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김시원 수습기자] 1929년 모스크바에서 야신이 태어났다. 야신은 풍족한 삶을 살아오진 못했지만 흔한 가정에서 자랐다. 야신이 12살이 되었을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1년 히틀러의 나치는 소련을 침공했고, 야신의 일상은 파괴됐다. 그렇게 야신의 가족들은 모스크바를 떠나게 됐다.
출처:Pxhere
원래 살던 곳으로부터 800km나 떨어진 곳에서 야신은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제대로 된 시설, 음식 등이 없어 항상 추위와 배고픔을 느꼈다. 야신은 매일 공장에서 하루 종일 총알을 만들며 살아왔다. 야신은 그곳에서 축구를 처음 접했다.
야신은 항상 축구를 할 때면 추위와 굶주림을 잊었다. 야신은 3년 동안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던 어느 날 나치가 후퇴를 하며 전쟁은 끝을 맺었다. 야신의 가족들은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하지만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건물들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 후 남녀노소 나이 상관없이 일을 해야만 했고, 야신 역시 18살에 공장에서 일을 했다. 야신은 과로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려 공장에서 일하지 않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다. 고달픈 일과를 마치고 야신은 항상 몇 시간 동안 골키퍼 연습을 하며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생활을 오간 중에 야신은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야신이 19살이 되었을 때 러시아 명문 디나모 모스크바의 코치가 육군팀에서 활약을 하고 있던 야신을 보게 됐다. 그 후 야신은 청소년팀에 입단하게 됐다. 하지만 프로 데뷔는 힘들었다.
야신은 좋은 유망주로 꼽히긴 했으나 항상 후보였다. 당시 클럽에는 알렉세이 호미치라는 주전의 골키퍼가 있었기 때문에 야신은 선발에 있기 힘들었다. 하지만 야신은 끝까지 자신의 팀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미치가 경기를 할 때면 야신은 호미치의 동작을 따라 했고, 항상 호미치를 따라다니며 경험과 노하우를 배우고자 했다.
그렇게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야신을 본 호미치는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며 야신의 멘토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미치가 경기를 뛰고 있던 중 부상을 당해 야신의 첫 데뷔전이 성사됐다. 하지만 야신은 크게 긴장한 탓인지 동료 수비수와 사인이 맞지 않아 바로 실점을 해버렸다.
야신은 이 일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졌고, 심지어 야신의 가족들은 “야신 너는 쓸모가 없구나”라며 야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야신은 데뷔 전 이후 2년 동안 경기를 뛰지 못했다. 코치는 야신에게 다른 종목의 스포츠를 할 것을 권유했다. 바로 아이스하키였다.
출처: Fanny Schertzer
야신은 처음에 하키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키를 해야만 했다. 야신은 하키의 팀에서 골키퍼를 맡게 되었고, 이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어릴 적 고향의 환경에서 많이 해오던 탓인지 하키 팀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고, 하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그 후 야신은 소련 아이스하키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그 소식을 들은 감독은 야신에게 찾아와 다시 한번 축구를 해보는 게 어떠냐며 제안을 했고, 야신은 또다시 축구로 복귀하게 됐다. 야신이 팀으로 복귀했을 때 호미치는 이미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됐고, 야신에게 조언을 해주며 응원을 해주었다.
야신은 팀에 주전 골키퍼를 맡게 됐고, 야신은 9경기 무실점을 기록했고 엄청난 선방쇼를 보여주게 됐다. 야신이 한 시즌에 실점한 기록은 단 20골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공을 던져 역습을 시작하는 것도 야신이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야신은 소련 전 지역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검은 거미라고 불렀다. 야신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다. 하지만 올림픽은 야신이 경험했던 대회와는 전혀 달랐다. 올림픽은 각 나라가 모여 하는 경쟁이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사이가 갈라진 나라도 있었다.
