사람도 겨우 들어갈 정도여서 몸집이 큰 미군은 땅굴 입구를 찾아도 들어가서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장에서는 구덩이를 파놓고 흙과 낙엽으로 위장해 놓았는데, 이 구덩이 안에는 날카로운 죽창들이 꽂혀 있어 발을 헛디뎌 이곳에 빠지면 큰 상처를 입도록 설계했다. 심지어 깊은 정글 속에 위치해서 탱크 같은 중장비는 애초에 진입 자체가 어려웠고, 미군은 총 한 자루에 의지한 채 끝나지 않는 두더지 잡기를 해야 했다. 미군은 울창한 밀림을 없애기 위해 강력한 살충제인 고엽제를 살포했다.
고엽제는 식물을 말라죽게 하는 산림파괴형 제초제로 사람에게 노출되면 심한 피부병과 기형아를 출산하게 되는 피해를 입히게 된다. 문제는 화학무기라는 것이다. 살포를 하면 아군과 적군을 가릴 수 없기 때문에 미군을 비롯한 동맹국 군인들도 전쟁이 끝난 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10년이 지나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 환자가 꽤 많았고 심지어는 3대째까지 기형아가 출산되기도 했다. 이렇게 미국은 베트남과의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어렵게 버텨가고 있었다. 그나마 6.25 전쟁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한국과 뉴질랜드 호주 연합군 정도가 전투병을 직접 파병하여 미군과 함께 남베트남을 도왔다.
이때 한국군은 첫 해외 파병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졌기 때문에 각 사단의 우수한 병력만을 선별해 부대를 구성했으며, 8년 5개월 동안 32만 명이라는 많은 병력이 파병됐다. 하지만 역시 전투를 잘 쌓은 것과는 별개로 여러 가지 악조건들 때문에 방어전만 할 수밖에 없었던 미군과 동맹군은 목적 없는 전쟁에 하염없이 전력만 손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베트콩들과의 사투로 지리멸렬한 소모전의 양상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세계 최강 미군의 치밀한 작전으로 베트콩들을 하나하나 박멸시키겠다는 미국의 계획은 무너져버렸다. 그들이 생각한 모든 예상들은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처참히 빗나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군은 그야말로 베트남이라는 늪에 빠져버렸다.
적화통일에 대한 의지가 강력했던 북베트남은 급기야 미국을 무력화시킬 결정적인 한방을 준비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정대공세였다. 적에게 치명적인 공세를 가한 운명의 날을 베트남의 설명절인 구정으로 정했다. 이들이 공격 일자를 설날로 정한 이유는 베트남의 최대 명절로서 이 기간만큼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양측의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도 이 시기는 서로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 또한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쉴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반대로 북베트남은 이런 점을 이용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결전의 날인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과 50만 군의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이들의 군대는 10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을 공격했으며, 기습 공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몇몇 도시는 통제권을 잃기까지 했다.
명절에는 절대 전투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공세 초반에는 큰 타격을 입지만 이내 전회를 정비하고 반격하기 시작한다.
적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 대공세를 펼쳐 승기를 잡겠다던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예상은 빗나갔고, 초반 기습 효과만을 거두었을 뿐 이내 미군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베트콩은 정글에서나 게릴라전으로 미군을 괴롭힐 수 있었지만 도시에서 싸우는 시가전에서는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며칠간의 전투 끝에 베트콩들 남베트남 대부분의 도시에서 소탕됐으며 거의 회복 불가할 정도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실제로 미군은 도시 전체의 80%가 폐허로 변하는 포격을 퍼부었다. 북베트남의 구전공세는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아이러니하게 이 구전공세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북베트남이 비록 전투 자체는 패배했지만, 이 과정에서 베트콩들이 미국 대상안 점령에 성공하는데, 이 장면이 미국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되어 버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트남 전쟁에서 무조건 승리를 확신했던 미국 국민들은 자국의 대사관이 적군에게 그것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동양의 작디작은 나라에 점령당했다는 것을 여과 없이 목격하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전 세계 국민 여론이 뒤바뀌기 시작했고, 아들을 베트남으로 보낸 부모 세대들도 우리 아이들을 먼 타국에서 죽게 할 수 없다며, 미국 전역에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된다.
