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제2의 펠레’라고 불린 브라질의 전설 스트라이커, 호나우두 | 밸류체인타임스

김시원 인재기자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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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김시원 수습기자] 1976년 9월 2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호나우두가 태어났다. 호나우두의 이름이 지어진 특별한 계기가 있다. 호나우두의 출산을 극적으로 도운 의사의 이름이 호나우두 발렌티란이었다. 그 후 그의 부모님은 의사의 이름을 따 호나우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호나우두의 고향은 리오주 교외에 있는 벤토 리베이로라는 비교적 빈곤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호나우두가 어렸을 때는 정말 가난해서 사치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호나우두 여동생과 형은 항상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호나우두를 다다도라고 불렀다.


아직 어린 아이가 정확히 발음하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호나우두의 귀여운 모습에 의해 동네스타가 되었다. 호나우두는 어릴적 삼바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세리머니를 하는 아마추어 축구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학업을 우선하도록 가르쳤다.


브라질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축구선수란 직업의 선택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극소수의 선수들이었으며, 대부분은 큰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어머님은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축구보다 학문이 중요하다고 늘상 호나우두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호나우두에게 학교에서 흥미를 끌만한 것이 거의 없었고 학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의 흥미는 오직 뒷골목에서의 축구였고, 머릿손으론 항상 골을 넣기 위한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호나우두가 처음 입단한 클럽은 지방축구 클럽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살이었다.


거기에서 재능을 갈고 닦아 볼 컨트롤을 몸에 익혔다. 팀도 호나우두의 가입으로 기세가 올라 주니어 대회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이 경기를 본 스카우터는 7살의 호나우두를 데려갔다. 소시알 라모스 풋살클럽은 호나우두가 사는 곳에서 무려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이라 어머니는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려요. 엄마 프로선수가 되어서 첫 월급을 받으면 소파커버를 갈아줄테니까요"라고 약속했다. 8살이 된 그는 동경하던 지쿠가 소속된 명문 플라멩고로 향했다. 하지만 입단 테스트를 보러가던 도중 돈을 모두 도둑맞아버렸다. 이 시기에 호나우두의 부모는 돌연 이혼하게 된다.


좌절과 분열, 가족의 갈등은 8살 호나우두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소시알 라모스에서 13살까지 성장을 거듭한 그는 점차 거물로서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6살이 되자 호나우두는 5300만 원에 크루제이루로 이적하게 되었다. 구단은 그를 열심히 가꾸고 프로선수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마침내 호나우두는 1993년 5월 25일 프로데뷔를 치른 데 이어 12월엔 17살의 나이로 브라질 대표팀에 첫 소집이 되었다. 연봉도 대폭 올라 처음 손에 들어온 돈으로 그는 운전면허도 없었는데 폭스바겐의 골프를 구입했다. 또한 어머니를 위해 새로운 집을 세우기도 했다.


호나우두와 가족의 생활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청소년 대표팀에서의 활약과 소속팀에서의 짧은 활약만으로 팀에서의 입지를 다진 호나우두는 포르투갈에서 개최되는 토너먼트에 나가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 대회에서 맞붙은 포르투의 구단주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한화로 5억 원을 제안했는데, 크루제이루에서 한화로 8억 원을 요구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편 60살을 넘긴 아인트호벤의 한 스카우터는 호나우두에게 매료되었고, 호마리우 이후 가장 재능있는 인재라고 생각해 아인트호벤 감독에게 적극 추천했다. 이후 남미 슈퍼컵에서의 10골로 최다 득점 선수가 되었고, 프로 4개월 차의 호나우두에 대한 평가는 크루제이루 역대 센터 포워드 중 가장 뛰어난 선수가 되었다.


이 시기 브라질은 호마리우의 2골로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얻어냈다. 세간에서는 호마리우와 크레제이루에서 23경기 21골을 기록한 호나우두가 함께 뛴다면 환상적인 2인조가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엔트리에는 포함되었으나 경기는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클럽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유럽진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들인 이적료는 64억 원이었다. 1년 전 5천만 원을 받았던 그는 자신의 가치를 100배나 올려놨다. 또한 호나우두로선 그가 동경하던 브라질의 스타 호마리우가 뛰었던 팀에서 뛰는 것이기도해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PSV 입단 이후 적응기는 필요없었고, 입단 첫 시즌 1994/95 그는 팀이 치른 36경기에 나서 35골을 터뜨렸다. 이어진 두 번째 시즌에는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을 소화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경기당 1골에 가까운 득점력을 과시하며 팀의 컵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빅클럽들의 제안이 쏟아졌고, 여기서 호나우두는 자신에게 PSV를 추천했던 선배 호마리우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당시 한화 215억 원에 달하는 당시 세계 최고액 이적료를 제시한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가 바르샤에서 뛴 1년은 짧지만 강렬했다. 많은 이들은 갓 스물을 넘긴 호나우두가 최고 전성기 기량을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호나우두는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한 시즌 동안 엄청난 기량을 뽐냈다. 스피드와 힘 정확성을 두루 갖춘 그는 마치 지옥에서 온 사자처럼 가차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며 득점을 뽑아냈다. 1996/97 시즌 호나우두 바르샤 유니폼을 입고, 49경기 47골을 기록했다.


