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 1982년 4월 22일 브라질에서 카카가 태어났다. 그는 17살 나이에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하며 전신마비가 올 수 있는 척추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성공률 2%에 불과하던 척추수술이 성공하며, 그는 기적적으로 전신마비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카카는 아버지가 국가기술자, 어머니가 선생님인 가정에서 중산층으로 자랐다. 하지만 카카의 부모님은 카카를 겸손하게 키웠다. 카카는 프로계약한 뒤 받은 보너스를 당시 대학교에 입학한 형의 등록금에 보탰다. 카카의 원래 꿈은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카가 11살 때 상파울로에서 열렸던 히벨리노의 축구교실에 갔던 것이 카카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자신의 스피드를 보강하기 위해 특별한 집중훈련을 했고, 덕분에 카카는 엄청난 스피드로 수비수들을 제쳐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일로 카카의 진로는 축구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브라질에 명문 클럽 상파울루 유스 선수로 뛰던 카카는 문제가 있었다.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보다 키가 작고 말랐다. 카카는 "내가 12살 때 겉모습은 10살의 아이와 비슷했다. 16살 때까지 또래보다 2년 정도 성장이 늦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파울루 의료팀은 카카의 성장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했고, 이 덕분에 카카는 또래만큼 성장을 했다.
출처:Wikimedia Commons
15살에 카카는 상파울루와 정식 계약을 한 뒤, 2001년 1월 척추수술 이후 1년간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후 그는 18살에 데뷔하며, 27경기 12골을 넣었고, 다음 시즌에는 22경기 10골을 득점했다. 이후 카카는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아드리아누, 호베르투 등과 함께 활약하며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리그에서 상파울로컵 결승과 브라질컵 4강으로 이끌고, 2002년에 들어서부터 팀의 핵심자원이 되었다. 2002년 90년대 후반, 라리가 최고의 테크니션 잘미냐가 감독과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빠진 상황 속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스콜라리 감독은 카카를 불렀다.
많은 주목과 기대를 받은 카카는 2002년 월드컵 교체선수였지만 한 경기에서 20분을 뛰며 월드컵 우승이라는 메이저 우승겸험을 맛보게 됐다. 2003년까지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상위권을 이끌던 카카의 잠재력을 유럽구단들이 주목했고, 그중 가장 카카를 유심히 본 팀은 AC밀란이었다.
당시 카카의 영입을 도운 선수는 밀란의 선수이자 브라질 전 국가대표 레오나르두였다. 레오나르두의 노력 덕에 밀란은 당시 첼시가 제시한 금액의 반절 가격으로 카카를 영입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 후 2003년 카카는 후이 코스타의 대체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밀란의 백업 멤버로 합류하게 됐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당시 감독이었던 안첼로티는 후이코스타보다 포워드적인 성향을 지닌 카카가 피를로와 이상적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카카의 주변 언론에서는 대부분의 남미 선수들의 이미지가 기술과 스피드는 상향평준화되어 있지만 팀플레이가 뒤처진다고 주장하며, 카카가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단주였던 베를루스 코니는 "세계 최고의 재목을 땅콩값에 데려왔다"라며, 크게 만족했다. 카카가 5년 전 척추를 크게 다쳐 전신마비 위기에 몰렸을 때 세운 목표는 축구선수 복귀부터, 브라질 대표팀 선발 등 각종 리그를 우승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도와준 까닭에 이 업적을 모두 21살에 이루어낸 것이다.
이후 카카는 스스로 밀란의 주장으로 활약할 수 있음을 증명해 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시즌 30경기에 출전해 10골을 기록한 것이다. AC밀란은 세리에A 우승을 들어 올렸고, 또한 UEFA 슈퍼컵에서도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챔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만났다. 전반에 말디니 1골, 크레스포가 2골을 기록하며 3:0 스코어로 앞서 나갔지만 후반 들어 리버풀에게 동점으로 따라잡혔다. 이후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카카는 UEFA 최우수 미드필더로 선정되며 점점 성장하고 세계 최고의 무결점 공격형 미드필더됐다.