싸울 의지가 없는 남베트남군을 어떻게든 싸우게 하려던 미군의 상황 수년째 이어지는 지지부진한 양상에 지칠 대로 지친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이밍에 터진 자국의 반전 여론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닉슨은 취임과 동시에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한다. 미군은 1969년부터 철수를 시작하고, 매년 순차적으로 부대를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1973년 1월에 파리에서 강화 협정을 체결한 뒤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과 동맹군이 철수한 뒤 혼자 남은 남베트남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서로 싸움을 그만하고 화해하자는 강화 협정을 체결하긴 했지만, 북베트남은 당연히 보여주기식이었고,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자 드디어 갈았던 이빨을 드러낸다.
미국도 그냥 철수하기에는 너무 마음에 걸렸는지 많은 무기들을 남겨준다. 남베트남이 고작 무기만 있다고 해서 잘 써먹을 리 만무했다. 1975년 3월, 북베트남군은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로 남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결과는 예상대로 4개월 만에 손쉽게 남베트남 전역을 점령했고, 이듬해인 1976년에는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며, 약 19년이라는 길고 길었던 베트남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다.
역사의 한 켠으로 남은 베트남 전쟁은 이후 미국 사회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미국에 있어 베트남 전쟁은 환영받지 못한 전쟁이라는 인식으로 남아있다.
2차 대전은 히틀러라는 강력한 빌런을 상대로 "위기의 세계를 구하자"라는 목적이 있었던 것과 달리 베트남 전쟁은 이렇다 할 확실한 명분이 없었으며, 미국이 굳이 전쟁을 해야 하는 근거도 매우 부족했다. 일각에서는 남의 나라 일에 굳이 오지랖을 부려서 애꿎은 동양 사람들만 죽이고 온 정의롭지 못한 미국으로 비쳤다.
심지어 건국 일에 참여했던 모든 대외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미국이 당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강대국 소련도 아닌 동양의 이름도 못 들어본 작은 나라를 상대로 패배하고 왔으니 국민들은 더욱더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참전용사들에게 돌아갔다. 지구 건너편의 정글에서 목숨 바쳐 싸우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들이 받은 것은 이웃들의 손가락질과 비난뿐이었다. 이 당시 베트남 참전용사들을 비하하는 베이비킬러라는 단어도 있을 정도였다.
미국 정부 또한 경제난에 허덕여 이들을 잘 대우하지 못하고 방치했으며, 이렇게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은 당연히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상당수의 참전용사들이 범죄자가 되거나 노숙자로 전락해버려 한동안 미국의 사회문제로 정의될 정도로 심각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택하게 된다. 미국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은 아픈 손가락이며 처참한 실패의 역사다. 반대로 베트남에 있어서 이 전쟁은 민족을 외세로부터 지켜낸 해방전쟁이며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점으로 이 전쟁을 바라봐야 할까?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국의 힘과 의지 없이 외세의 도움만 받으려는 국가는 결과가 너무나도 처참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베트남은 서구 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북베트남보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었다.
눈앞에 이익 때문에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고, 부정부패의 쾌락에 빠져 결국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이후 남베트남 역시 처절한 피해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남아있던 남베트남 정부 인사들과 군인들, 공무원들은 공산정권의 숙청 아래 무참히 죽어갔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주변국을 떠도는 일명 보트피플이 되어야 했다. 한국전쟁과 매우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됐지만 결과는 극과 극이 되어버린 베트남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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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
[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단 자국을 무대 펼쳐지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진영에 피 튀기는 혈전 6.25 전쟁과 비슷한 시기, 이와 비슷한 흐름대로 전쟁을 겪은 국가가 있었다. 바로 베트남이다. 이곳에서 발생한 베트남 전쟁은 6.25 전쟁의 양상과 너무나도 닮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유럽 열강들이 정신없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던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 하에 점령당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는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흔히 써먹던 방법을 구실 삼아 베트남을 식민지화했는데 자국의 가톨릭 선교사를 처형했다는 이유를 들이밀며, 늘 그렇듯 열심히 베트남의 등골을 빼먹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되고, 두 차례 큰 전쟁에 모두 참전했던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2차 대전 때는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 전체가 점령당한 적도 있으니 식민지는커녕 당장 집안 불을 끄는데 정신이 없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호시탐탐 독립을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또 다른 불청객이 베트남에 찾아오게 된다.
