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쉽게 보는 미국의 역사 | 밸류체인타임스

유제혁 인재기자
2024-03-21
조회수 1692




[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 1492년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할 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디면서 전 유럽은 발칵 뒤집혔다.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는 새로운 땅과 물자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대부분의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실 빙하기 때만 해도 얼음으로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통해 이곳에 인류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 이후 유럽의 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607년 영국이 최초로 제임스타운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럽 국가들은 이곳에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아메리카는 기회의 땅이었다. 한편,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과 달리 자유를 찾아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때만 해도 영국에서는 종교적 탄압이 심했는데 청교도인들 또한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바로 옆에 있는 네덜란드로 피신해야 했다.



네덜란드 또한 이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고됐고 비참했기 때문에 타국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청교도인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유럽인들에게는 자유의 땅이었던 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된다. 후에는 빚더미에 앉은 영국 채무자들에게 재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조지아주가 계획되기도 했다.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들도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아메리카 대륙은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갔다.


기존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학살과 전염병으로 인해 90%가 사망하게 되었다. 유럽의 대부분이 아메리카에 들어오면서 각국은 식민지를 점점 넓혀갔다. 급기야 영국은 버지니아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지아주에 이르는 13개의 식민지를 형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식민지 확장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 무렵 유럽 본토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이 격렬하게 지속됐으며, 이 대립은 7년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전으로까지 확산된다.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리는 7년 전쟁에서 완전한 압승을 거둔 영국은 대영제국으로의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된다.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대다수를 빼앗으면서 영국은 엄청난 영토를 확보하게 됐다. 문제는 영국이 오랜 기간 전쟁으로 어마어마한 비용을 쏟는 바람에 국가 재정이 악화됐다.


때문에 메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북아메리카의 건설 식민지에서 막대한 세금을 걷는 것이었다. 같은 영국인이 거주하지만 본국과 차별되는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자 식민지인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식민지인들이 보스턴 차 사건을 터트린다.



식민지 주민들은 인디언으로 위장한 후 보스턴항에 정박 중이던 영국배에 침입하여 그곳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모두 바다에 던진 사건을 벌인다. 소식을 들은 영국은 대규모 군대를 북아메리카로 보내 총칼로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찍어 누르려 했다.


영국의 폼에서 벗어나려던 식민지인들은 영국에 맞서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굳게 단결했다. 1775년 신생국으로 독립하기를 바라던 식민지들과 대영제국 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 또한 식민지 대륙군을 도왔으며, 8년간 진행된 전쟁에서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식민지 대륙군이 영국군을 격파하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마침내 영국의 식민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이라는 단독 국가로 독립을 인정받게 된다. 각각의 작은 식민지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가 된 미국은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본격적인 출발을 시작하게 된다. 미국의 국기에 빨간색과 흰색 줄이 13개가 그려져 있는 이유 또한 13개 식민지를 뜻하는 것이다.



미국 독립을 이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03년 이제 막 생긴 신생국은 주변의 땅을 넓혀가며 영토 확장을 시도하는데 사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으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몇몇 유럽 국가는 북아메리카에 아직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잦은 전쟁으로 재정 상황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팔아버리자는 결정을 내리는데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에 갖고 있던 루이지애나 전체를 미국에게 헐값에 내놓게 된다. 땅을 넓히고 싶어 했던 미국 입장에서도 ‘땡큐(Thank you)’였던 것이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기존의 영토에 크게 맞먹는 땅을 단돈 1500만 달러에 즉흥적으로 거래하면서 미국의 영토는 순식간에 두 배로 불어났다.



땅은 두 배로 넓혔어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이제 겨우 독립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력으로는 여전히 유럽 국가에 밀리는 신생국에 불과했다. 독립한 이후로도 대서양을 누비는 영국 선선들이 미국의 선박들을 납치하고 인디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미국과 사이를 벌려놓는 등 해도해도 너무할 정도로 미국을 괴롭혔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에게 있어서 영국은 해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1812년 갈등 속에서 참다 못한 미국이 영국의 선전포고를 하면서 양국 사이의 적대감은 마침내 폭발했고, 미국과 영국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미국과 영국의 전쟁으로 워싱턴 DC가 불바다가 되는데, 나름 치열한 전쟁이었으나 결국 미영전쟁은 뚜렷한 승자 없이 종전 협상으로 마무리된다.