그렇게 소련의 라이벌 미국과는 경쟁이 심했고 야신이 뛰는 축구팀에는 경찰들이 선수들을 감시했다. 심지어 경기 때마다 도청을 하며 선수와 감독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4년 전 열린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에게 패배를 하자 그걸 본 스탈린이 그 축구팀을 해체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출처:Pxhere
그렇게 소련은 매경기마다 죽을 듯이 뛰었고 결승에 진출하게 됐다. 결승전에서는 4년 전 패배를 당했던 유고슬라비아를 만났고, 선수들은 열심히 경기에 임해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축구에 승리를 맛본 소련 지도부는 본격적으로 축구를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소련 축구 대표팀이 서방 국가들의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그들의 승리가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소련은 그동안 금지됐던 국제 대회를 허용했고 1957 붉은 군대의 역사가 시작됐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야신은 리그, 올림픽에서 활약을 했고, 붉은 군대의 핵심 선수로 거듭났다. 소련 대표팀은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며 그들의 일탈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야신의 동료 스트렐초프는 17살에 득점왕을 차지해 소련 축구를 책임질 천재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생활로 인해 소련지도부는 굴라크라는 악명 높은 수용소에 7년 동안 가두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1960 유로 대회가 열렸다. 소련은 1960유로에 진출하게 되었고 소련은 결승전에 진출하여 우승하며 또다시 최고임을 알렸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의 우승 주역은 야신이었다.
야신은 엄청난 반사 신경으로 결승 상대의 슛을 다 막아버렸고, 자신이 유럽 최고의 골키퍼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소련이 넘지 못하는 산이 있었다. 바로 월드컵이었다. 소련은 1958월드컵에서 쓰라린 맛을 봤지만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해 자신감이 넘쳐났다.
1962 월드컵이 시작됐다. 하지만 야신은 월드컵에서 최악의 실수들을 보여줬다. 콜롬비아의 경기장에서 야신은 무려 3골을 실점해 주며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8강전으로 향했다. 야신의 실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출처:Wikipedia
칠레와의 8강전 야신이면 막았을 골이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그 골이 소련을 탈락으로 몰았다. 그렇게 야신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대회로 남게 됐다. 그 후 언론과 기사에서는 패배의 원인 야신이라며 야신을 지목했고 야신을 비난했다.
그 후 야신은 경기장에서 야유를 받았고 심지어 야신의 집에 돌멩이가 날라와 창문을 깼고, 야신은 멘탈이 산산조각이 나며 은퇴까지 생각했다. 야신은 "칠레 월드컵이 끝나고 고통스러운 기분만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야신은 자신의 취미인 낚시를 했고 어릴 적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었다.
하지만 야신은 ‘어릴 적 더 힘들었고 축구를 하며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야신은 1963년 전성기의 야신이 부활했다. 야신은 리그 27경기 동안 단 6골만 허용하는 엄청난 선방을 보여줬다.
그렇게 야신은 팀에게 리그우승컵을 들게 해주었다. 야신은 한 시즌만에 팬들의 여론까지 뒤집어버린 야신은 또다시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 후 골키퍼의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거듭났다.
출처:Flickr
하지만 대표팀에서는 불운이 따랐다 야신은 항상 엄청난 선방을 보여줬지만 승리를 하지 못했다. 1964유로에선 준우승을 했고,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끌었지만 서독에게 패배하며 야신은 억울한 상황에 처했다.
야신은 1970년 은퇴를 결심했다. 그 후 야신이 떠난 소련의 팀은 성적이 좋지 않았다. 1970년 이후 본선조차 진출하지 못했다. 그 이후 월드컵, 유로에서 대회 트로피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소련의 축구는 점점 잠겨만 갔다. 야신은 은퇴 이후 코치로 활동했고, 1990년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야신은 러시아 전역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다. 러시아의 아이들은 모두 “야신이 되고 싶어 한다”라며 모자와 검은 옷을 입고 골키퍼를 자처했다. 야신은 어릴 적 힘들고 좋지 않은 환경에도 노력을 하며 결국 최고의 골키퍼가 되었고, 골키퍼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일도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야신은 골키퍼에 대한 엄청난 임팩트를 남겨주었다.