바로 일본 제국이었다. 프랑스가 2차 세계대전 때문에 동남아에 신경을 못 쓰는 상황을 노려 일본이 이곳을 침략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후에는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정부까지 세우고 물자를 수탈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무시하고 일본이 베트남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된 셈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엄청난 식량 수탈을 당하면서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기근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화는 1945년 8월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방을 맞고 전쟁의 항복을 선언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베트남도 이에 발맞춰 재빨리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하며 독립을 쟁취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유럽의 선악기에서 독립을 이룩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끝까지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다. 1946년 11월 23일,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함대를 이끌고, 하노이 근교의 항구 도시 하이퐁을 무차별적으로 포격했다.
이 과정에서 6000명의 베트남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고, 프랑스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하노이 중심지까지 장악했다. 또다시 식민지가 되고 싶지 않았던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기로 한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맞서 호찌민 주석과 보흥우엔잡 장군이 수립한 전략을 시행하는데, 이 전략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제1단계에서 베트남군은 방어에 열중하고, 양측의 힘이 비슷해지는 제2단계에 이르면 굴에서 나와 전쟁한다. 마지막인 제3단계에서는 적군을 폐쇄된 곳으로 몰리게 하는 최종 공세를 하는 것이다. 즉, 이 전략은 방어 세력 균형 총반격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전략에 몸을 바쳐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의 보급을 차단하며 주변의 고지로부터 무수하게 갈라진 첨호를 굴착해 나갔다.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화를 견디면서 베트남 병사들은 인내심과 끈기로 한 발 한 발 참호를 파 내려갔다. 일명 ‘땅굴 전략’이다.
프랑스의 상황도 열악했지만, 베트남군은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장비들을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짊어진 후 꼭대기까지 가져가서 다시 조립했다. 군수품 또한 민간인들이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군수 물자를 운반했다. 이 과정에서 타이어가 계속 펑크가 나서 후에는 헝겊을 말아 타이어 대신 끼워 넣었다.
베트남 군은 전쟁에 대해 상상을 초월하는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끈질긴 베트남 군의 총 반격으로 프랑스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고 있었다. 전쟁을 벌이며 흘러간 시간만 무려 7년째인 1954년 3월 전술 지형을 이용한 베트남의 계속된 압박에 프랑스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베트남은 마지막 남은 프랑스군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부상자를 포함한 1만 1천여 명의 프랑스군이 포로가 됐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프랑스와 7년 가까이 명분 없는 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베트남 문제를 놓고 제네바 협약이 시작됐다.
사실 과거에 프랑스가 베트남 남쪽을 계속해서 지배해 왔다. 남쪽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베트남인들이 많았고, 북쪽에는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가 많았다. 제네바 협정 결과,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나누고, 2년 뒤에 다시 이를 통합하여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제네바 협정 이후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이제 완전히 베트남에서 전군 철수했다. 프랑스의 이동과 함께 베트남 내의 민족 이동도 동시에 일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내전의 성격이 강했지만, 북쪽으로는 호찌민의 주도 아래 공산당원들이 올라오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공산당 혹은 가톨릭 신자들이 전부 내려오면서 지역의 이념 차이가 훨씬 극단화되어 버렸다.
