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 = 최한성 수습기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1981년 10월 3일 스웨덴 스코네 주 말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이민자였고, 형제가 4명이나 더 있었다.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 때문에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즐라탄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그 시절 즐라탄의 나이는 2살이었다.
즐라탄의 어머니는 혼자 5명을 키워야 하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고 양육방식도 거칠었다. 즐라탄이 잘못하면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나무주걱으로 때리기도 했다. 그로 인해 즐라탄은 집이 아닌 하루종일 운동장에 있고 싶어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도 좋아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축구를 하는 것이 어린 즐라탄에겐 곧 우울함을 달래주는 치료제였다. 발칸지역에서 넘어온 이민자였기 때문에 금발의 스웨덴 소년들이 집시라고 놀렸고, 즐라탄의 큰 코를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다. 즐라탄은 언어장애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축구는 즐라탄에게 해방구였다.
즐라탄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많이 혼났고 반항적이었다. 교실에서 친구를 때려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즐라탄이 태권도 유단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난한 환경에 도둑질까지 했었다. 다른 사람이 선물받은 자전거가 누군가에 의해 없어진 것은 즐라탄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즐라탄은 축구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공 좀 찰 줄 아는 시건방진 아이였다. 1991년 양육권이 아버지에게 넘어가면서 즐라탄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술을 항상 마시고 살았어도 즐라탄에게 손찌검은 하지 않았다. 즐라탄에게 축구선수의 큰 꿈을 심어준 것은 아버지였다.
유스시절 즐라탄은 단돈 한화 2400원만 들고 훈련장과 경기장을 다녀야 했다. 이 돈은 아버지가 아껴서 준 돈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는 즐라탄이 배가 부르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즐라탄은 어린시절 호나우두, 베베토, 호마리우 등 브라질 선수들을 보며 꿈을 키워갔다.
12살 즐라탄에게 아버지는 빅클럽으로 갈 꿈을 키우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축구에 집중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중퇴를 선택한 즐라탄은 1979년 챔피언스리그 준우승팀인 말뫼의 유스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정식으로 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 버렸다.
이후 팀의 주축 선수들이 이적을 했고, 덕분에 즐라탄이 2000년부터 주전으로 활약하게 됐다. 2000-2001 시즌 즐라탄은 26경기에서 12골을 뽑아내며 말뫼의 1부리그 진출에 큰 공헌을 하면서 여러 명문 구단들로부터 관심을 받게됐다. 그 중 아르센 벵거 감독도 즐라탄을 눈여겨 봤다.

(출처= Vector Portal)
이후 즐라탄이 아스날의 9번 유니폼까지 받으며 입단이 확정되는 분위기였으나 말뫼 단장은 "지금 아스날로 가면 앙리, 베르캄프 등 두꺼운 선수층에 밀린다"라고 말하여 만류했다. 결국 즐라탄은 아약스를 선택했고, 스웨덴 리그 역사상 최고 이적료인 100억 원으로 이적했다.
즐라탄은 반 바스텐의 9번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고, 반 바스텐이 코치로 들어와 즐라탄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후 즐라탄은 리그에서 25경기 13골 시즌 총 21골을 몰아치며 AS 로마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반 바스텐은 AS 로마로 이적하려는 즐라탄에게 아직 더 성장해야 한다며 말렸다. 즐라탄은 한 시즌 더 있으면서 2003-2004 시즌 리그 22경기 13골로 연속 10골 이상 득점에 성공했다.

(출처= Vector Portal)
이후 유벤투스가 챔스 우승을 하기 위해 2004년 여름 이적시장 마지막날 즐라탄을 한화 215억 원에 영입했다. 유벤투스에서 즐라탄을 지도했던 사람은 명장 카펠로였다. 카펠로가 즐라탄에게 말랐다고 말하자 벌크업을 통해서 20kg을 늘려 피지컬 괴물로 다시 탄생했다.
