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최한성 수습기자] 모든 포지션을 뛸 수 있었던 축구선수 루드 굴리트는 1962년 9월 1일 네덜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굴리트의 아버지는 수리남 사람이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사람이다. 굴리트는 작은 아파트 꼭대기 투룸에서 살았다.
아버지 조지 굴리트는 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박물관의 관리인이었다. 한때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어린 굴리트는 동네에서 공을 차며 축구 실력을 길렀다. 이는 굴리트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굴리트는 5살의 나이에 지역 유스팀에 입단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굴리트는 10살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됐다. 그 동네에서 둘도 없는 친구이자 전설적인 축구선수가 될 레이카르트와 함께 축구를 했다. 굴리트와 레이카르트의 아버지 둘은 수리남 출신 친구로 1957년 함께 수리남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케이스였다.
굴리트와 레이카르트는 함께 축구를 하면서 1975년 지역 유스팀에서 활약을 했다. 1975년 아버지의 나라 수리남은 300년에 걸친 네덜란드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하게 됐다. 굴리트는 이민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네덜란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축구에 매진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굴리트가 공을 다루는 솜씨는 동나이대 아이들보다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아버지의 좋은 신체를 물려받아 탄력까지 있었다. 굴리트 축구인생의 시발점이 된 것은 네덜란드 프로팀 하를렘과 계약을 하면서였다. 1978년 16살에 계약을 했고, 굴리트를 길러낸 감독은 웨스트브로미치 알비온의 선수출신 배리즈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배리 휴즈는 굴리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프로계약을 했다. 얼마 뒤 네덜란드 리그에 출전시켰다. 이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의 최연소 출전 기록이었다. 하를렘은 그해 최상위로 강등을 당했지만 굴리트의 활약으로 바로 승격했다. 굴리트는 리그에서의 맹활약으로 1981-1982 시즌 하를렘을 4위에 올려놓았다.
휴즈 감독은 굴리트를 극찬했고, 네덜란드의 "던칸 에드워즈" 같다고 찬사를 보냈다. 굴리트는 3년동안 하를렘에서 91경기 32골을 넣은 뒤 1982년 페예노르트로 이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굴리트는 축구선수로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굴리트는 단지 재미삼아 아마추어 레벨에 맞추어 공을 차고 즐겼을 뿐이었다. 페예노르트로 이적하면서 자신이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축구선수라는 큰 꿈을 꾸게 됐다. 페예노리트에 입단하기 전 잉글랜드 아스날 FC와 입스위치 타운 FC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탈락했다.
입스위치는 1981년 당시 유에파컵 우승을 했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리버풀의 전설 존반스, 잉글랜드 역대 테크니션 폴 게스코인에 이어 굴리트까지 입단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굴리트는 1983-1984 시즌 리그와 컵대회를 모두 재패하며 1984년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83년 굴리트는 당시 감독으로부터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들었고, 경기 도중에도 상대편 관중에게 모욕적인 인종차별 구호를 듣게 됐다. 굴리트는 마음에 상처와 부상까지 당해 선수생활에 전환점을 찾게 됐고, 1985년 마침내 이적하기로 결정했다.
PSV 아인트호벤으로 17억 원에 이적한 굴리트는 첫해 24골로 득점왕에 올라 팀의 리그 우승을 도왔다. 전년도 같은 네덜란드 출신인 요한 크루이프가 받았던 올해의 선수상을 굴리트가 계보로 이은 것이다. 굴리트는 다음 해에도 22골을 넣어 리그 2연패와 함께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인까지 올랐다.
굴리트는 유럽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으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축구선수 반열에 올랐다. 굴리트와 득점왕 경쟁을 하던 선수는 아약스의 마르코 반바스텐이었다. 굴리트와 반바스테는 1987년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인 AC 밀란으로 입단하게 됐다. 굴리트는 당시 마라도나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이적료 104억 원을 기록했다.