25살의 나이에 카카는 축구 선수로 획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2005년 12월 겨울, 그는 연인 셀리코와 혼인했다. 셀리코와 14살 때부터 가깝게 알고 지냈던 사이인 둘은 끝내 결혼했다. 2005/2006시즌 카카는 리그에서 생애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출처:Wall paper
2006년 4월 9일, 그는 키에보 베로나와의 경기에서 모두 후반전에 3골을 넣었다. 2006년 월드컵에선 호나우두-아드리아누 최전방 공격수 당시 세계 축구를 제패하고 있던 호나우지뉴와 더블플레이메이커 체체를 형성했다. 그들은 판타스틱 4로 불리며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었지만 정작 월드컵에선 ‘빚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제라드-램파드 공존 논쟁에 버금갔던 지뉴-카카 공존은 동선의 불협화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카카는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수행하고자 했다. 크로아티아와의 첫 경기에서 25M 중거리골로 팀에 승리를 안겼고, 가나와의 경기에선 호나우두가 게르트 뮐러의 월드컵 득점 기록을 깰 수 있도록 어시스트했다.
이후 카카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세계 축구 중심에 올라서 자연스럽게 둥가 감독이 이끄는 브라질의 대표팀 에이스가 됐다. 2006/2007시즌 팀은 리그에서 4위와 5위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지만 챔스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4강에서 만난 맨유는 세 번째 챔스우승을 꿈꿨지만 결국 카카의 경기운영에 막혀 2차전을 3:0으로 내어주며 맨유는 탈락했다. 2년 전, 이스탄불에서 한 판 승부를 벌였던 리버풀과 결승에서 다시 맞붙었다. 카카, 피를로, 인자기가 활약한 가운데 2:1로 승리하며 2년 전 패배를 대갚음했다.
이후 카카는 15경기 10골로 득점왕과 MVP를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을 받았다. 키커 올해의 선수, 유럽 올해의 선수, 피파 올해의 선수를 받았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며 카카의 시대를 증명했다. 카카는 뛰어난 개인기에 패스, 슈팅, 헤딩, 결정력, 피지컬까지 갖춘 만능형 선수였다.
당시 AC밀란의 다이아몬드 4-3-1-2 시스템의 꼭짓점 공격형 미드필더에 완벽하게 부합하며, 전방 투톱 크레스포, 셰우첸코에게 패스를 주며 골까지 만들어내는 카카는 완벽했다. 이어 카카는 다음 시즌 부상에 조심하고 상대방에 견제를 파악하는 훈련을 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했다.
리그에서 30경기 15골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무너져가는 밀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AC밀란은 리그 5위에 머물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게 됐다. 따라서 밀란은 리빌딩이 필요했고, 잠브로타, 호나우지뉴, 플라미니, 셰브첸코를 다시 영입하게 됐다.
하지만 밀란은 예전의 모습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카카에 대한 빅클럽들의 러브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중 레알마드리드는 카카에게 지단에게 주었던 이적료 이상을 제의하며 카카의 영입을 간절히 바랐다. 이어 카카의 아버지에게도 연락을 하며 카카를 설득했지만 AC밀란은 이 제의를 거절하며 이적 불가를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밀란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카카를 레알마드리드에 890억 원에 팔게 됐다.
출처:Wikimedia Commons
카카는 2009년 6월 30일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5만 명의 팬들 앞에서 입단식을 가졌다. 엘클라시코전에서 카카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중원과 2선을 오가며 엄청난 활동력을 보였고, 결정적인 찬스도 만들어냈다. 적응기가 필요 없었던 그는 리그 중반 부상을 당해 잔여 경기를 참여하지 못했다.
부상 복귀 이후 후반기에도 폼을 끌어올리지 못해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레알 이적 첫 해 33경기 9골 8도움으로 성과가 나쁘지 않았지만 다음 시즌이 문제였다. 무릎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았던 2010년 그는 무리하게 월드컵에 출전했고, 월드컵이 끝나고 4개월간 재활치료를 했다.
이는 카카의 전성기가 꺾이게 된 가장 큰 치명타로 자리했다. 따라서 2010/2011시즌 전반기에는 카카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후반기에는 외질에게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며 벤치 멤버로 뛰게 됐다. 엄청난 이적료, 주급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장기간 컨디션 난조 및 부상으로 인해 필드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안티팬도 부쩍 늘었다. 물론 경기에 등장하면서 골, 어시를 기록하며 클래스를 보여줬지만 사람들은 "왜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가"라고 따지기 시작했다. 축구 선수로서 필수적으로 해야 될 관리를 소홀히 해 결국 이적설까지 나오게 되었다.
출처:Wikimedia Commons
본인의 잔류 의지로 팀에 남아 한 해를 더 보냈지만 전체적인 피지컬 하락으로 무리뉴마저 그가 원한다면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이후 밀란이 다시 카카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세금 문제로 포기했다. 2012/13 시즌도 레알과 함께 하는 카카였지만 팬들은 제발 카카를 팔자며 비판했고, 팀 내에서는 외질, 모드리치 등에게 밀렸다.
