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미국의 남북전쟁의 진짜 원인은 노예제보다 ‘관세’ | 밸류체인타임스

유제욱 수습기자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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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유제욱 수습기자] “이 전쟁의 목적은 노예제도의 보존이나 폐지가 아닙니다. 단 한 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야만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일부는 해방시키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면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남북 전쟁은 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존폐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미국 남북전쟁에 관해 이렇게 답했다.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 또한 남북전쟁의 원인은 ‘노예제도’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1862년 8월에 발표된 링컨의 성명을 읽어본다면 조금 다른 시선으로 남북전쟁을 바라볼 수 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노예제도의 보존이나 폐지가 아닙니다. 단 한 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야만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일부는 해방시키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면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당시 링컨의 시선은 노예제도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노예제도를 유연하게 처리하겠다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링컨은 무엇을 주목했을까? 그는 성명에서 ‘연방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다. 흔히 알려진 노예제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링컨이 꼬집은 ‘연방의 안위’를 중점으로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남부 주민들이 북부를 위해 세금을 내면 거둔 세금의 4분의 3은 북부에 투입됩니다. 그러므로 남부의 도시들은 발전하지 못하지요. 성장은 멈추고 북부의 주변 도시 역할밖에 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의 노예 소유주들을 향한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회 연설문-

 

19세기 초반 미국은 경제 인프라를 기준으로 북부, 서부, 남부로 나눌 수 있다. 북부와 서부는 무역과 운송사업, 공업생산이 주요 수입원이었고, 남부는 담배, 사탕수수 등 전 세계 면화의 3분의 2를 생산하는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연방정부에 세금은 거의 걷지 않았다. 독립전쟁 기간인 1812년부터 1816년을 제외하고는 연방정부의 수입은 헌법 제1조 9항에 따라 오직 국유지 매각과 수입관세뿐이었다. 1816년 독립전쟁이 끝나자 영국 상인들이 전쟁 중 비축했던 대량의 공업생산품을 쏟아낸다. 이는 곧 미국 산업계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 기간 미국의 수입은 90%나 폭락하게 된다.


미국 연방정부는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댈러스 관세를 내놓는다. 이는 3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 높은 세율의 관세였는데 남부에게 불리한 정책이었다. 남부는 면화를 수출하고 유럽산 농기계를 수입했다. 댈러스 관세가 부가됐을 때 수입품 가격은 높아진다. 자연스럽게 남부가 담당했고 공업사업을 추진하던 연방정부는 세금을 북부에 사용했다.


남부의 재정이 북부로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남부는 관세에 호의적이었다. 남부의 농업은 북부의 공업과 다르게 호황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나고 댈러스 관세의 만료시간이 다가오자 관세로 특혜를 받았던 북부의 보호주의 세력은 관세 기한을 연장하길 원했다.

 

더 높은 세율과 확대된 범위의 관세가 발의되었지만 상원에서 한 표 차이로 부결됐다. 이번에는 남부가 찬성하지 않았다. 3년간에 댈러스 관세로 영국과 물가가 비슷해진 데다가 1819년에는 면화가격이 떨어지며 경제적으로 쪼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주의 입김이 강해지며 1824년에 새로운 관세가 시행됐는데 1816년에 5%에 불과했던 세율이 33%까지 상승했고, 1828년에는 38%까지 불어났다. 사실상 연방정부 전체 세금의 75%를 남부지역에서 부담했다. 높은 세율을 내지 않으려면 질이 낮은 북부제품을 사용해야 했다.


경제력이 북부로 이동하자 북부로 인구이동이 일어났다. 1819년에는 면화값이 50% 하락했다. 남부는 관세를 원인으로 주목했고,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연방정부로부터 분리 여론이 형성됐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켄터키, 조지아, 메릴랜드, 앨라바마 등 남부 주의 각 대표들이 뭉쳤다. 이들은 연방정부의 높은 관세 정책으로 인해 남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에 항의하며 주권과 자치관을 강조했다.  


당시 연방정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세금징수를 강제하겠다고 경고했다. 내란 직전 상황까지 다가갔지만 남부 측에 존 칼훈이 대표적인 관세 찬성론자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과 타협에 성공했다. 결국 2년마다 세율을 10%씩 떨어뜨려 1842년에는 20%까지 줄이도록 합의했다.