AC 밀란은 당시 이탈리아의 기업인겸 정치가였던 베를루스코니가 부임한 후 굴리트에 꽂혀있던 상황이었다. 현재 이적시장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던 시절이어서 이적은 3월에 이뤄졌다. 굴리트는 1987-1988 시즌부터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굴리트는 이적 직후에 언어의 장벽과 적응 문제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탁월한 축구 실력으로 금새 이겨냈다. PSV 아인트호벤에서의 활약보다 더 좋은 컨디션 덕분에 1987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사키 감독이 이끌었던 AC 밀란은 9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AC 밀란에서는 굴리트, 반바스텐, 피에르트 비르디스가 공격의 선봉에 나섰다. 굴리트는 1987-1988 시즌 주로 포워드로 뛰었고, 마라도나와 비교되기까지 했다. 굴리트의 개인 능력면에서 마라도나의 우위를 점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밀란과 마라도나가 뛰고 있었던 나폴리가 경기를 했을 때 굴리트는 1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나폴리를 격파했다.
굴리트의 맹활약으로 나폴리가 2위, AC 밀란이 리그 역전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됐다. 국제대회 우승 경력이 아쉬웠던 네덜란드는 1988년 유로88에 굴리트, 레이카르트, 반바스텐 3총사를 내세워 독일, 소련을 격파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굴리트는 결승전에서 중요한 선제골을 성공시켜 유로88 베스트11에 선정됐다.
발롱도르는 반바스텐이 가져갔다. 2위는 굴리트, 3위는 레이카르트가 선정되어 1988년 발롱도르 시상은 네덜란드인 3명이 독차지했다. 1988년 사키 감독의 부름을 받아 레이카르트가 AC 밀란에 합류되면서 3총사는 모두 한 팀에 모이게 됐다. 당시 이탈리아 세리에A는 마라도와 카레카라가 있는 나폴리의 시대였지만 네덜란드 3총사로 인해 우승권이 AC 밀란으로 넘어갔다.
AC 밀란은 당시 최강의 수비수 바레시와 떠오르는 샛별 말디니 등 최고의 수비진을 가졌지만 AC 밀란의 전성기를 연 것은 네덜란드 3총사를 영입하면서였다. 이후에도 AC 밀란의 상승세는 여지없이 이어졌다. 축구 역사상 굴리트처럼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기술, 축구지능, 190cm의 피지컬을 이용한 몸싸움 등 어느 하나 약점조차 볼 수 없었다.
1990년 굴리트와 AC 밀란은 다시 한 번 더 유럽 최정상인 유럽피언컵을 차지했다. AC 밀란은 1991년 유럽피언컵 3연패에 도전했다. 그러나 마르세유와의 8강전에서 경기 중 조명이 꺼지자 밀란이 항의의 의미로 라커룸에 들어가서 몰수패를 하게 되어 8강에서 떨어졌다.
이후 밀란은 1년간 유럽 대항전에 출전이 금지되는 징계를 받았다. 굴리트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였기에 본인에게는 치명타일 수밖에 없었다. 1992년 AC 밀란은 리그에서 22승 12무로 무패 우승을 이루어내며 최강팀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이 당시 유럽 대항전에 외국인 선수 3명 이상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굴리트는 팀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굴리트는 1993년 끝내 팀을 떠나게 됐다. AC 밀란의 카펠로 감독이 부임하면서 잠시동안 삼프도리아로 임대했다. 1995년 굴리트가 새로운 팀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 잉글랜드 첼시를 눈여겨봤다.
(출처=PICRYL)
32살이 된 굴리트는 첼시에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첼시의 글렌 호들 감독은 굴리트를 스위퍼 수비수로 기용했지만 이후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리그에서 팀 성적은 형편 없었지만 굴리트가 첼시를 FA컵 준결승까지 올려놓아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에릭 칸도나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5-1996 시즌 중간에 첼시 감독이 해임되면서 그 후임으로 선수로 뛰고 있었던 굴리트가 감독으로 선임됐다. 지성파였던 굴리트의 감독 승격은 이상할 게 없는 선택이었다. 1996년 첼시 올해의 선수이기도 해 팬들의 지지도 상당했다. 굴리트는 1996-1997 시즌 지안프랑코 졸라, 디 마테오를 비롯해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덕분에 잉글랜드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첼시의 26년 만의 FA컵 우승, 외국인 감독 최초의 우승이었다. 굴리트가 1998년 구단과 마찰로 첼시 감독직에서 급작스럽게 내려오면서 선수 겸 감독이었던 굴리트의 활약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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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최한성 수습기자]
[밸류체인타임스=최한성 수습기자] 모든 포지션을 뛸 수 있었던 축구선수 루드 굴리트는 1962년 9월 1일 네덜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굴리트의 아버지는 수리남 사람이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사람이다. 굴리트는 작은 아파트 꼭대기 투룸에서 살았다.