여기까지 경쟁을 했다고고 하더라도 2013년 여름 이스코가 레알로 합류하자 카카의 미래는 더 암울해졌다. 이에 카카는 레알에게 이적 요청을 했고, 레알은 그를 자유계약으로 놓아주었다. 결국 연봉을 절반 이상 삭감하며 AC밀란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부상을 당해 팬들은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 후 2013/2014시즌 챔스 조별예선 바르샤전 1차전에서 호비뉴와 그림 같은 원투패스를 주고받으며 어시스트했고, 경기 내내 엄청난 활동량 수비가담으로 다니엘 알베스를 억제시켰다. 이후 밀란 경기에서 다시 부활의 날갯짓을 펼치면서 맹활약했다. 물론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AC밀란의 추락 앞에 그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챔스 16강에서 아틀레티고에게 팀이 완전히 밀리는 상황 속에서 분전했다. 매 경기 최고는 아니었지만 준수한 통솔력과 경기조율, 패싱능력이 몰락한 밀란의 몇 되지 않은 인재였다. 2014년 여름, 카카는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인해 밀란과 상호해지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올랜도 시티와 계약했다.
82억 원의 연봉을 받아 MLS 선수 중 최고 연봉을 받게 된 그는 팀의 에이스 역할을 자처했고, 2015년 9골과 7도움을 기록했다. 이후 2017년 12월 17일 브라질의 유명 축구해설가와 인터뷰를 통해서 "지금이 축구선수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할 때라고 생각한다"라며 은퇴를 발표했다.
팬들은 마지막 홈경기에서 카카의 상징인 10번 보라색 셔츠를 준비했다. 경기 내내 모든 카메라의 집중은 카카에게 쏠렸고, 눈물이 흐르는 장면이 화면에게 잡히기도 했다. 그 후 카카는 그라운드를 떠났다.
카카는 브라질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모아놓은 완전체였고, 유럽 무대에 맞추어 진화한 브라질 선수였다. 2007년 카카를 끝으로 축구계는 인간의 지배를 떠나 신들이 지배했다. 레알에서 먹튀 오명을 쓴 카카였지만 2000년대 중반 미드필더의 정점을 기록했던 이 역시 카카였다. 자유자재의 양발, 카카의 전매특허인 셀레브레이션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출처: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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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
[밸류체인타임스 = 김시원 수습기자] 1982년 4월 22일 브라질에서 카카가 태어났다. 그는 17살 나이에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하며 전신마비가 올 수 있는 척추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성공률 2%에 불과하던 척추수술이 성공하며, 그는 기적적으로 전신마비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카카는 아버지가 국가기술자, 어머니가 선생님인 가정에서 중산층으로 자랐다. 하지만 카카의 부모님은 카카를 겸손하게 키웠다. 카카는 프로계약한 뒤 받은 보너스를 당시 대학교에 입학한 형의 등록금에 보탰다. 카카의 원래 꿈은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카가 11살 때 상파울로에서 열렸던 히벨리노의 축구교실에 갔던 것이 카카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자신의 스피드를 보강하기 위해 특별한 집중훈련을 했고, 덕분에 카카는 엄청난 스피드로 수비수들을 제쳐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일로 카카의 진로는 축구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브라질에 명문 클럽 상파울루 유스 선수로 뛰던 카카는 문제가 있었다.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보다 키가 작고 말랐다. 카카는 "내가 12살 때 겉모습은 10살의 아이와 비슷했다. 16살 때까지 또래보다 2년 정도 성장이 늦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파울루 의료팀은 카카의 성장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했고, 이 덕분에 카카는 또래만큼 성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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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에 카카는 상파울루와 정식 계약을 한 뒤, 2001년 1월 척추수술 이후 1년간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후 그는 18살에 데뷔하며, 27경기 12골을 넣었고, 다음 시즌에는 22경기 10골을 득점했다. 이후 카카는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아드리아누, 호베르투 등과 함께 활약하며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리그에서 상파울로컵 결승과 브라질컵 4강으로 이끌고, 2002년에 들어서부터 팀의 핵심자원이 되었다. 2002년 90년대 후반, 라리가 최고의 테크니션 잘미냐가 감독과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빠진 상황 속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스콜라리 감독은 카카를 불렀다.
많은 주목과 기대를 받은 카카는 2002년 월드컵 교체선수였지만 한 경기에서 20분을 뛰며 월드컵 우승이라는 메이저 우승겸험을 맛보게 됐다. 2003년까지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상위권을 이끌던 카카의 잠재력을 유럽구단들이 주목했고, 그중 가장 카카를 유심히 본 팀은 AC밀란이었다.