즐라탄은 튀랑, 칸나바로 등 뛰어난 수비수들을 상대하는 체계적인 훈련부터 건강한 식단으로 무장했다. 즐라탄은 일취월장했다. 즐라탄은 첫 시즌 리그에서 무려 16골을 넣으며 세리에A 최고 외국인 상을 수상했다. 처음으로 세리에A에서 우승을 하던 날 즐라탄은 트레제게와 함께 술을 잔뜩 마신채 욕조에 누워 잠이 들곤했다.
즐라탄은 다음 2005-2006 시즌에서 부진해 시즌 10골에 그쳤다. 유벤투스가 승부 조작사건으로 2부리그로 강등되면서 즐라탄은 제발 뛰어 달라는 데샹 감독의 간절한 요청에도 출전을 거부했다. 숙소에서 엑스박스를 하며 버티기에 나섰다. 이런 자발적인 행동으로 즐라탄은 유벤투스를 떠나게 됐다.

(출처=Chicot101)
2006년 여름 즐라탄의 AC 밀란행이 제일 유력해 보였지만 AC 밀란의 더비 라이벌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터밀란)로 급선회했다. 즐라탄은 한화 295억 원에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즐라탄은 호나우두의 엄청난 팬이다. 호나우두 잡지를 많이 읽었고, 사진을 붙여 놓기도 했다. 만나서 사진을 같이 찍기도 했다.
당시 인터밀란은 많은 양의 투자에 비해서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크레스포와 즐라탄을 영입하면서 엄청난 공격진을 보유하게 됐다. 이때부터 즐라탄은 완성형 스트라이커로 만들어졌다. 즐라탄은 2006-2007 시즌 리그를 지배하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즐라탄은 리그에서 27경기 15골을 넣었다. 다음 해인 2007-2008 시즌은 17골을 넣으며 자신의 클래스를 입증했다. 챔스 16강 리버풀 전에서 패하며 즐라탄은 아쉽게 유럽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2008년 첼시에서 온 무리뉴 감독은 즐라탄을 보고 제대로 조련만하면 더 성장할 재목이라고 판단했다.
2008-2009 시즌 리그에서 25골로 득점왕을 차지했고, 무리뉴와 함께 인터밀란을 리그 3연패로 이끌었다. 즐라탄은 다시 챔스 무대에서 맨유에게 떨어지자 더 큰 야망을 위해 당시 트레블을 달성했던 바르셀로나에게 매력을 느꼈다. 즐라탄은 바르사 구단주와의 만남에서 이적요청을 했고, 바르사 또한 에투를 트레이드 상품으로 내놓으며 두 팀간의 협의가 이뤄졌다.

(출처=Vector Portal)
2009년 바르셀로나는 한화 1,000억 원으로 즐라탄을 영입했다. 전반기에 즐라탄의 아크로바틱한 골들이 터졌다. 엘 클라시코 전(바르사VS레알)에서 맹활약하며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지만 후반기 침체에 빠졌다. 바르사는 당시 팀 스타일이 패스에 의한 플레이여서 즐라탄은 동떨어지게 됐고, 점점 과르디올라 감독의 눈밖에서 나가게 됐다.

(출처=Flickr)
바르사가 발렌시아에서 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면서 즐라탄의 주전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즐라탄은 2010년 8월 29일 한화 369억 원의 이적료로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2004년 이후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밀란은 즐라탄을 영입하면서 다시 우승레이스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즐라탄은 바르사 시절을 완전히 지운듯한 플레이로 AC 밀란에서 2010-2011 시즌 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즐라탄이 그토록 원하는 챔스에선 토트넘에게 16강에서 패배해 “챔스만 나가면 작아지는 즐라탄”이라고 비난 받았다. 2011-2012 시즌 팀의 주력 공격수인 파투, 호비뉴의 부진을 즐라탄이 메꾸면서 챔스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4-0 대승을 했다.

