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 1973년 9월 13일, 이탈리아의 지역 나폴리에서 칸나바로가 태어났다. 그는 8살 때부터 축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칸나바로는 나폴리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유스팀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입단 3년 만에 주니어 챔피언십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칸나바로의 롤 모델은 나폴리 성인군에서 뛰고 있는 ‘치로 페라라’였다.
치로 페라라는 나폴리에서 태어나 나폴리에서만 14년을 뛴 레전드 선수다. 그는 나폴리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로 인해 칸나바로도 치로 페라라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영감을 받았다. 칸나바로가 주목받기 시작한 나이는 16세 때부터다. 그는 성인팀 연습경기에 참가하게 됐다.
칸나바로는 나폴리를 구원한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하게 됐다. 당시 마라도나는 자신을 악착같이 마크하는 칸나바로를 보고선 "칸나바로는 틀림없이 나폴리와 아주리의 기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93년 칸나바로가 20살이 되었을 때 세리에A 프로무대를 밟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하지만 당시 나폴리는 마라도나가 떠나면서 팀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당시 칸나바로는 176cm로 센터백을 하기엔 무리였다. 어린 시절 칸나바로는 AC밀란에서 뛸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칸나바로가 키가 작다며 영입을 거절했다.
이후 칸나바로는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유스팀 코치에 의해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전향했다. 칸나바로는 다른 센터백과 비교되지 않도록 슬라이딩 태클을 잘했다. 칸나바로는 키가 큰 스트라이커를 상대하기 위해 공중볼 경합 상황을 미리 예측한 후 볼을 처리했다.
칸나바로는 폭발적인 점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날이 밝았던 칸나바로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나폴리가 재정난에 빠지면서 팀은 칸나바로를 이적시장에 내놓았다. 칸나바로는 나폴리에서 떠날 수 없다며 통곡했지만 설득에 의해서 팀을 떠나 1995년 파르마로 이적했다.
출처:Wikimedia Commons
파르마에서 칸나바로는 부폰과 릴리앙 튀랑을 만나게 되었다. 이로써 이 3명의 플레이어는 세리에A 최고의 수비진으로 뽑혔다. 하지만 국민들이 칸나바로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98년도 월드컵이었다. 당시 말디니 감독은 네스타와 칸나바로를 팀 수비 핵심으로 내세웠다.
1998/99 시즌 파르마는 마르세유를 3대0으로 완패시키며 UEFA컵을 우승했다. 또한 이탈리안컵과 이탈리안 슈퍼컵도 차지하며 3관왕을 달성했다. 하지만 파르마는 크레스포, 베론, 튀랑, 부폰 등이 팀을 떠나자 세리에B로 강등을 염려해야 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칸나바로는 수비에 최선을 다해 팀의 강등을 막아냈다. 이후 시즌이 끝난 뒤 칸나바로는 큰 꿈을 위해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칸나바로는 인터밀란 이적 후 과거 나폴리, 파르마 시절보다 실력이 뒤처졌고 사람들은 기량이 하락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출처:Flickr
이후 2년 뒤 유벤투스로 떠났지만 팀은 승부조작으로 논란에 휩쓸렸고,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2006년 월드컵 이탈리아는 조별리그 3차전 팀의 핵심 네스타가 부상으로 빠지며 네스타는 마테라치와 교체됐다. 칸나바로와 마테라치는 엄청난 콤보를 보여주며 영혼의 듀오로 세계 최강의 팀을 박살 내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올려놓았다.
이렇게 단단한 수비력으로 이탈리아는 6경기 1실점만 내줬다. 그것도 상대가 넣은 득점이 아닌 자책골이다. 하지만 팀의 일원들이 계속해서 부상을 당해 팀이 어수선했다. 하지만 칸나바로의 리더십, 기량은 계속해서 최고였다. 당시 우승후보인 독일을 상대로 무득점으로 승리했다.
결승에서 프랑스 상대로 결정적인 활약까지 더해지며 승부차기 끝에 칸나바로는 이탈리아를 우승시킴과 동시에 21세기 수비수로 최초의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월드컵 이후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했고, 갈락티코 일원으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점점 기량이 하락했고, 2009/2010 시즌 다시 유벤투스로 이적 후 1년 만에 2010년 사우디 클럽 알 아흘리로 이적했다.
출처:Flicker
칸나바로는 수비 차원에서 진정한 수비였다. 그는 좋은 유망주가 될 수 있었지만 팀의 승부조작 논란 등으로 인해 운이 좋지 않아 화려한 커리어를 남기지 못했다. 축구에서 찬사를 받는 것은 스트라이커가 대부분이지만 칸나바로가 이를 뒤집었다. 2006년에는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붙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며, 최고의 수비수로 뽑혔다. 이후 그는 21세기 수비수 최초 발롱도르 수상 기록까지 남겼으며, 2011년 은퇴를 선언했고, 축구인생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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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
[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 1973년 9월 13일, 이탈리아의 지역 나폴리에서 칸나바로가 태어났다. 그는 8살 때부터 축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칸나바로는 나폴리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유스팀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입단 3년 만에 주니어 챔피언십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칸나바로의 롤 모델은 나폴리 성인군에서 뛰고 있는 ‘치로 페라라’였다.