당시 카카의 영입을 도운 선수는 밀란의 선수이자 브라질 전 국가대표 레오나르두였다. 레오나르두의 노력 덕에 밀란은 당시 첼시가 제시한 금액의 반절 가격으로 카카를 영입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 후 2003년 카카는 후이 코스타의 대체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밀란의 백업 멤버로 합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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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감독이었던 안첼로티는 후이코스타보다 포워드적인 성향을 지닌 카카가 피를로와 이상적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카카의 주변 언론에서는 대부분의 남미 선수들의 이미지가 기술과 스피드는 상향평준화되어 있지만 팀플레이가 뒤처진다고 주장하며, 카카가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단주였던 베를루스 코니는 "세계 최고의 재목을 땅콩값에 데려왔다"라며, 크게 만족했다. 카카가 5년 전 척추를 크게 다쳐 전신마비 위기에 몰렸을 때 세운 목표는 축구선수 복귀부터, 브라질 대표팀 선발 등 각종 리그를 우승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도와준 까닭에 이 업적을 모두 21살에 이루어낸 것이다.
이후 카카는 스스로 밀란의 주장으로 활약할 수 있음을 증명해 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시즌 30경기에 출전해 10골을 기록한 것이다. AC밀란은 세리에A 우승을 들어 올렸고, 또한 UEFA 슈퍼컵에서도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챔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만났다. 전반에 말디니 1골, 크레스포가 2골을 기록하며 3:0 스코어로 앞서 나갔지만 후반 들어 리버풀에게 동점으로 따라잡혔다. 이후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카카는 UEFA 최우수 미드필더로 선정되며 점점 성장하고 세계 최고의 무결점 공격형 미드필더됐다.
25살의 나이에 카카는 축구 선수로 획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2005년 12월 겨울, 그는 연인 셀리코와 혼인했다. 셀리코와 14살 때부터 가깝게 알고 지냈던 사이인 둘은 끝내 결혼했다. 2005/2006시즌 카카는 리그에서 생애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출처:Wall paper
2006년 4월 9일, 그는 키에보 베로나와의 경기에서 모두 후반전에 3골을 넣었다. 2006년 월드컵에선 호나우두-아드리아누 최전방 공격수 당시 세계 축구를 제패하고 있던 호나우지뉴와 더블플레이메이커 체체를 형성했다. 그들은 판타스틱 4로 불리며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었지만 정작 월드컵에선 ‘빚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제라드-램파드 공존 논쟁에 버금갔던 지뉴-카카 공존은 동선의 불협화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카카는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수행하고자 했다. 크로아티아와의 첫 경기에서 25M 중거리골로 팀에 승리를 안겼고, 가나와의 경기에선 호나우두가 게르트 뮐러의 월드컵 득점 기록을 깰 수 있도록 어시스트했다.
이후 카카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세계 축구 중심에 올라서 자연스럽게 둥가 감독이 이끄는 브라질의 대표팀 에이스가 됐다. 2006/2007시즌 팀은 리그에서 4위와 5위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지만 챔스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4강에서 만난 맨유는 세 번째 챔스우승을 꿈꿨지만 결국 카카의 경기운영에 막혀 2차전을 3:0으로 내어주며 맨유는 탈락했다. 2년 전, 이스탄불에서 한 판 승부를 벌였던 리버풀과 결승에서 다시 맞붙었다. 카카, 피를로, 인자기가 활약한 가운데 2:1로 승리하며 2년 전 패배를 대갚음했다.
이후 카카는 15경기 10골로 득점왕과 MVP를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을 받았다. 키커 올해의 선수, 유럽 올해의 선수, 피파 올해의 선수를 받았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며 카카의 시대를 증명했다. 카카는 뛰어난 개인기에 패스, 슈팅, 헤딩, 결정력, 피지컬까지 갖춘 만능형 선수였다.
당시 AC밀란의 다이아몬드 4-3-1-2 시스템의 꼭짓점 공격형 미드필더에 완벽하게 부합하며, 전방 투톱 크레스포, 셰우첸코에게 패스를 주며 골까지 만들어내는 카카는 완벽했다. 이어 카카는 다음 시즌 부상에 조심하고 상대방에 견제를 파악하는 훈련을 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했다.
리그에서 30경기 15골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무너져가는 밀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AC밀란은 리그 5위에 머물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게 됐다. 따라서 밀란은 리빌딩이 필요했고, 잠브로타, 호나우지뉴, 플라미니, 셰브첸코를 다시 영입하게 됐다.