(출처=Flickr)
즐라탄은 32경기 28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여름 이적시장에서 티아고 실바와 함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다. 즐라탄의 이적료는 2100만 유로다. 파리 생제르맹은 엄청난 자본이 유입되면서 리그 우승권 전력을 갖추게 됐다. 31살의 나이로 파리에 입단한 즐라탄은 다시금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즐라탄은 바르셀로나와의 챔스 8강 1차전에 출전해 1골 1어시를 비롯해 리그 30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파리는 26년 만에 프랑스 리그를 재패했다. 즐라탄은 2013-2014 시즌 돌입하자마자 챔스 32강 안더레흐트전에서 4골을 몰아치며, 호날두와 득점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즐라탄은 2013년 연말 시상식에서 푸스카스상과 월드베스트 11에 선정되어 커리어 첫 국제단체상까지 수상했다. 그동안 리그 내에서 많은 수상들을 싹쓸이 했지만 국제무대와는 인연이 없었다. 즐라탄에게 “드디어 선수생활 말기에 꽃이 피는 게 아니냐”는 팬들의 기대도 있었다.
즐라탄은 2014-2015 시즌은 전 시즌 커리어하이만큼의 폼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즐라탄의 클래스는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부상여파로 초반 출장을 걸렀음에도 복귀 이후에는 리그앙을 지배하며 3개의 컵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챔스는 8강에서 또 무너지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2015-2016 시즌 즐라탄은 파리 생제르맹 역대 최다골 기록을 뛰어넘었다. 시즌 51경기 55골이라는 말도 안되는 득점에 팀은 27경기 무패를 찍었다. 시즌이 끝나면 4년 계약이 끝나 팀을 떠나겠다고 표했고, 즐라탄이 "파리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면 남겠다"라는 발언을 했다.

(출처=Flickr)
즐라탄은 2016년 7월 1일 행선지로 맨유행을 발표했다. 자신의 월드클래스를 만들어 주었던 무리뉴 감독과 다시 만나게 됐고, 팬들의 큰 관심을 일으켰다. 무리뉴가 맨유로 부임되자마자 즐라탄이 무리뉴에게 전화를 걸어 "그래서 언제 가면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결국 즐라탄은 2016년 7월 2일 맨유로 이적했다. 즐라탄은 EPL 개막전에서 중거리슛으로 골을 성공시켰다. 데뷔전 데뷔골이었다. 이로 인해 즐라탄은 챔피언스리그 데뷔전, 세리에A 데뷔전, 라리가 데뷔전, 리그앙 데뷔전, EPL 데뷔전에서 모두 골을 득점하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즐라탄은 무리뉴 감독을 만나 실험적인 전술 운용에 더할 나위 없는 적응력을 보여주며 왜 자신이 베테량인지 증명했다. 무리뉴 감독은 "즐라탄은 득점을 하든지 못하든지간에 팀에 꼭 필요한 선수고, 스스로도 이 팀에 왜 왔는지 알고 있다"며 즐라탄의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즐라탄을 10년 연속 두 자릿수 골을 뽑아내면서 자신의 클래스를 보여주었지만 유로파리그 8강에서 다리가 뒤틀려버리는 큰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다. 너무 큰 무릎인대 부상으로 “이제 은퇴를 앞두게 되나?”라고 언론에서 말했지만 즐라탄은 "다시 돌아온다. 포기는 없다"며 일축했다.
즐라탄은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속도로 회복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약속한 계약기간이 끝났다. 시즌이 끝나고 다들 즐라탄의 다음 이적팀을 궁금해했다. 맨유 입장에서 즐라탄은 이제 35세 노장이었지만 루카쿠의 대형 골잡이 영입외에 꼭 필요한 선수가 즐라탄이었다.
맨유는 즐라탄의 부상치료에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맨유가 즐라탄에게 구애를 하자 결국 8월 24일 1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루니의 이적으로 즐라탄이 등번호 10번을 받았지만 부상 이후 예전만큼의 파괴적인 모습이 사라졌다. 시즌이 끝나고 즐라탄은 이전부터 생각해둔 미국무대로 자리를 올기게 됐다.