그러나 1842년이 되자 다시 보호주의 정책이 힘을 입어 단 한 표 차이로 블랙관세라 불리는 법안이 통과됐다. 세율을 줄이기로 약속한 마당에 다시 높였으니 남부는 바로 들고일어났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로버트 레트는 “혁명만이 답이다”라고 부르짖었고, 버지니아의 루이스 스틴로드는 “보호주의가 내란을 일으키고 연방의 영속성을 해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입 관세율은 40%까지 인상됐고, 품목마다 다르게 적용됐는데 철에 관한 세율이 높아서 못에 경우에는 100%를 초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세로 인해 무역시장은 얼어붙었고, 북부와 남부의 경제적, 정치적 갈등은 심화됐다.


그러나 1844년 대선에서 제임스 포크가 대통령이 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새 정부는 관세인하가 4대 중점과제라 발표하고 재무장관 로버트 워커에게 조치 작업을 지시했다. 워커는 25%를 표준관세로 통일해 전 품목에 적용할 것을 제안했고 ‘세율이 내려가면 무역이 다시 활성화될 것’이라 주장했다.


이 제한은 곧 수용됐고 무역경제는 빠르게 회복되며 1850년이 되자 50%의 증가율을 달성했다. 1857년에 이르러서는 평균 관세율이 15%까지 줄었다. 경제 호황기에 접어들고 관세가 줄어들자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사라지는 듯했다. 관세 인하 정책은 미국 내 소비자들에게 더 저렴한 외국산 제품을 제공할 수 있었고, 기업들은 더 저렴한 원자재로 인해 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57년에 크림전쟁이 종전됨으로 미국에 쏠려 있던 유럽의 재정이 다시 유럽 경제로 돌아가며 미국에 경제 불황이 시작됐다. 농산물 수출이 90%가 줄고 생필품 가격이 평균 35%까지 하락했다. 당시 북부와 서부에서는 은행이 부도나고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원금 손실을 입는 등 손해가 컸지만 남부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면화가격이 잠시 주춤했지만 금세 본래 가격을 되찾으며 도리어 미국의 면화 무역시장의 능력을 입증시켰다.


북부와 서부가 약해지고 남부의 경제가 활성화되자 보호주의의 열풍과 함께 관세 이슈가 부각됐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경제학자 현리 케리가 “경제 불황은 관세 문제다”라고 보호무역주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널리 퍼져 경제 불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새로 창설된 공화당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당 창립자 중 한 명인 저스틴 스미스 모릴이 새로운 관세를 입안했다.


링컨은 새로운 관세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반면에 노예제도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북부와 서부는 이미 관세에 관해 열렬한 지지층이 형성되어 있었고, 1860년 결국 링컨은 40%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링컨의 관세에 관한 입장은 한결같았다. 그는 “나는 내부 개선 제도와 고율의 보호관세에 찬성합니다. 이 두 가지는 나의 신념이자 정치적 원칙입니다”라고 1832년 최초의 정견 발표에서 밝혔다. 그의 신념은 1860년까지 변함없었는데 “관세에 관한 나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습니다. 음식이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처럼 관세는 정부의 필수 요소입니다”라고 말했다.


남부는 ‘영국이 미국에 피를 빨았듯 북부가 자신을 위해 남부에게 과세한다’라며, 독립운동 당시 선조들이 ‘대표 없이 과세 없다’고 외쳤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관세에 적극적인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것을 보고 남부 주들은 하나씩 연방에서 분리되어 자신들만의 남부연합을 만들었다. 점점 양 연방에 대립적인 분위기가 생성되며 각 연방은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남북전쟁의 신호탄은 섬터 요새였다. 이곳은 관세를 징수하는 주요 지점이었는데 남부군이 코앞까지 압박해오고 있었다. 북부의 존 볼드윈은 링컨 대통령에게 “이곳을 남부에게 넘겨준다면 아직 남은 남부 주들은 연방을 탈퇴하지 않겠지만 끝까지 가져간다면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라 경고했다. “관세냐? 평화냐?”라는 질문 앞에 링컨은 관세를 택했다. 결국에는 섬터 요새를 기점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링컨이 남북전쟁에 참전한 가장 큰 이유는 연방 수호였다. 그러나 북부가 존재하려면 남부에서 벌어들이는 관세수입이 필수적이었다. 즉, 관세는 미국의 연방 수호였다. 링컨이 바라보는 남북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노예제가 아니라 관세였다.


1861년, 찰스 디킨스는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연중 무후’에서 발표한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현 상황에서 남과 북의 대결은 순전히 경제적인 싸움이다. 남부의 불만 모릴관세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그것이 남과 북을 하나로 묶어 주던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라고 주장했다.


영국 금융전문 작가 도미닉 프리스비는 “일반적으로 남북전쟁에서 북부의 명분은 위대하고 고상한 것으로 포장되고, 남부는 타락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양측 모두 경제적 이익을 위해 싸운 것뿐이다”리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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