프랑스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남 베트남에는 미국의 지원으로 응오딘지엠이 초대 총통으로 올랐고, 북베트남에는 호찌민이 그대로 장악함에 따라 이제 베트남 땅에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간접적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 남북의 베트남은 냉전 구도에 따른 대리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문제는 남베트남이었다. 지금까지 프랑스의 간접 지배를 받아온 남베트남 국민의 눈에는 프랑스나 현재 지원해 주고 있는 미국이나 똑같은 침략자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달갑지 않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정치에 매우 부패하고 무능했고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는 어떤 움직임도 모두 공산주의로 몰았다. 2년 동안 1만 2천 명을 죽이는 공포 정치를 실시한다.
남베트남을 안정적인 국가로 이끌기는커녕 국민들에게 분배된 땅을 다시 회수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펼쳤다. 전통적으로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서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불교계를 탄압하기까지 한다. 이로 인해 베트남 사이공 도로 한복판에서 한 스님이 불신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불만으로 가득한 남베트남 곳곳에서는 봉기가 일어났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막장에 대응해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악질 부패 독재 정권으로 인식했다.
이 정권은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응오딘지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963년 10월 2일, 케네디는 CIA에서 한 달이 넘도록 세밀하게 검토한 계획을 승인했고, CIA는 남베트남 군부와 접촉하여 쿠데타 계획에 착수했다. 11월 1일, 쿠데타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어 응오딘지엠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양손이 묶여 총살을 당해 죽게 된다.
남베트남은 혼란에 휩싸였다. 비록 응오딘지엠이 죽게 됐지만 이후에 정권을 잡은 지도자들도 남베트남의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했고, 이전보다 더한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민심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남베트남에는 일명 베트콩이라 불리는 공산주의 조직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북쪽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반드시 남하하여 서방 세력으로부터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겠다는 계획 철저하게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수의 베트콩들이 남베트남 곳곳에서 일명 ‘빨치산 투쟁’을 하고 있었고, 북베트남은 이들에게 지령을 내려 물자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즉 남베트남 정권을 내부로부터 붕괴되게끔 통제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국 또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 미국은 몇 년 전에 퍼진 6.25 한국전쟁의 사례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화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엄청난 지원으로 한국의 공산화는 막아냈지만 이와 똑같은 상황이 베트남에도 벌어지자 신경을 더욱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북베트남에 의한 적과 동일을 막아야 했다. 6.25 전쟁과 다르게 베트남의 상황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6.25 전쟁의 경우 김일성이 38선을 넘어 침공해오는 명백한 도발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군사를 파병할 수 있는 명분이 충분했지만, 베트남의 경우 북베트남 정규군은 17도선 위에서 가만히 있고 남베트남의 베트콩만이 남베트남 내에서 무장봉기를 한 상황이라서 미국이 개입할 확실한 명분이 없었다.
정말 미국 마음 같아서는 그냥 북베트남을 혼쭐 내주고 싶었지만 만약 베트남 17도선을 넘어갈 경우 소련과 중국이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할 수도 없었다. 이 조건을 무시하고 선제 공격을 감행한다면, 3차 세계대전을 발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미국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바로 그때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군사 개입을 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근처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이 미군 구축함 USS 매덕함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통킹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전쟁 개입의 구실을 잡은 미국은 곧바로 미 지상군 투입을 명령했고,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00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이로써 이전까지 전운이 감돌던 베트남의 상황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쟁의 양상으로 돌입하게 된다.
심지어 다음 해에는 베트콩이 미 대사관을 폭탄 테러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더욱 험악해진다. 천문학적인 국가재정을 투입하면서 야심차게 전쟁을 준비하는 미국이었지만 미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정권 스스로 일어서서 위기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베트남을 민주주의 국가로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또한 6.25 전쟁 때에 북한처럼 북베트남이 알아서 북위 17도선을 내려와 침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마주할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미국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면서 북베트남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북베트남은 미국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교묘하게 남베트남의 적화통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중립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한 일명 ‘호찌민 루트’를 통해 끊임없이 남쪽의 베트콩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도 이 호찌민 루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국제적으로 중립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즉, 미국은 북베트남과 싸우는 동시에 남베트남에서 숨어서 공격하는 베트콩과도 싸웠다. 특히 베트콩들은 지하의 ‘구찌터널’이라고 불리는 수십 킬로미터의 땅굴을 파면서 지속적으로 미군을 괴롭혔다.
