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의 최대위기 임진왜란 | 밸류체인타임스

유제혁 인재기자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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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이자 조선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다.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을 당시 일본은 전국 시대를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불안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가 언제 또 뒤집힐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히데요시는 영주들의 충성을 휘어잡을 만한 확실한 업적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히데요시는 대륙 정복이라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명나라와 조선을 굴복시키고 광활한 영토를 손에 얻음으로써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는 통일한 땅을 나눠줌으로써 영주들을 달랠 수 있었고,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대륙으로의 진출과 외국과의 무역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이미 자신의 라이벌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마저 묶어두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방해 요소는 없다고 판단했으며 히데요시는 한반도와 명나라를 향한 침략의 욕망을 품고 대륙 정벌을 위해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 조선에서도 일본의 침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과거부터 히데요시가 노골적으로 조선 침공을 예고했다. 특히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들이 파견됐을 때 이들은 히데요시의 명나라 침공 계획을 듣게 된다. 하지만 조선은 오랜 기간의 평화 유지로 방심하고 있었고, 명나라 황제는 굉장히 무능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허술한 틈을 보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 틈을 타 전쟁을 벌인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킬 계획을 진행한다. 히데요시는 전쟁의 핵심을 무기에 두고 있었으며, 유럽산 화승총과 실탄 화약 등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1000여 척의 병선을 확보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제식화한 조총이라는 신무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일본의 병사들 또한 전국 시대의 경험으로 전투력이 최대치에 달했고, 수많은 전투를 통해 습득한 체계적인 전략전술이 절정에 다다랐다. 순수하게 전투 능력으로만 봤을 때 당시 일본군은 동아시아 최고의 군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침내 전쟁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최정의 전투 부대만 14만 명, 예비대를 포함한 20만 명의 대규모 원정군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조선을 향해 출병했다. 갑작스럽게 일본이 들이닥치자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의 개전을 알리는 부산진과 동래성 전투에서 물밑듯이 들어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은 치열한 방어전을 벌여야 했다.


이때 일본은 “무모한 전투는 피하고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라고 말했으나 조선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주는 것은 어렵다”라는 답으로 받아쳤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순식간에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 당하면서 조선군이 증발하자 일본군은 무섭게 북진하기 시작했다.


지형지물은 물론 방어를 맡을 만한 어떤 정규군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양까지 빠르게 쳐들어왔고,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단 15일 만에 왜군에게 한양을 빼앗기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 상황에서 선조는 명나라에 구원 요청을 보내고, 수도 한양을 떠나 개성에서 다시 평양 의주로 피난을 간다.


명나라도 조선이 무너지게 되면 일본이 한반도를 전초기지 삼아 자신의 나라로 침략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조선 파병을 결정한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급기야 선조는 급하게라도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명하고, 국정 운영을 수행하게끔 했다.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한 후 한양에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무차별적인 만행으로 인해 남대문과 동대문 밖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여자들은 양반과 평민 가리지 않고 강간을 당했다.


일본군은 조선인의 살을 도려내고 피부로 벗기는 등 사람을 상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전라 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고 이틀 후에 일본군의 상륙 소식을 듣는다. 사실 전쟁 발발 1년 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이미 왜군이 침공해 올 것을 대비하여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했다.


판옥선의 화포 등의 무기를 강화하고, 거북선 또한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실전과 똑같은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시했다. 1592년 5월 4일, 판옥선을 이끌고 출격하여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에 맞섰다. 적이 출격하자 이순신은 “정신줄을 놓지 마라. 산처럼 무겁게 침착하라”라는 명령을 내린 후 조선 수군을 옥포로 진격시켰다.


일본의 함대 26척 격침이라는 큰 성과를 올리며 첫 승리를 장식했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최초 승전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한 해전이었다. 연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이 최초로 투입되어 방포, 율포 등지에서 연전연승했다. 수차례 해전을 치르는 동안 조선 수군의 전사자가 매우 적었지만 이순신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진격하겠다는 일본의 수륙 병진 전략이 크게 흔들리게 됐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명장 와키자카 야즈하루를 해안으로 급파했고, 구키 요시타카와 합세하여 조선 수군에 대한 공세를 계획한다.