저작권자 © 밸류체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
[밸류체인타임스=김시원 수습기자] 1929년 모스크바에서 야신이 태어났다. 야신은 풍족한 삶을 살아오진 못했지만 흔한 가정에서 자랐다. 야신이 12살이 되었을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1년 히틀러의 나치는 소련을 침공했고, 야신의 일상은 파괴됐다. 그렇게 야신의 가족들은 모스크바를 떠나게 됐다.
출처:Pxhere
원래 살던 곳으로부터 800km나 떨어진 곳에서 야신은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제대로 된 시설, 음식 등이 없어 항상 추위와 배고픔을 느꼈다. 야신은 매일 공장에서 하루 종일 총알을 만들며 살아왔다. 야신은 그곳에서 축구를 처음 접했다.
야신은 항상 축구를 할 때면 추위와 굶주림을 잊었다. 야신은 3년 동안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던 어느 날 나치가 후퇴를 하며 전쟁은 끝을 맺었다. 야신의 가족들은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하지만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건물들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 후 남녀노소 나이 상관없이 일을 해야만 했고, 야신 역시 18살에 공장에서 일을 했다. 야신은 과로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려 공장에서 일하지 않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다. 고달픈 일과를 마치고 야신은 항상 몇 시간 동안 골키퍼 연습을 하며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생활을 오간 중에 야신은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야신이 19살이 되었을 때 러시아 명문 디나모 모스크바의 코치가 육군팀에서 활약을 하고 있던 야신을 보게 됐다. 그 후 야신은 청소년팀에 입단하게 됐다. 하지만 프로 데뷔는 힘들었다.
야신은 좋은 유망주로 꼽히긴 했으나 항상 후보였다. 당시 클럽에는 알렉세이 호미치라는 주전의 골키퍼가 있었기 때문에 야신은 선발에 있기 힘들었다. 하지만 야신은 끝까지 자신의 팀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미치가 경기를 할 때면 야신은 호미치의 동작을 따라 했고, 항상 호미치를 따라다니며 경험과 노하우를 배우고자 했다.
그렇게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야신을 본 호미치는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며 야신의 멘토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미치가 경기를 뛰고 있던 중 부상을 당해 야신의 첫 데뷔전이 성사됐다. 하지만 야신은 크게 긴장한 탓인지 동료 수비수와 사인이 맞지 않아 바로 실점을 해버렸다.
야신은 이 일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졌고, 심지어 야신의 가족들은 “야신 너는 쓸모가 없구나”라며 야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야신은 데뷔 전 이후 2년 동안 경기를 뛰지 못했다. 코치는 야신에게 다른 종목의 스포츠를 할 것을 권유했다. 바로 아이스하키였다.
출처: Fanny Schertzer
야신은 처음에 하키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키를 해야만 했다. 야신은 하키의 팀에서 골키퍼를 맡게 되었고, 이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어릴 적 고향의 환경에서 많이 해오던 탓인지 하키 팀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고, 하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그 후 야신은 소련 아이스하키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그 소식을 들은 감독은 야신에게 찾아와 다시 한번 축구를 해보는 게 어떠냐며 제안을 했고, 야신은 또다시 축구로 복귀하게 됐다. 야신이 팀으로 복귀했을 때 호미치는 이미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됐고, 야신에게 조언을 해주며 응원을 해주었다.
야신은 팀에 주전 골키퍼를 맡게 됐고, 야신은 9경기 무실점을 기록했고 엄청난 선방쇼를 보여주게 됐다. 야신이 한 시즌에 실점한 기록은 단 20골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공을 던져 역습을 시작하는 것도 야신이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야신은 소련 전 지역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검은 거미라고 불렀다. 야신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다. 하지만 올림픽은 야신이 경험했던 대회와는 전혀 달랐다. 올림픽은 각 나라가 모여 하는 경쟁이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사이가 갈라진 나라도 있었다.