(출처=Attribution-Sharealike 2.0 Germany)
즐라탄은 연봉이 90%나 줄은 16억 원에 LA갤럭시로 옮겨 데뷔전에서 또 한 번 데뷔골을 작렬시킨다. 즐라탄은 시즌 27경기 22골 10도움을 기록해 메이저리그 사커 신인왕에 올랐다. 37살에 믿을 수 없는 기록이었다. 2019년 즐라탄은 30골 고지에 올랐다. 카를로스 벨라가 마지막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해 득점 2위로 밀렸지만 모든 이들은 도전하는 즐라탄에게 경외의 박수를 보냈다.

(출처=Wikimedia Commons)
즐라탄의 계약이 종료된 후, 여러팀들이 콜을 보냈다. 즐라탄의 최종 선택은 AC 밀란 복귀였다. 결국 즐라탄은 2019년 12월 27일 AC 밀란 이적이 성사되었다고 공식 발표됐다. 계약기간은 2019-2020 시즌 종료까지며, 1년 연장 옵션이 포함됐다. 이후 1월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면서 곧바로 입단했다. 등번호는 21번을 받았다.
즐라탄은 AC 밀란에 2022-2023 시즌까지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AC 밀란을 정상에 올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후 즐라탄은 나이가 많이 들어 선수생활이 무리라 생각해 결국 2023년 6월 4일, 현역 은퇴 선언을 했다. 38라운드 엘라스 베로나와의 홈경기가 끝난 후 즐라탄은 AC 밀란 팬들 앞에서 은퇴식을 했다. 즐라탄은 "AC 밀란, 실컷 야유하라!"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눈물을 참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사자'라 불린 사나이 즐라탄은 유스 시절 많은 고난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어른이 되어 수비수들이 무서워할 만큼의 실력을 보여줬다. 잔부상이 많았지만 빠르게 회복했고, 42살까지 축구를 했다.

(출처=DeviantArt)
저작권자 © 밸류체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밸류체인타임스 = 최한성 수습기자]
[밸류체인타임스 = 최한성 수습기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1981년 10월 3일 스웨덴 스코네 주 말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이민자였고, 형제가 4명이나 더 있었다.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 때문에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즐라탄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그 시절 즐라탄의 나이는 2살이었다.
즐라탄의 어머니는 혼자 5명을 키워야 하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고 양육방식도 거칠었다. 즐라탄이 잘못하면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나무주걱으로 때리기도 했다. 그로 인해 즐라탄은 집이 아닌 하루종일 운동장에 있고 싶어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도 좋아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축구를 하는 것이 어린 즐라탄에겐 곧 우울함을 달래주는 치료제였다. 발칸지역에서 넘어온 이민자였기 때문에 금발의 스웨덴 소년들이 집시라고 놀렸고, 즐라탄의 큰 코를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다. 즐라탄은 언어장애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축구는 즐라탄에게 해방구였다.
즐라탄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많이 혼났고 반항적이었다. 교실에서 친구를 때려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즐라탄이 태권도 유단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난한 환경에 도둑질까지 했었다. 다른 사람이 선물받은 자전거가 누군가에 의해 없어진 것은 즐라탄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즐라탄은 축구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공 좀 찰 줄 아는 시건방진 아이였다. 1991년 양육권이 아버지에게 넘어가면서 즐라탄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술을 항상 마시고 살았어도 즐라탄에게 손찌검은 하지 않았다. 즐라탄에게 축구선수의 큰 꿈을 심어준 것은 아버지였다.
유스시절 즐라탄은 단돈 한화 2400원만 들고 훈련장과 경기장을 다녀야 했다. 이 돈은 아버지가 아껴서 준 돈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는 즐라탄이 배가 부르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즐라탄은 어린시절 호나우두, 베베토, 호마리우 등 브라질 선수들을 보며 꿈을 키워갔다.
12살 즐라탄에게 아버지는 빅클럽으로 갈 꿈을 키우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축구에 집중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중퇴를 선택한 즐라탄은 1979년 챔피언스리그 준우승팀인 말뫼의 유스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정식으로 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 버렸다.