아버지 조지 굴리트는 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박물관의 관리인이었다. 한때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어린 굴리트는 동네에서 공을 차며 축구 실력을 길렀다. 이는 굴리트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굴리트는 5살의 나이에 지역 유스팀에 입단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굴리트는 10살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됐다. 그 동네에서 둘도 없는 친구이자 전설적인 축구선수가 될 레이카르트와 함께 축구를 했다. 굴리트와 레이카르트의 아버지 둘은 수리남 출신 친구로 1957년 함께 수리남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케이스였다.
굴리트와 레이카르트는 함께 축구를 하면서 1975년 지역 유스팀에서 활약을 했다. 1975년 아버지의 나라 수리남은 300년에 걸친 네덜란드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하게 됐다. 굴리트는 이민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네덜란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축구에 매진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굴리트가 공을 다루는 솜씨는 동나이대 아이들보다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아버지의 좋은 신체를 물려받아 탄력까지 있었다. 굴리트 축구인생의 시발점이 된 것은 네덜란드 프로팀 하를렘과 계약을 하면서였다. 1978년 16살에 계약을 했고, 굴리트를 길러낸 감독은 웨스트브로미치 알비온의 선수출신 배리즈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배리 휴즈는 굴리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프로계약을 했다. 얼마 뒤 네덜란드 리그에 출전시켰다. 이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의 최연소 출전 기록이었다. 하를렘은 그해 최상위로 강등을 당했지만 굴리트의 활약으로 바로 승격했다. 굴리트는 리그에서의 맹활약으로 1981-1982 시즌 하를렘을 4위에 올려놓았다.
휴즈 감독은 굴리트를 극찬했고, 네덜란드의 "던칸 에드워즈" 같다고 찬사를 보냈다. 굴리트는 3년동안 하를렘에서 91경기 32골을 넣은 뒤 1982년 페예노르트로 이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굴리트는 축구선수로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굴리트는 단지 재미삼아 아마추어 레벨에 맞추어 공을 차고 즐겼을 뿐이었다. 페예노르트로 이적하면서 자신이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축구선수라는 큰 꿈을 꾸게 됐다. 페예노리트에 입단하기 전 잉글랜드 아스날 FC와 입스위치 타운 FC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탈락했다.
입스위치는 1981년 당시 유에파컵 우승을 했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리버풀의 전설 존반스, 잉글랜드 역대 테크니션 폴 게스코인에 이어 굴리트까지 입단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굴리트는 1983-1984 시즌 리그와 컵대회를 모두 재패하며 1984년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83년 굴리트는 당시 감독으로부터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들었고, 경기 도중에도 상대편 관중에게 모욕적인 인종차별 구호를 듣게 됐다. 굴리트는 마음에 상처와 부상까지 당해 선수생활에 전환점을 찾게 됐고, 1985년 마침내 이적하기로 결정했다.
PSV 아인트호벤으로 17억 원에 이적한 굴리트는 첫해 24골로 득점왕에 올라 팀의 리그 우승을 도왔다. 전년도 같은 네덜란드 출신인 요한 크루이프가 받았던 올해의 선수상을 굴리트가 계보로 이은 것이다. 굴리트는 다음 해에도 22골을 넣어 리그 2연패와 함께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인까지 올랐다.
굴리트는 유럽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으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축구선수 반열에 올랐다. 굴리트와 득점왕 경쟁을 하던 선수는 아약스의 마르코 반바스텐이었다. 굴리트와 반바스테는 1987년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인 AC 밀란으로 입단하게 됐다. 굴리트는 당시 마라도나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이적료 104억 원을 기록했다.