치로 페라라는 나폴리에서 태어나 나폴리에서만 14년을 뛴 레전드 선수다. 그는 나폴리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로 인해 칸나바로도 치로 페라라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영감을 받았다. 칸나바로가 주목받기 시작한 나이는 16세 때부터다. 그는 성인팀 연습경기에 참가하게 됐다.
칸나바로는 나폴리를 구원한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하게 됐다. 당시 마라도나는 자신을 악착같이 마크하는 칸나바로를 보고선 "칸나바로는 틀림없이 나폴리와 아주리의 기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93년 칸나바로가 20살이 되었을 때 세리에A 프로무대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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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나폴리는 마라도나가 떠나면서 팀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당시 칸나바로는 176cm로 센터백을 하기엔 무리였다. 어린 시절 칸나바로는 AC밀란에서 뛸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칸나바로가 키가 작다며 영입을 거절했다.
이후 칸나바로는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유스팀 코치에 의해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전향했다. 칸나바로는 다른 센터백과 비교되지 않도록 슬라이딩 태클을 잘했다. 칸나바로는 키가 큰 스트라이커를 상대하기 위해 공중볼 경합 상황을 미리 예측한 후 볼을 처리했다.
칸나바로는 폭발적인 점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날이 밝았던 칸나바로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나폴리가 재정난에 빠지면서 팀은 칸나바로를 이적시장에 내놓았다. 칸나바로는 나폴리에서 떠날 수 없다며 통곡했지만 설득에 의해서 팀을 떠나 1995년 파르마로 이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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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에서 칸나바로는 부폰과 릴리앙 튀랑을 만나게 되었다. 이로써 이 3명의 플레이어는 세리에A 최고의 수비진으로 뽑혔다. 하지만 국민들이 칸나바로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98년도 월드컵이었다. 당시 말디니 감독은 네스타와 칸나바로를 팀 수비 핵심으로 내세웠다.
1998/99 시즌 파르마는 마르세유를 3대0으로 완패시키며 UEFA컵을 우승했다. 또한 이탈리안컵과 이탈리안 슈퍼컵도 차지하며 3관왕을 달성했다. 하지만 파르마는 크레스포, 베론, 튀랑, 부폰 등이 팀을 떠나자 세리에B로 강등을 염려해야 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칸나바로는 수비에 최선을 다해 팀의 강등을 막아냈다. 이후 시즌이 끝난 뒤 칸나바로는 큰 꿈을 위해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칸나바로는 인터밀란 이적 후 과거 나폴리, 파르마 시절보다 실력이 뒤처졌고 사람들은 기량이 하락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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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년 뒤 유벤투스로 떠났지만 팀은 승부조작으로 논란에 휩쓸렸고,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2006년 월드컵 이탈리아는 조별리그 3차전 팀의 핵심 네스타가 부상으로 빠지며 네스타는 마테라치와 교체됐다. 칸나바로와 마테라치는 엄청난 콤보를 보여주며 영혼의 듀오로 세계 최강의 팀을 박살 내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올려놓았다.
이렇게 단단한 수비력으로 이탈리아는 6경기 1실점만 내줬다. 그것도 상대가 넣은 득점이 아닌 자책골이다. 하지만 팀의 일원들이 계속해서 부상을 당해 팀이 어수선했다. 하지만 칸나바로의 리더십, 기량은 계속해서 최고였다. 당시 우승후보인 독일을 상대로 무득점으로 승리했다.
결승에서 프랑스 상대로 결정적인 활약까지 더해지며 승부차기 끝에 칸나바로는 이탈리아를 우승시킴과 동시에 21세기 수비수로 최초의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월드컵 이후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했고, 갈락티코 일원으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점점 기량이 하락했고, 2009/2010 시즌 다시 유벤투스로 이적 후 1년 만에 2010년 사우디 클럽 알 아흘리로 이적했다.
출처:Flicker
칸나바로는 수비 차원에서 진정한 수비였다. 그는 좋은 유망주가 될 수 있었지만 팀의 승부조작 논란 등으로 인해 운이 좋지 않아 화려한 커리어를 남기지 못했다. 축구에서 찬사를 받는 것은 스트라이커가 대부분이지만 칸나바로가 이를 뒤집었다. 2006년에는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붙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며, 최고의 수비수로 뽑혔다. 이후 그는 21세기 수비수 최초 발롱도르 수상 기록까지 남겼으며, 2011년 은퇴를 선언했고, 축구인생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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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