이후 팀의 주축 선수들이 이적을 했고, 덕분에 즐라탄이 2000년부터 주전으로 활약하게 됐다. 2000-2001 시즌 즐라탄은 26경기에서 12골을 뽑아내며 말뫼의 1부리그 진출에 큰 공헌을 하면서 여러 명문 구단들로부터 관심을 받게됐다. 그 중 아르센 벵거 감독도 즐라탄을 눈여겨 봤다.
(출처= Vector Portal)
이후 즐라탄이 아스날의 9번 유니폼까지 받으며 입단이 확정되는 분위기였으나 말뫼 단장은 "지금 아스날로 가면 앙리, 베르캄프 등 두꺼운 선수층에 밀린다"라고 말하여 만류했다. 결국 즐라탄은 아약스를 선택했고, 스웨덴 리그 역사상 최고 이적료인 100억 원으로 이적했다.
즐라탄은 반 바스텐의 9번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고, 반 바스텐이 코치로 들어와 즐라탄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후 즐라탄은 리그에서 25경기 13골 시즌 총 21골을 몰아치며 AS 로마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반 바스텐은 AS 로마로 이적하려는 즐라탄에게 아직 더 성장해야 한다며 말렸다. 즐라탄은 한 시즌 더 있으면서 2003-2004 시즌 리그 22경기 13골로 연속 10골 이상 득점에 성공했다.
(출처= Vector Portal)
이후 유벤투스가 챔스 우승을 하기 위해 2004년 여름 이적시장 마지막날 즐라탄을 한화 215억 원에 영입했다. 유벤투스에서 즐라탄을 지도했던 사람은 명장 카펠로였다. 카펠로가 즐라탄에게 말랐다고 말하자 벌크업을 통해서 20kg을 늘려 피지컬 괴물로 다시 탄생했다.
즐라탄은 튀랑, 칸나바로 등 뛰어난 수비수들을 상대하는 체계적인 훈련부터 건강한 식단으로 무장했다. 즐라탄은 일취월장했다. 즐라탄은 첫 시즌 리그에서 무려 16골을 넣으며 세리에A 최고 외국인 상을 수상했다. 처음으로 세리에A에서 우승을 하던 날 즐라탄은 트레제게와 함께 술을 잔뜩 마신채 욕조에 누워 잠이 들곤했다.
즐라탄은 다음 2005-2006 시즌에서 부진해 시즌 10골에 그쳤다. 유벤투스가 승부 조작사건으로 2부리그로 강등되면서 즐라탄은 제발 뛰어 달라는 데샹 감독의 간절한 요청에도 출전을 거부했다. 숙소에서 엑스박스를 하며 버티기에 나섰다. 이런 자발적인 행동으로 즐라탄은 유벤투스를 떠나게 됐다.
(출처=Chicot101)
2006년 여름 즐라탄의 AC 밀란행이 제일 유력해 보였지만 AC 밀란의 더비 라이벌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터밀란)로 급선회했다. 즐라탄은 한화 295억 원에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즐라탄은 호나우두의 엄청난 팬이다. 호나우두 잡지를 많이 읽었고, 사진을 붙여 놓기도 했다. 만나서 사진을 같이 찍기도 했다.
당시 인터밀란은 많은 양의 투자에 비해서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크레스포와 즐라탄을 영입하면서 엄청난 공격진을 보유하게 됐다. 이때부터 즐라탄은 완성형 스트라이커로 만들어졌다. 즐라탄은 2006-2007 시즌 리그를 지배하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즐라탄은 리그에서 27경기 15골을 넣었다. 다음 해인 2007-2008 시즌은 17골을 넣으며 자신의 클래스를 입증했다. 챔스 16강 리버풀 전에서 패하며 즐라탄은 아쉽게 유럽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2008년 첼시에서 온 무리뉴 감독은 즐라탄을 보고 제대로 조련만하면 더 성장할 재목이라고 판단했다.