3년에 걸친 싸움이 종결되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무승부를 거두면서 유럽 열강들도 미국을 얕보지 못하게 되었다. 1823년 미국의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고립 정책을 선언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된다. 더 이상 유럽의 간섭을 반대하는 대신 미국도 유럽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유럽의 간섭을 거부한 미국은 이후 동쪽에 치우쳐 있던 수치권을 서쪽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서부개척 시대에 서막을 열게 된다. 1830년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임기 동안에는 남아있던 수많은 인디언들이 강제 이주 혹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백인이 타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인디언 이주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남아있던 많은 인디언들을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인디언에게는 항상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동의 없이 토지와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결국 인디언은 기존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들은 승선없는 싸움에 뛰어들어야만 했고 미국의 야만적인 대량 학살 끝에 결국 기존의 터전을 떠나 눈물의 여정에 올라야 했다. 인디언 전쟁을 지휘했던 블랙호크 추장은 잭슨 대통령 앞에 끌려와서도 "나는 인간이다. 그러나 당신은 다른 종류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조지아주의 땅에서 오클라호마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가는 도중 인디언들은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렇듯 미국 내에서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과 앤드류 잭슨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면서 양당 체제가 자리 잡게 된다.


후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에 각각 흡수되면서 미국은 현재까지 민주당과 공화당 양대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영토의 변화와 함께 미국인들은 사업을 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점점 멕시코의 텍사스로 이주했다. 큰돈을 벌기 위한 사업가들이 미국에서 텍사스로 계속해서 들어왔고, 이곳은 어느덧 미국 정착민들로 가득해져 갔다.



이곳에 들어온 미국인들과 멕시코의 충돌이 점점 잦아지자 텍사스 내에 있던 미국인들은 그냥 이곳을 나라로 세워 독립하자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1836년 뜬금없이 텍사스 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미국도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해주면서 텍사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문제는 텍사스 공화국을 건립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가였기 때문에 갑자기 생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텍사스는 그나마 자신들의 민족이었던 미국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반대로 멕시코 또한 자신의 본토가 미국과 합병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멕시코의 선제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는 1846년에 벌어진 미국 멕시코 전쟁이다.




군인들은 물론 국민들까지 들고 일어나 결상전을 지속한 멕시코였으나 미국의 계속된 공격에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전쟁의 결과 텍사스 공화국이라는 광활한 땅이 미국으로 넘어가 지금의 텍사스주가 되었으며, 멕시코는 현재까지도 100년의 트라우마이자 어마어마한 비극으로 남게 된다.


추가로 미국은 멕시코와 조약을 체결하여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애리조나주 등 광활한 영토를 헐값에 구입하게 된다. 이 조약 역시 반강제적이었다. 미국으로 넘어간 텍사스에서는 엄청난 양의 석유가 발견되면서 세계 3대 유종 중 하나인 텍사스 중질유가 탄생됐다.


멕시코로부터 구입한 애리조나주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협곡 그랜드 캐니언이 있었고, 현재 미국의 국보급 자연환경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캘리니포니아주에서는 금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야말로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엄청난 보물을 가져온다.



1848년부터는 너도 나도 금을 캐러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고, 금을 캐는 이들을 포티나이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는 1년 동안 인구가 무려 6배나 증가했으며, 금을 캐러 전국에서 몰려드는 골드 러시가 시작됐다. 1790년 독립 직후 390만 명에 불과하던 미국의 인구는 1850년경 약 2000만 명까지 늘어났다.


미국은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가 있었는데, 노예제에 대한 찬반 대립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계속되고 있었다. 이 당시 미국의 노예 수는 39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고, 남부는 흑인 노예를 활용해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노예 인력은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농장을 운영하기 위함이었고, 노예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은 물론 아예 인간 취급을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한편, 북부는 산업화를 이루면서 공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인권에 대한 인식도 점점 싹트기 시작한 한편, 남부에 집중된 노예를 분산시켜 북부 공업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부는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19세기 중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부와 노예제에 찬성하는 남부로 대립하게 되었지만 선거에서 북부의 링컨이 당선되면서 남북 간의 대립은 더 극명해졌다.