이에 이순신 장군도 필사의 전력을 준비하는데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의 정박한 일본군 함대와 맞서기에는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파악하게 된다. 심지어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도 있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소규모 함대를 활용하여 일본의 함대 전체를 한산도 근처 해안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으며, 일본의 함대가 넓은 바다로 나오게 되자 이를 기다리던 3개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 전술을 형성했고, 일본 수군을 포위한 뒤 공격했다. 이것이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한산도 대첩의 패배로 수장이었던 와키자카 야즈하루는 겨우 목숨만 건져 근처의 무인도로 피신했다. 이렇듯 수군이 이순신에 의해 막히게 되면서 한반도에 들어선 일본 육군의 보급선이 차단되기 시작했다. 침략이 시작되기 전에는 빠르게 한양으로 입성하여 선조를 잡으려고 했던 일본이었지만 이들의 계획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았다.


여기에 이순신의 활약으로 보급 문제가 생기자 일본은 식량 확보를 위해 진주성을 공격하는 등 호남 지역을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이 또한 실패한다. 일본과 조선의 작은 전투는 수개월째 계속됐다. 민간인의 피해 또한 극심해지고 있었지만 함경도 평양성 등 조선은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일본을 막아내고 있었다.


한반도 곳곳에서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 군대를 만들어 활약했다. 1593년 2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0개월이 지나자 일본의 상황은 어느덧 절망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선이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일본은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이때 조선도 권율 장군의 지위 아래 한양을 탈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한강 주변에서 일본군을 무력화시킬 최적의 장소로 찾은 이곳이 바로 행주산성이었다. 권율 장군은 이곳에 은밀히 군대를 옮기고 진지를 구축했으며, 3000명이 채 안 되는 병사들과 10배에 달하는 일본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


1593년 2월 12일 아침 6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례 등 화기를 이용하여 방어전를 펼쳤다. 후에는 조선군 앞쪽에서 화살이 모두 다 소모되자 투석으로 맞서 싸운다. 여기서 민간인,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폐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 같은 구원이 도착하는데 충청수사 정걸이 배 두 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 왔던 것이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던 하루 동안의 행주산성에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조선군의 집중 포격을 받아 사망 직전에 중상을 입게 된다. 저녁 6시경이 되어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하자 길게 이어지던 이 전투는 조선의 압승으로 비로소 마무리됐다.


보급 때문에 간간히 버티던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로 전력의 치명타를 입게 된다. 행주대첩과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치열했던 전투양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군의 고니시와 명나라의 심유경은 휴전을 논의하게 된다.


세 나라는 각각 원하는 목표가 달랐는데 히데요시는 조선 땅 일부에 대한 지배권을 받아내고자 했고, 명나라는 일본의 대륙 진출을 막았기 때문에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조선만큼은 일본군을 한 명이라도 몰아내기 위해 휴전보다는 끝까지 전쟁을 원했다.


3년에 걸친 길고 긴 협상이 결국 결렬되자 분노한 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병력을 끌어모아 조선 침공을 명령한다. 그들이 원하는 조선 8도 중 한강 이남의 사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조선땅에 재차 상륙한 일본군은 지난 전쟁보다 훨씬 더 악랄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조선의 민간인을 약탈하거나 포로로 잡아갔으며 심지어는 잔인하게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때 일본군은 자신이 죽인 백성들의 숫자를 보고하기 위해 코나 귀를 잘라갔다. 여기에서 "눈 감으면 코 베이는 세상"이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한편, 이미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압송되어 있었다. 이순신의 빈자리는 평소에 이순신을 싫어하던 원균이 맡았고, 그도 자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자신감이 넘쳤던 원균은 이순신의 주장과는 반대로 일본군 본진에 뛰어드는 무리수를 던지게 된다.