구찌터널 땅굴에는 그 안에 베트콩의 지휘부와 막사가 존재해서 아예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몸집이 작은 베트콩 한 사람도 겨우 들어갈 정도여서 몸집이 큰 미군은 땅굴 입구를 찾아도 들어가서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장에서는 구덩이를 파놓고 흙과 낙엽으로 위장해 놓았는데, 이 구덩이 안에는 날카로운 죽창들이 꽂혀 있어 발을 헛디뎌 이곳에 빠지면 큰 상처를 입도록 설계했다. 심지어 깊은 정글 속에 위치해서 탱크 같은 중장비는 애초에 진입 자체가 어려웠고, 미군은 총 한 자루에 의지한 채 끝나지 않는 두더지 잡기를 해야 했다. 미군은 울창한 밀림을 없애기 위해 강력한 살충제인 고엽제를 살포했다.
고엽제는 식물을 말라죽게 하는 산림파괴형 제초제로 사람에게 노출되면 심한 피부병과 기형아를 출산하게 되는 피해를 입히게 된다. 문제는 화학무기라는 것이다. 살포를 하면 아군과 적군을 가릴 수 없기 때문에 미군을 비롯한 동맹국 군인들도 전쟁이 끝난 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10년이 지나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 환자가 꽤 많았고 심지어는 3대째까지 기형아가 출산되기도 했다. 이렇게 미국은 베트남과의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어렵게 버텨가고 있었다. 그나마 6.25 전쟁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한국과 뉴질랜드 호주 연합군 정도가 전투병을 직접 파병하여 미군과 함께 남베트남을 도왔다.
이때 한국군은 첫 해외 파병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졌기 때문에 각 사단의 우수한 병력만을 선별해 부대를 구성했으며, 8년 5개월 동안 32만 명이라는 많은 병력이 파병됐다. 하지만 역시 전투를 잘 쌓은 것과는 별개로 여러 가지 악조건들 때문에 방어전만 할 수밖에 없었던 미군과 동맹군은 목적 없는 전쟁에 하염없이 전력만 손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베트콩들과의 사투로 지리멸렬한 소모전의 양상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세계 최강 미군의 치밀한 작전으로 베트콩들을 하나하나 박멸시키겠다는 미국의 계획은 무너져버렸다. 그들이 생각한 모든 예상들은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처참히 빗나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군은 그야말로 베트남이라는 늪에 빠져버렸다.
적화통일에 대한 의지가 강력했던 북베트남은 급기야 미국을 무력화시킬 결정적인 한방을 준비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정대공세였다. 적에게 치명적인 공세를 가한 운명의 날을 베트남의 설명절인 구정으로 정했다. 이들이 공격 일자를 설날로 정한 이유는 베트남의 최대 명절로서 이 기간만큼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양측의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도 이 시기는 서로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 또한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쉴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반대로 북베트남은 이런 점을 이용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결전의 날인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과 50만 군의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이들의 군대는 10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을 공격했으며, 기습 공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몇몇 도시는 통제권을 잃기까지 했다.
명절에는 절대 전투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공세 초반에는 큰 타격을 입지만 이내 전회를 정비하고 반격하기 시작한다.
적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 대공세를 펼쳐 승기를 잡겠다던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예상은 빗나갔고, 초반 기습 효과만을 거두었을 뿐 이내 미군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베트콩은 정글에서나 게릴라전으로 미군을 괴롭힐 수 있었지만 도시에서 싸우는 시가전에서는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며칠간의 전투 끝에 베트콩들 남베트남 대부분의 도시에서 소탕됐으며 거의 회복 불가할 정도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실제로 미군은 도시 전체의 80%가 폐허로 변하는 포격을 퍼부었다. 북베트남의 구전공세는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아이러니하게 이 구전공세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북베트남이 비록 전투 자체는 패배했지만, 이 과정에서 베트콩들이 미국 대상안 점령에 성공하는데, 이 장면이 미국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되어 버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트남 전쟁에서 무조건 승리를 확신했던 미국 국민들은 자국의 대사관이 적군에게 그것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동양의 작디작은 나라에 점령당했다는 것을 여과 없이 목격하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전 세계 국민 여론이 뒤바뀌기 시작했고, 아들을 베트남으로 보낸 부모 세대들도 우리 아이들을 먼 타국에서 죽게 할 수 없다며, 미국 전역에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된다.