결국 1861년 남부 연합군이 선제 포격을 가함으로써 미국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초반 전쟁에서는 남부군에게 유리하게 전개가 되었지만 점차 북부군이 우세 자리를 차지했고, 전쟁은 기울기 시작했다. 전쟁 도중인 1863년 1월 1일, 이러한 혼돈 속에서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다.



그가 선포한 노예 해방 선언문에는 "노예로 고용된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울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남북전쟁 속에서 선언한 노예 폐지는 즉시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미국 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였던 4년 동안 계속됐고, 1865년 이 전쟁은 노예를 반대한 북부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로부터 불과 5일 뒤 링컨 대통령은 남부 지지자였던 유명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을 당한다. 당시 윌크스 부스는 미국에서 인기 배우였는데 링컨이 그를 취임식 파티에 초청하기도 했지만, 부스는 “링컨하고 같이 식사하느니 돼지랑 식사하는 게 낫다”라며 거절했다. 그만큼 그는 강경한 노예 폐지 반대자이자 남부 지지자였던 것이다.



현재도 암살 현장이었던 포드 극장에 가면 존 윌크스가 이때 사용했던 권총과 당시 상황을 설명한 삽화가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노예 출신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나 실질적인 생계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때문에 자유인이 된 흑인들은 옛 주인 밑에서 다시 노동자로 종속되어야 했고, 노예제도의 폐지 후에도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 차별은 계속됐다.


시간이 흘러 1867년 미국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혈값에 알래스카를 매입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크림전쟁이라는 큰 규모의 전쟁에서 영국 연합군에 패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영국령 캐나다와 붙어있는 알래스카는 러시아 본토와도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영국에 빼앗길 바에 헐값에라도 팔아버리자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미국에게 단돈 720만 달러, 즉 1 제곱킬로미터당 5달러라는 매우 싼 값에 알래스카를 매각하게 된다.



이후 알래스카에서는 막대한 양의 금과 석유 석탄이 나왔으며 후에는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지점 공학적 요소로서 군사적 가치도 부각됐다. 알래스카를 소유한 지 단 50년 만에 이 땅의 가치는 100배가 넘었고 현재는 1000배 이상이 오르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영토 매입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전쟁과 영토 확장을 거치며 강하게 성장한 미국은 당시 유행했던 제국주의 흐름에 맞춰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1898년에 태평양 한복판에 있는 하와이까지 합병하며 오늘날의 영토를 완성시켰고, 자연스럽게 미국은 바다를 거치지 않고서는 침략 자체를 할 수 없는 천하의 요새가 되어버렸다. 하와이가 미국에 50번째 연방주로 가입한 후 50개의 별을 담은 국기가 오늘날 미국의 공식적인 국기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러한 확장주의적 정서는 점점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으며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도 성공한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시아에서는 일본 제국이 활개치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대한제국을 제압하면서 자신의 손아귀에 가두려고 했다.


문제는 이것을 강대국들이 반대할 것이라는 의견이 일본 내에서 점점 대두되고 있었다. 일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도 필리핀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서로 식민지배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1905년 일본의 가쓰라와 미국의 테프트가 비밀리에 만나 서로에 대한 식민지 통치를 인정해 주는 대화를 나눈다. 즉 일본 제국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식민 통치를 용인하기로 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새로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 오고 간 대화에 관한 각서만이 존재했다. 이 각서의 내용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붙였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다.


이 밀약으로 인해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14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에 의해 중립 지키며 유럽의 국가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돈이나 벌자는 태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독일이 일으킨 다음 두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영국의 해상 공세를 뚫고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적이라고 판단되면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의 선박이 격침되고 미국인이 사망하게 된다.


두 번째는 독일이 멕시코에 보낸 밀지다. 독일은 미국이 혹시라도 전쟁에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몰래 멕시코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대가로 미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후에는 독일의 외무장관 침범하니 몰래 보낸 이 밀지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이러한 사건으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던 미국은 독일에 맞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이 유럽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하자 전황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이내 미국은 연합국과 함께 1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전쟁이 끝난 이후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경제적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공장들은 최대한 경쟁사보다 싸게 물건을 찍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많이 생산하다 보니 물건을 구입할 사람은 별로 없는데 지나치게 물건이 쌓여버리는 현상이 일어났고, 팔리지 않는 물건은 그대로 방치하게 되었다.



