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의 일생과 헌신 | 밸류체인타임스

황주하 인재기자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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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주하 인재기자] 박에스더는 1877년 김홍택과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릴 적 이름은 김점동이었다. 1887년 이화학당에 입학한 점동은 읽기와 쓰기를 배우며, 선교사들로부터 오르간 연주와 성경을 배웠다.


이화학당에 온 선교사 스크랜턴이 점동을 따로 불러, 미국에서 온 여의사 로제타가 조선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왔고, 그녀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당시 조선에는 여의사가 없어 남자 의사에게만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이는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화학당 내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녀관에서 점동은 로제타의 통역을 맡아 여성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보구녀관에 오는 환자들은 병원비 대신 부채, 돗자리, 땔감, 음식 등을 치료비로 가져왔다. 로제타는 보구녀관뿐만 아니라 직접 환자들을 찾아가 진료했으며, 점동은 밤에만 로제타를 따라다니며 통역을 도왔다. 일본 소녀 오와가는 점동이 못하는 통역을 도왔고, 두 소녀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로제타의 가르침 덕분에 점동은 점차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상처를 만지는 것부터 사진을 보는 것조차 무서워했던 그녀는 나중에 수술 기구를 다루며 환자들을 도왔다.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공부했고, 점동도 세례를 받아 에스더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에스더는 일부 학생들과 로제타에게 생리학, 약물학을 배웠다. 그중 에스더가 가장 뛰어났다.

출처=네이버ccl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보통 열다섯 살이 되기 전 결혼을 했지만, 에스더는 열일곱 살에 박여선과 결혼했다. 로제타 부부가 평양으로 떠나게 되어 에스더 부부도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로제타 부부의 병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에스더 부부는 그들을 도왔다. 그러나 서양인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은 여전했다. 


평양사람들은 자신들과 외모가 다른 로제타 부부를 신기해했다. 로제타 부부의 병원에는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에스더 부부는 로제타 부부를 도왔다. 환자들은 서양인에 대한 거부감으로 로제타와 에스더 부부의 집에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에스더는 로제타를 계속 도우며 로제타의 가르침대로 수술 도구도 꺼내고 혈관을 누르는 도구도 의사만큼 익숙하게 다뤘다. 평양 사람들은 로제타를 도우는 에스더를 보고 의사처럼 잘한다고 놀라워했다. 사람들은 에스더를 구경하기도 했다. 로제타가 왕진을 다닐 때 평양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에스더가 함께 했다.


로제타와 에스더 부부는 평양에 온 지 한 달 만에 돌아와야 했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고 평양에서 전투가 일어나 선교사들이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 부부와 에스더 부부가 돌아갈 때 평양 사람들은 아쉬워했다. 청일 전쟁이 끝나자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은 혼자서 평양으로 건너가 진료했다. 윌리엄은 혼자서 쉬는 날도 없이 병원문을 열었다. 결국 윌리엄은 발진 티푸스에 걸려 서울에 돌아오는 길에 병이 깊어져 로제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로제타는 남편 윌리엄이 숨을 거둔 후 미국에 잠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 에스더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남편 박여선과 로제타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에스더는 한 달 동안의 항해를 마치고 미국에 도착한다. 미국에서 에스더는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인들처럼 남편의 성을 따랐다. 김에스더가 아닌 박에스더로 불렸다. 미국에 왔지만 에스더는 바로 의과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리버티공립학교에 들어갔다. 리버티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던 에스더는 주말에는 로제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리버티 농장으로 돌아왔다. 박여선은 일주일 내내 농장에서 일하고 집안일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에스더는 뉴욕 시의 어린이 병원에서 수간호원을 보조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에스더의 성적은 계속 올라 입학생 중 가장 어린 나이인 스무 살에 보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합격했다. 로제타는 아이들과 조선에 돌아가 병원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려고 에스더와 박여선을 데려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에스더는 의과 대학을 졸업해 여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고 싶어 처음으로 로제타의 제안을 거절했다.


에스더의 남편 박여선은 쉬지 않고 일해 폐결핵에 걸렸다. 에스더는 매일 돈을 벌고 시간을 쪼개 남편 병간호와 의대 공부를 병행했다. 하지만 점점 박여선의 건강이 좋지 않아지면서 에스더가 의과대학 졸업하기 얼마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에스더는 남편 박여선이 세상을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우수한 성적으로 4년 과정의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의과대학 교수들은 에스더를 칭찬하며 여러 곳에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에스더는 조선으로 돌아가 의사가 되기 위해 조선을 떠나온 지 6년 만에 돌아왔다. 에스더는 조선인 양의사로는 두 번째,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의사가 되었다.


에스더는 조선으로 돌아와 로제타 가족과 함께 살며 병원 진료도 함께 했다. 에스더가 조선에 왔다는 소식에 병원에는 환자들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을 섰다. 환자들은 에스더를 "우리 의사"라고 불렀다.


출처=네이버ccl


1902년에는 조선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에스더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제대로 된 치료와 위생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가르쳤다. 에스더는 1년 동안 3,400건의 진료를 기록하며, 먼 시골까지 소, 말,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 당나귀의 방울 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뛰어나와 진료를 받았다.


길이 얼은 겨울에는 당나귀 썰매를 타고 왕진을 다녔다. 에스더는 쉬지 않고 일을 하다 결국 폐결핵에 결렸다. 에스더가 없는 병원 보구녀관은 문을 닫았다. 에스더는 가족들에게 병간호를 받다가 1910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박에스더는 조선 사람들도 공부해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한 조선 최초의 여의사다. 그녀의 헌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조선 의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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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주하 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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