AC 밀란은 당시 이탈리아의 기업인겸 정치가였던 베를루스코니가 부임한 후 굴리트에 꽂혀있던 상황이었다. 현재 이적시장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던 시절이어서 이적은 3월에 이뤄졌다. 굴리트는 1987-1988 시즌부터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굴리트는 이적 직후에 언어의 장벽과 적응 문제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탁월한 축구 실력으로 금새 이겨냈다. PSV 아인트호벤에서의 활약보다 더 좋은 컨디션 덕분에 1987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사키 감독이 이끌었던 AC 밀란은 9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AC 밀란에서는 굴리트, 반바스텐, 피에르트 비르디스가 공격의 선봉에 나섰다. 굴리트는 1987-1988 시즌 주로 포워드로 뛰었고, 마라도나와 비교되기까지 했다. 굴리트의 개인 능력면에서 마라도나의 우위를 점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밀란과 마라도나가 뛰고 있었던 나폴리가 경기를 했을 때 굴리트는 1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나폴리를 격파했다.
굴리트의 맹활약으로 나폴리가 2위, AC 밀란이 리그 역전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됐다. 국제대회 우승 경력이 아쉬웠던 네덜란드는 1988년 유로88에 굴리트, 레이카르트, 반바스텐 3총사를 내세워 독일, 소련을 격파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굴리트는 결승전에서 중요한 선제골을 성공시켜 유로88 베스트11에 선정됐다.
발롱도르는 반바스텐이 가져갔다. 2위는 굴리트, 3위는 레이카르트가 선정되어 1988년 발롱도르 시상은 네덜란드인 3명이 독차지했다. 1988년 사키 감독의 부름을 받아 레이카르트가 AC 밀란에 합류되면서 3총사는 모두 한 팀에 모이게 됐다. 당시 이탈리아 세리에A는 마라도와 카레카라가 있는 나폴리의 시대였지만 네덜란드 3총사로 인해 우승권이 AC 밀란으로 넘어갔다.
AC 밀란은 당시 최강의 수비수 바레시와 떠오르는 샛별 말디니 등 최고의 수비진을 가졌지만 AC 밀란의 전성기를 연 것은 네덜란드 3총사를 영입하면서였다. 이후에도 AC 밀란의 상승세는 여지없이 이어졌다. 축구 역사상 굴리트처럼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기술, 축구지능, 190cm의 피지컬을 이용한 몸싸움 등 어느 하나 약점조차 볼 수 없었다.
1990년 굴리트와 AC 밀란은 다시 한 번 더 유럽 최정상인 유럽피언컵을 차지했다. AC 밀란은 1991년 유럽피언컵 3연패에 도전했다. 그러나 마르세유와의 8강전에서 경기 중 조명이 꺼지자 밀란이 항의의 의미로 라커룸에 들어가서 몰수패를 하게 되어 8강에서 떨어졌다.
이후 밀란은 1년간 유럽 대항전에 출전이 금지되는 징계를 받았다. 굴리트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였기에 본인에게는 치명타일 수밖에 없었다. 1992년 AC 밀란은 리그에서 22승 12무로 무패 우승을 이루어내며 최강팀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이 당시 유럽 대항전에 외국인 선수 3명 이상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굴리트는 팀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굴리트는 1993년 끝내 팀을 떠나게 됐다. AC 밀란의 카펠로 감독이 부임하면서 잠시동안 삼프도리아로 임대했다. 1995년 굴리트가 새로운 팀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 잉글랜드 첼시를 눈여겨봤다.
(출처=PICRYL)
32살이 된 굴리트는 첼시에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첼시의 글렌 호들 감독은 굴리트를 스위퍼 수비수로 기용했지만 이후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리그에서 팀 성적은 형편 없었지만 굴리트가 첼시를 FA컵 준결승까지 올려놓아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에릭 칸도나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5-1996 시즌 중간에 첼시 감독이 해임되면서 그 후임으로 선수로 뛰고 있었던 굴리트가 감독으로 선임됐다. 지성파였던 굴리트의 감독 승격은 이상할 게 없는 선택이었다. 1996년 첼시 올해의 선수이기도 해 팬들의 지지도 상당했다. 굴리트는 1996-1997 시즌 지안프랑코 졸라, 디 마테오를 비롯해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덕분에 잉글랜드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첼시의 26년 만의 FA컵 우승, 외국인 감독 최초의 우승이었다. 굴리트가 1998년 구단과 마찰로 첼시 감독직에서 급작스럽게 내려오면서 선수 겸 감독이었던 굴리트의 활약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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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최한성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