때문에 공장주들은 직원을 하나둘씩 잘라야만 했다. 즉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배후에는 만성적인 과잉생산과 실업자가 치솟고 있었다. 미국에는 점차 복합적인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뉴욕 주식거래소 주가가 대폭락했으며, 미국은 경제 대공황에 직면하게 된다.



도시에서 세 명 중 한 명은 일자리를 잃었고 경제적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지경이었다. 경제 대공황은 미국을 넘어 급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물가의 폭락 생산의 축소 경제활동의 마비시켰다. 이러한 초유의 비상사태 속에서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위기에 빠르게 대처하기 시작했는데, 정부가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경기를 조종한다는 뉴딜 정책을 실시하며 위기 수습을 시도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경제를 실시했다. 넘쳐난 상품들을 식민지에게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아치우고, 타국의 물품에는 높은 관세를 매겨 아예 살 엄두가 안 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즉 본국과 식민지를 하나의 블록으로 묶어 자신의 시장을 지키겠다는 보호무역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라도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오겠다는 전체주의를 채택하게 된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폭력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에 따라 참전에 반대하고, 또다시 중립을 지키지만 영국이 독일에 밀리기 시작하자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무기와 탄약 부족을 계속해서 호소했다.



처칠은 "영국이 패한다면, 미국은 나치의 지배하에 통일된 유럽과 맞서야 한다 그때는 훨씬 강력하며 군비를 훨씬 더 잘 갖추고 있을 것이다"라며 루스벨트를 설득했다. 루스벨트는 처칠의 호소에 부응하여 이른바 무기대여법을 발표한다. 미국의 방해에 필요하다고 간주되면 ‘어느 나라든 원조할 수 있다며 탱크 전투기 전함을 대여해 주고, 전쟁이 끝나면 현금이 아닌 현물로 돌려받자’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독일과 동맹인 일본이 아시아를 무대로 지속적인 침략을 벌이자 이를 억제하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진영에서 일본의 전략자원 수출을 금지하는 ABCD 포위망을 구축한다. 석유 수입량의 8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에게 미국의 석유 수출 금지는 매우 큰 타격이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미국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버렸고, 이에 분노한 미국은 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압도적인 생산력을 바탕으로 일본과 독일을 격파한 뒤 1945년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다음 목표는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소련의 공산주의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자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트루먼 대통령은 한 가지 정책을 펼치는데, 소수의 정부 지배를 거부하는 모든 나라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한다. 즉,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뜻이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은 2차 대전으로 황폐화된 서유럽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이렇듯 세계정책에 대해 미국이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하면서 기존의 고립 이립주의 전통을 자연스럽게 폐기했다. 1962년, 미국과 소련의 신경전은 극에 달했고, 소련은 비밀리에 미국 바로 밑에 있는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서 제 3차 세계대전 위험에 휩싸인다.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은 미국과 소련이 원만한 합의를 보면서 마무리되었지만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국가는 오로지 미국임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하게 된다. 1964년 압도적 군사력을 갖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면서 네이팝탄과 같은 대량 살상무기를 투하하고 고엽제 화학무기를 사용한다.



시간이 갈수록 민간인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되기 시작했고, 미국 내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점점 커지자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심각한 피해를 입자 더 이상 아시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대처하기를 바란다”고 발표한다. 이것이 닉슨 독트린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 정세의 변동이 가속화됐고 미국과 소련의 10년간 계속된 대립에 양국은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공산권 국가들과 접촉을 시도하여 10년간 계속된 이 대립을 완화시키자는 데탕트 정책을 제안한다. 기본적인 경쟁 구도는 이어가되 상호 공존의 길을 모색하자는 뜻이었지만 중국과 소련을 차례로 방문하여 무역 제한을 완화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감축, 우주개발 사업에도 서로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다


. 심지어 1991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이자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소련이 공식적으로 붕괴됨에 따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냉전은 완전히 종료된다. 이후 미국은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흔드는 초강대국으로 남게 된다.




(사진 출처: ChatGPT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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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유제혁 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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