싸울 의지가 없는 남베트남군을 어떻게든 싸우게 하려던 미군의 상황 수년째 이어지는 지지부진한 양상에 지칠 대로 지친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이밍에 터진 자국의 반전 여론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닉슨은 취임과 동시에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한다. 미군은 1969년부터 철수를 시작하고, 매년 순차적으로 부대를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1973년 1월에 파리에서 강화 협정을 체결한 뒤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과 동맹군이 철수한 뒤 혼자 남은 남베트남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서로 싸움을 그만하고 화해하자는 강화 협정을 체결하긴 했지만, 북베트남은 당연히 보여주기식이었고,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자 드디어 갈았던 이빨을 드러낸다.
미국도 그냥 철수하기에는 너무 마음에 걸렸는지 많은 무기들을 남겨준다. 남베트남이 고작 무기만 있다고 해서 잘 써먹을 리 만무했다. 1975년 3월, 북베트남군은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로 남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결과는 예상대로 4개월 만에 손쉽게 남베트남 전역을 점령했고, 이듬해인 1976년에는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며, 약 19년이라는 길고 길었던 베트남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다.
역사의 한 켠으로 남은 베트남 전쟁은 이후 미국 사회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미국에 있어 베트남 전쟁은 환영받지 못한 전쟁이라는 인식으로 남아있다.
2차 대전은 히틀러라는 강력한 빌런을 상대로 "위기의 세계를 구하자"라는 목적이 있었던 것과 달리 베트남 전쟁은 이렇다 할 확실한 명분이 없었으며, 미국이 굳이 전쟁을 해야 하는 근거도 매우 부족했다. 일각에서는 남의 나라 일에 굳이 오지랖을 부려서 애꿎은 동양 사람들만 죽이고 온 정의롭지 못한 미국으로 비쳤다.
심지어 건국 일에 참여했던 모든 대외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미국이 당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강대국 소련도 아닌 동양의 이름도 못 들어본 작은 나라를 상대로 패배하고 왔으니 국민들은 더욱더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참전용사들에게 돌아갔다. 지구 건너편의 정글에서 목숨 바쳐 싸우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들이 받은 것은 이웃들의 손가락질과 비난뿐이었다. 이 당시 베트남 참전용사들을 비하하는 베이비킬러라는 단어도 있을 정도였다.
미국 정부 또한 경제난에 허덕여 이들을 잘 대우하지 못하고 방치했으며, 이렇게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은 당연히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상당수의 참전용사들이 범죄자가 되거나 노숙자로 전락해버려 한동안 미국의 사회문제로 정의될 정도로 심각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택하게 된다. 미국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은 아픈 손가락이며 처참한 실패의 역사다. 반대로 베트남에 있어서 이 전쟁은 민족을 외세로부터 지켜낸 해방전쟁이며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점으로 이 전쟁을 바라봐야 할까?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국의 힘과 의지 없이 외세의 도움만 받으려는 국가는 결과가 너무나도 처참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베트남은 서구 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북베트남보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었다.
눈앞에 이익 때문에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고, 부정부패의 쾌락에 빠져 결국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이후 남베트남 역시 처절한 피해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남아있던 남베트남 정부 인사들과 군인들, 공무원들은 공산정권의 숙청 아래 무참히 죽어갔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주변국을 떠도는 일명 보트피플이 되어야 했다. 한국전쟁과 매우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됐지만 결과는 극과 극이 되어버린 베트남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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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