결국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매복에 걸려들어 칠천량에서 전멸하고 마는데, 원균이 직접 통제사가 되어 보니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이순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간에 패배를 직감한 장수 배설은 판옥선 12척을 빼돌려 도망을 갔다. 만약 열두 척마저 잃게 되었다면 조선 수군은 말 그대로 초기화가 됐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이라 할 수 있는 이 한 번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괴멸하기에 이른다. 조선은 전라도 인근 해역까지 일본군에게 내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 선조가 파직한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되고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 해전 때 배설이 빼돌린 열두 척의 판옥선만 가진 채 보급을 위해 북상하는 일본군 함대를 막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조정에서는 12척의 배로는 무모해 보이니 육군과 합쳐서 전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물살이 요동치는 울둘목 앞바다를 선택했다.


울둘목은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닷길로 물살이 빨라 마치 물이 우는 것 같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조류가 가장 빠른 곳으로 유명하다. 1597년 10월 25일, 이순신 장군은 이 좁은 울둘목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반대로 일본의 133척의 배는 밀물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도착한 바로 그때 물의 흐름이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고 울둘목의 빠른 물살이 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는 이순신은 빠른 물살을 이용해 공격을 퍼부었고 일본의 대열은 중심을 잃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 배는 31척이나 침몰했으며, 나머지 백여 척의 배는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남해안 일대로 후퇴하게 된다.


“죽고자 하면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는 정신으로 불과 열두 척의 배로 143척의 일본 배를 물리친 이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이다.


한편, 한양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상주, 경주를 거쳐 부산 일대로 후퇴하기 시작한 왜군에게는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으며 버티기에 돌입하는데 긴 전쟁과 누적된 피해로 인해 일본군의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공세를 펼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군들은 가망이 없어진 전쟁에서 철수하고 싶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 철수를 금지한 상태였다. 1598년 9월, 전쟁의 시작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격한 건강 악화로 사망하자 일본군은 드디어 철군을 시작한다. 반대로 철수하는 왜군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이순신 장군은 진린 제독의 명나라 함대와 연합하여 후퇴하는 왜군들을 선멸할 최후의 혈전을 준비한다.


이것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벌인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다. 당시 일본군을 이끌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선 수군은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죽을 위기에 처한 고니시는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와 사천의 주둔한 시마즈에게 간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함대를 셋으로 나눠 포위 공격을 준비한다.


11월 겨울 바다에 무대를 펼친 이 전투에는 각국의 목표가 분명했는데 고니시와 시마즈는 무조건 이순신 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이순신 장군은 이 천인공노할 왜군들을 절멸시켜야 했다. 즉 노량해전은 왜군을 전멸하기 위한 이순신과 철군을 해야 하는 왜군 사이에 얽혀있는 명나라 삼국의 전투이자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였다.


각국이 동기부여가 확실한 상황에서 전투는 이제껏 보지 못한 매우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일본 함대가 노량해협을 통과하자 조선 복병 함대가 기습포격하고 죽도 부근에 매복하던 명나라 함대가 합류하면서 공격했다. 시마즈는 이들과 전면전을 피하고자 관음포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지만 이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 본 함대가 등장하면서 일본 함대는 삼 면이 포위된 형태가 되어 버린다.


조명 연합군은 미리 예측한 북서풍을 이용하여 일본 함대에게 불허설 신기전 등으로 화공을 가했으며, 일본 함대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고 길을 뚫기 위해 돌진했다. 전투는 배와 배가 맞대는 백병전으로 번져갔고,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게 되는데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 전투로 인해 그동안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승전에 비해 매우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퇴각하는 일본 함대는 규멸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시마즈와 고니시는 난전 속에서 포위망을 뚫고 본국으로 탈출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을 피바다로 물들게 한 약 7년간의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전쟁 이후 이순신이 왜군을 최후의 순간까지 전멸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을 얕보지 못하게 됐다. 실제로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조선에 대한 침공을 실천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스가 에도막부를 세웠으며 조선 정복보다는 오히려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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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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