스페인 리그의 다소 얌전한 수비가 호나우두를 풀어놓은 셈이라고 지적 아닌 지적이 있었지만 라리가 득점순위에서 2위와 거의 10골차로 따돌린 독보적인 득점왕이었다. 이런 사실은 그런 환경적인 요인이 아닌 스스로의 탁월함을 증명해내 라리가를 흔들었다는 증거로 부족함이 없었다.


1996년 5월 19일, 콤포스텔라와의 리그 경기에서는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6명을 제끼고 단독 돌파 드리블로 골을 작렬시켰다. 이 골은 이틀간 각종 TV 프로에서 180회 이상 반복 재생되는 등 스페인 전역에 폭풍을 일으켰다. 디 스테파노, 요한 크루이프 등 축구계에서도 찬사가 쏟아졌고 펠레와 비교되었다. 이때 그는 루이스 엔리케 스토이치코프 등 뛰어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팀의 3관왕을 견인했다.


그야말로 원 맨쇼를 1년 내내 펼치던 그는 마티아스 잠머와 단 1표 차로 발롱도르 2위를 기록하고,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공인받았다. 이때 호나우두는 나이가 20살이었고, 역대 최연소 수상을 기록했다.


하지만 바르샤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0년 계약을 제의할 만큼 잔류 유도에 적극적이었지만 호나우두는 떠나고 싶었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바이아웃 금액을 기꺼이 지불한 명가 인터밀란이었다. 인터밀란은 288억 원이라는 1년 전 바르샤가 호나우두를 데려갈 때 지불한 금액보다 35% 더 많은 이적료를 내고 호나우두를 데려갔다.


이탈리아에서도 그에겐 적응기가 필요없었다. 프리킥과 주장완장까지 거머쥔 괴물 호나우두는 입단 첫 해부터 엄청난 골을 터뜨리며, 인터밀란을 UEFA컵 정상에 올려놓았다. 32경기 동안 25골을 넣었고, 세리에A MVP 역대 최소의 나이로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으로 향한 그는 4골과 3어시를 기록해 대회 골든볼을 수상했지만 대회내내 진통제를 맞아가며 뛴터라 결국 결승전에서 퍼져버리고 말았다. 결승전에서의 무기력한 플레이 때문에 패배의 주범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후 클럽으로 돌아온 그는 인터밀란 입장에선 상징적인 공격수였다.


비에리, 바지오와 함께 막강한 공격라인을 구축할 것으로 보았으나 무릎에 이상이 왔다. 1999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주역이 된 후 수술과 재활을 마친 뒤 2000년 4월에 복귀했지만 투입 7분 만에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후 2000/01 시즌은 출전을 하지도 못했고, 2001/02 중반에서야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2년간의 부상으로 힘들었지만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엄청난 빠른 회복력과 꾸준한 재활 덕분에 호나우두는 옛 실력으로 되돌아왔다. 호나우두는 기자들 앞에서 전 경기 득점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결승전을 앞두고 25세의 호나우두는 오후에 잠을 자지 않고, 골키퍼 디다와 함께 지내기도 했다.


출처:GoodFon


호나우두는 과거 자신을 힘들게 한 공포를 극복할 것이라고 믿었고, 독일과의 결승전을 위해 경기장에 들어섰다. 독일과에서 경기에서 결국 2골을 기록해 브라질에게 월드컵을 안겨주었다. 호나우두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생애 두 번째 발롱도르를 차지하기도 했다.


출처:Flickr


그의 마지막 전성기는 2002 월드컵을 제패하고 돌아온 뒤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지단, 피구 베컴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끌어 모은 갈락티코 군단에 호나우두가 빠질 수 없었다. 580억 원에 합류한 그는 특히 올드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유와의 챔스 8강전에서 일명 3샷 3킬로 모두 환상적인 골을 넣었다. 딱 3차례 슈팅을 시도해 해트트릭을 달성한 것이다.


첫 해 23골을 넣은데 이어 2003/04시즌도 24골이나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2005년 갑상선 기능저하와 체중증가로 인해 경기력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반니스텔루이에 밀리고 결국 이름값을 해내지 못한 그는 2007년 2월 AC밀란으로 이적했다. 이적료는 4년 전 이적했던 금액의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AC밀란에서도 그는 이미 정상급 선수가 아니었다. 부상도 여전했고, 2008년 1월 13일날 골을 마지막으로 길고도 화려했던 호나우두의 유럽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 이유는 2008년 2월 왼쪽 무릎 슬개건이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1년 이상 뛰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AC밀란은 재계약을 포기했고, 그는 고향 브라질로 돌아오게 됐다.


출처:Flickr


32세의 호나우두는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욕심 없이 순수하게 축구를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9년 전성기 시절 폼이 올라온 듯 했지만 2010년 “몸이 이젠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 같다”라는 말을 하며 은퇴를 암시했다. 그 후 2011년 6월 8일 35세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호나우두는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됐다.


이 경기를 끝으로 클럽과 국대 모두 은퇴하게 됐다. 잦은 부상과 질병으로 긴 전성기를 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1990년대 가장 강력한 흔적을 남긴 축구스타가 호나우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스타들이 골을 앞다퉈 넣을 때도 골에도 클래스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의 플레이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머리속에 남아있다.


출처: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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