2008-2009 시즌 리그에서 25골로 득점왕을 차지했고, 무리뉴와 함께 인터밀란을 리그 3연패로 이끌었다. 즐라탄은 다시 챔스 무대에서 맨유에게 떨어지자 더 큰 야망을 위해 당시 트레블을 달성했던 바르셀로나에게 매력을 느꼈다. 즐라탄은 바르사 구단주와의 만남에서 이적요청을 했고, 바르사 또한 에투를 트레이드 상품으로 내놓으며 두 팀간의 협의가 이뤄졌다.
(출처=Vector Portal)
2009년 바르셀로나는 한화 1,000억 원으로 즐라탄을 영입했다. 전반기에 즐라탄의 아크로바틱한 골들이 터졌다. 엘 클라시코 전(바르사VS레알)에서 맹활약하며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지만 후반기 침체에 빠졌다. 바르사는 당시 팀 스타일이 패스에 의한 플레이여서 즐라탄은 동떨어지게 됐고, 점점 과르디올라 감독의 눈밖에서 나가게 됐다.
(출처=Flickr)
바르사가 발렌시아에서 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면서 즐라탄의 주전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즐라탄은 2010년 8월 29일 한화 369억 원의 이적료로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2004년 이후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밀란은 즐라탄을 영입하면서 다시 우승레이스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즐라탄은 바르사 시절을 완전히 지운듯한 플레이로 AC 밀란에서 2010-2011 시즌 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즐라탄이 그토록 원하는 챔스에선 토트넘에게 16강에서 패배해 “챔스만 나가면 작아지는 즐라탄”이라고 비난 받았다. 2011-2012 시즌 팀의 주력 공격수인 파투, 호비뉴의 부진을 즐라탄이 메꾸면서 챔스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4-0 대승을 했다.
(출처=Flickr)
즐라탄은 32경기 28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여름 이적시장에서 티아고 실바와 함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다. 즐라탄의 이적료는 2100만 유로다. 파리 생제르맹은 엄청난 자본이 유입되면서 리그 우승권 전력을 갖추게 됐다. 31살의 나이로 파리에 입단한 즐라탄은 다시금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즐라탄은 바르셀로나와의 챔스 8강 1차전에 출전해 1골 1어시를 비롯해 리그 30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파리는 26년 만에 프랑스 리그를 재패했다. 즐라탄은 2013-2014 시즌 돌입하자마자 챔스 32강 안더레흐트전에서 4골을 몰아치며, 호날두와 득점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즐라탄은 2013년 연말 시상식에서 푸스카스상과 월드베스트 11에 선정되어 커리어 첫 국제단체상까지 수상했다. 그동안 리그 내에서 많은 수상들을 싹쓸이 했지만 국제무대와는 인연이 없었다. 즐라탄에게 “드디어 선수생활 말기에 꽃이 피는 게 아니냐”는 팬들의 기대도 있었다.
즐라탄은 2014-2015 시즌은 전 시즌 커리어하이만큼의 폼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즐라탄의 클래스는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부상여파로 초반 출장을 걸렀음에도 복귀 이후에는 리그앙을 지배하며 3개의 컵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챔스는 8강에서 또 무너지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2015-2016 시즌 즐라탄은 파리 생제르맹 역대 최다골 기록을 뛰어넘었다. 시즌 51경기 55골이라는 말도 안되는 득점에 팀은 27경기 무패를 찍었다. 시즌이 끝나면 4년 계약이 끝나 팀을 떠나겠다고 표했고, 즐라탄이 "파리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면 남겠다"라는 발언을 했다.