그렇게 소련의 라이벌 미국과는 경쟁이 심했고 야신이 뛰는 축구팀에는 경찰들이 선수들을 감시했다. 심지어 경기 때마다 도청을 하며 선수와 감독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4년 전 열린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에게 패배를 하자 그걸 본 스탈린이 그 축구팀을 해체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출처:Pxhere
그렇게 소련은 매경기마다 죽을 듯이 뛰었고 결승에 진출하게 됐다. 결승전에서는 4년 전 패배를 당했던 유고슬라비아를 만났고, 선수들은 열심히 경기에 임해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축구에 승리를 맛본 소련 지도부는 본격적으로 축구를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소련 축구 대표팀이 서방 국가들의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그들의 승리가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소련은 그동안 금지됐던 국제 대회를 허용했고 1957 붉은 군대의 역사가 시작됐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야신은 리그, 올림픽에서 활약을 했고, 붉은 군대의 핵심 선수로 거듭났다. 소련 대표팀은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며 그들의 일탈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야신의 동료 스트렐초프는 17살에 득점왕을 차지해 소련 축구를 책임질 천재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생활로 인해 소련지도부는 굴라크라는 악명 높은 수용소에 7년 동안 가두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1960 유로 대회가 열렸다. 소련은 1960유로에 진출하게 되었고 소련은 결승전에 진출하여 우승하며 또다시 최고임을 알렸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의 우승 주역은 야신이었다.
야신은 엄청난 반사 신경으로 결승 상대의 슛을 다 막아버렸고, 자신이 유럽 최고의 골키퍼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소련이 넘지 못하는 산이 있었다. 바로 월드컵이었다. 소련은 1958월드컵에서 쓰라린 맛을 봤지만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해 자신감이 넘쳐났다.
1962 월드컵이 시작됐다. 하지만 야신은 월드컵에서 최악의 실수들을 보여줬다. 콜롬비아의 경기장에서 야신은 무려 3골을 실점해 주며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8강전으로 향했다. 야신의 실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출처:Wikipedia
칠레와의 8강전 야신이면 막았을 골이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그 골이 소련을 탈락으로 몰았다. 그렇게 야신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대회로 남게 됐다. 그 후 언론과 기사에서는 패배의 원인 야신이라며 야신을 지목했고 야신을 비난했다.
그 후 야신은 경기장에서 야유를 받았고 심지어 야신의 집에 돌멩이가 날라와 창문을 깼고, 야신은 멘탈이 산산조각이 나며 은퇴까지 생각했다. 야신은 "칠레 월드컵이 끝나고 고통스러운 기분만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야신은 자신의 취미인 낚시를 했고 어릴 적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었다.
하지만 야신은 ‘어릴 적 더 힘들었고 축구를 하며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야신은 1963년 전성기의 야신이 부활했다. 야신은 리그 27경기 동안 단 6골만 허용하는 엄청난 선방을 보여줬다.
그렇게 야신은 팀에게 리그우승컵을 들게 해주었다. 야신은 한 시즌만에 팬들의 여론까지 뒤집어버린 야신은 또다시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 후 골키퍼의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거듭났다.
출처:Flickr
하지만 대표팀에서는 불운이 따랐다 야신은 항상 엄청난 선방을 보여줬지만 승리를 하지 못했다. 1964유로에선 준우승을 했고,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끌었지만 서독에게 패배하며 야신은 억울한 상황에 처했다.
야신은 1970년 은퇴를 결심했다. 그 후 야신이 떠난 소련의 팀은 성적이 좋지 않았다. 1970년 이후 본선조차 진출하지 못했다. 그 이후 월드컵, 유로에서 대회 트로피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소련의 축구는 점점 잠겨만 갔다. 야신은 은퇴 이후 코치로 활동했고, 1990년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야신은 러시아 전역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다. 러시아의 아이들은 모두 “야신이 되고 싶어 한다”라며 모자와 검은 옷을 입고 골키퍼를 자처했다. 야신은 어릴 적 힘들고 좋지 않은 환경에도 노력을 하며 결국 최고의 골키퍼가 되었고, 골키퍼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일도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야신은 골키퍼에 대한 엄청난 임팩트를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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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