하지만 밀란은 예전의 모습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카카에 대한 빅클럽들의 러브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중 레알마드리드는 카카에게 지단에게 주었던 이적료 이상을 제의하며 카카의 영입을 간절히 바랐다. 이어 카카의 아버지에게도 연락을 하며 카카를 설득했지만 AC밀란은 이 제의를 거절하며 이적 불가를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밀란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카카를 레알마드리드에 890억 원에 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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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는 2009년 6월 30일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5만 명의 팬들 앞에서 입단식을 가졌다. 엘클라시코전에서 카카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중원과 2선을 오가며 엄청난 활동력을 보였고, 결정적인 찬스도 만들어냈다. 적응기가 필요 없었던 그는 리그 중반 부상을 당해 잔여 경기를 참여하지 못했다.
부상 복귀 이후 후반기에도 폼을 끌어올리지 못해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레알 이적 첫 해 33경기 9골 8도움으로 성과가 나쁘지 않았지만 다음 시즌이 문제였다. 무릎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았던 2010년 그는 무리하게 월드컵에 출전했고, 월드컵이 끝나고 4개월간 재활치료를 했다.
이는 카카의 전성기가 꺾이게 된 가장 큰 치명타로 자리했다. 따라서 2010/2011시즌 전반기에는 카카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후반기에는 외질에게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며 벤치 멤버로 뛰게 됐다. 엄청난 이적료, 주급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장기간 컨디션 난조 및 부상으로 인해 필드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안티팬도 부쩍 늘었다. 물론 경기에 등장하면서 골, 어시를 기록하며 클래스를 보여줬지만 사람들은 "왜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가"라고 따지기 시작했다. 축구 선수로서 필수적으로 해야 될 관리를 소홀히 해 결국 이적설까지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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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잔류 의지로 팀에 남아 한 해를 더 보냈지만 전체적인 피지컬 하락으로 무리뉴마저 그가 원한다면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이후 밀란이 다시 카카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세금 문제로 포기했다. 2012/13 시즌도 레알과 함께 하는 카카였지만 팬들은 제발 카카를 팔자며 비판했고, 팀 내에서는 외질, 모드리치 등에게 밀렸다.
여기까지 경쟁을 했다고고 하더라도 2013년 여름 이스코가 레알로 합류하자 카카의 미래는 더 암울해졌다. 이에 카카는 레알에게 이적 요청을 했고, 레알은 그를 자유계약으로 놓아주었다. 결국 연봉을 절반 이상 삭감하며 AC밀란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부상을 당해 팬들은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 후 2013/2014시즌 챔스 조별예선 바르샤전 1차전에서 호비뉴와 그림 같은 원투패스를 주고받으며 어시스트했고, 경기 내내 엄청난 활동량 수비가담으로 다니엘 알베스를 억제시켰다. 이후 밀란 경기에서 다시 부활의 날갯짓을 펼치면서 맹활약했다. 물론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AC밀란의 추락 앞에 그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챔스 16강에서 아틀레티고에게 팀이 완전히 밀리는 상황 속에서 분전했다. 매 경기 최고는 아니었지만 준수한 통솔력과 경기조율, 패싱능력이 몰락한 밀란의 몇 되지 않은 인재였다. 2014년 여름, 카카는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인해 밀란과 상호해지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올랜도 시티와 계약했다.
82억 원의 연봉을 받아 MLS 선수 중 최고 연봉을 받게 된 그는 팀의 에이스 역할을 자처했고, 2015년 9골과 7도움을 기록했다. 이후 2017년 12월 17일 브라질의 유명 축구해설가와 인터뷰를 통해서 "지금이 축구선수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할 때라고 생각한다"라며 은퇴를 발표했다.
팬들은 마지막 홈경기에서 카카의 상징인 10번 보라색 셔츠를 준비했다. 경기 내내 모든 카메라의 집중은 카카에게 쏠렸고, 눈물이 흐르는 장면이 화면에게 잡히기도 했다. 그 후 카카는 그라운드를 떠났다.
카카는 브라질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모아놓은 완전체였고, 유럽 무대에 맞추어 진화한 브라질 선수였다. 2007년 카카를 끝으로 축구계는 인간의 지배를 떠나 신들이 지배했다. 레알에서 먹튀 오명을 쓴 카카였지만 2000년대 중반 미드필더의 정점을 기록했던 이 역시 카카였다. 자유자재의 양발, 카카의 전매특허인 셀레브레이션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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