(출처=Flickr)
즐라탄은 2016년 7월 1일 행선지로 맨유행을 발표했다. 자신의 월드클래스를 만들어 주었던 무리뉴 감독과 다시 만나게 됐고, 팬들의 큰 관심을 일으켰다. 무리뉴가 맨유로 부임되자마자 즐라탄이 무리뉴에게 전화를 걸어 "그래서 언제 가면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결국 즐라탄은 2016년 7월 2일 맨유로 이적했다. 즐라탄은 EPL 개막전에서 중거리슛으로 골을 성공시켰다. 데뷔전 데뷔골이었다. 이로 인해 즐라탄은 챔피언스리그 데뷔전, 세리에A 데뷔전, 라리가 데뷔전, 리그앙 데뷔전, EPL 데뷔전에서 모두 골을 득점하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즐라탄은 무리뉴 감독을 만나 실험적인 전술 운용에 더할 나위 없는 적응력을 보여주며 왜 자신이 베테량인지 증명했다. 무리뉴 감독은 "즐라탄은 득점을 하든지 못하든지간에 팀에 꼭 필요한 선수고, 스스로도 이 팀에 왜 왔는지 알고 있다"며 즐라탄의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즐라탄을 10년 연속 두 자릿수 골을 뽑아내면서 자신의 클래스를 보여주었지만 유로파리그 8강에서 다리가 뒤틀려버리는 큰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다. 너무 큰 무릎인대 부상으로 “이제 은퇴를 앞두게 되나?”라고 언론에서 말했지만 즐라탄은 "다시 돌아온다. 포기는 없다"며 일축했다.
즐라탄은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속도로 회복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약속한 계약기간이 끝났다. 시즌이 끝나고 다들 즐라탄의 다음 이적팀을 궁금해했다. 맨유 입장에서 즐라탄은 이제 35세 노장이었지만 루카쿠의 대형 골잡이 영입외에 꼭 필요한 선수가 즐라탄이었다.
맨유는 즐라탄의 부상치료에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맨유가 즐라탄에게 구애를 하자 결국 8월 24일 1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루니의 이적으로 즐라탄이 등번호 10번을 받았지만 부상 이후 예전만큼의 파괴적인 모습이 사라졌다. 시즌이 끝나고 즐라탄은 이전부터 생각해둔 미국무대로 자리를 올기게 됐다.
(출처=Attribution-Sharealike 2.0 Germany)
즐라탄은 연봉이 90%나 줄은 16억 원에 LA갤럭시로 옮겨 데뷔전에서 또 한 번 데뷔골을 작렬시킨다. 즐라탄은 시즌 27경기 22골 10도움을 기록해 메이저리그 사커 신인왕에 올랐다. 37살에 믿을 수 없는 기록이었다. 2019년 즐라탄은 30골 고지에 올랐다. 카를로스 벨라가 마지막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해 득점 2위로 밀렸지만 모든 이들은 도전하는 즐라탄에게 경외의 박수를 보냈다.
(출처=Wikimedia Commons)
즐라탄의 계약이 종료된 후, 여러팀들이 콜을 보냈다. 즐라탄의 최종 선택은 AC 밀란 복귀였다. 결국 즐라탄은 2019년 12월 27일 AC 밀란 이적이 성사되었다고 공식 발표됐다. 계약기간은 2019-2020 시즌 종료까지며, 1년 연장 옵션이 포함됐다. 이후 1월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면서 곧바로 입단했다. 등번호는 21번을 받았다.
즐라탄은 AC 밀란에 2022-2023 시즌까지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AC 밀란을 정상에 올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후 즐라탄은 나이가 많이 들어 선수생활이 무리라 생각해 결국 2023년 6월 4일, 현역 은퇴 선언을 했다. 38라운드 엘라스 베로나와의 홈경기가 끝난 후 즐라탄은 AC 밀란 팬들 앞에서 은퇴식을 했다. 즐라탄은 "AC 밀란, 실컷 야유하라!"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눈물을 참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사자'라 불린 사나이 즐라탄은 유스 시절 많은 고난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어른이 되어 수비수들이 무서워할 만큼의 실력을 보여줬다. 잔부상이 많았지만 빠르게 회복했고, 42살까지 축구를 했다.
(출처=DeviantArt)
저작권자 © 밸류체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밸류체인타임스 = 최한성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