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6개월 형에서 고문을 당하고 별이 된 유관순 열사 | 밸류체인타임스

황주하 인재기자
202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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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황주하 수습기자]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지령마을에서 태어났다. 유관순에게는 위로 오빠 관옥과 언니, 그리고 아래로는 동생 2명이 있었다. 오빠 유관옥은 훗날 유우석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처=UNSPLASH

유관순이 태어났을 때 서양 여러 나라들은 앞다투어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고자 했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 러시아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29일, 유관순이 9살되던 해 일본 식민지가 됐다.

출처=UNSPLASH

유관순의 집은 지령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고흥 유씨 집안이었다. 지령마을에는 고흥 유씨들이 50가구 이상 살고 있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선비였지만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유관순은 당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충청남도 공주에 와 있던 선교사의 아내 사 부인이 유관순에게 "관순이만 원하면 이화 학당에도 보내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유관순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공주 영명 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됐다. 유관순은 공주 영명 여학교에서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부모님의 허락 끝에 1916년 15세의 나이로 경성의 이화 학당으로 전학을 갔다. 유관순은 적극적이고 밝아 이화 학당에서 성실하게 지냈다.

출처=UNSPLASH

유관순은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와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 3.1 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유관순이 다니는 이화학당에서도 상급생들과 교사가 중심이 되어 은밀히 3.1 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친구들과 종이와 물감을 사다가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1일, 이화 학당 학생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를 나서려 했다. 그때 학교 교장이 학생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때 유관순과 친구들은 기숙사 뒤쪽으로 담을 넘어서 탑골공원으로 모였다. 탑골공원에서 정재용이라는 청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곧이어 거리로 나가서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쳤다. 일본 군인들은 시위를 막기 위해 학생들을 마구 잡아갔다.



출처=UNSPLASH

유관순을 포함한 용두리의 욱지사들과 청년들은 만세 운동 준비에 바빴다. 만세운동 날짜는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만세운동을 하기로 정한 4월 1일 바로 전날밤에 군 각지에 봉화를 피워 뜻을 표현하기로 했다. 1919년 3월 31일 밤, 유관순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면과 갈천면의 경계인 매봉산 꼭대기로 올라가 횃불을 피웠다.


1919년 4월 1일, 아침 준비를 갖춘 용두리 사람들이 마을을 나섰다. 유관순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가는 길을 걸어갔다. 오후 1시가 되자 시장 한구석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바로 유관순과 마을사람들이었다. 먼저 유관순의 마을 예배당 책임자인 조인원이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군중 앞에 나섰다.


시위하는 사람 3천 명은 다같이 헌병 주재소로 향했다. 일본 주재소 소장의 명령으로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중권이 총에 맞아쓰러지고, 어머니 이소제도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자 유관순 작은아버지 유중무가 유중권을 업고, 헌병주재소로 들어갔다. 유관순과 조인원, 조병호 등 40여 명도 함께 갔다. 시위 군중은 계속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출처=UNSPLASH


일본은 곧 유관순을 비롯해 유중무, 마을어른인 조인원, 그의 아들 조병호 등을 체포했다. 1919년 6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일본 측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돼 재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26,865명이었다.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졌다. 1920년 3월 1일, 3.1일 운동이 일어난지 일년이 되는 날에도 유관순이 앞장서 만세를 외치면 옥에 갇힌 사람들도 만세를 외쳤다. 간수들은 유관순이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지 못하도록 지하 독방에 가뒀다. 매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유관순은 그때마다 간수에게 끌려가 매를 맞았다.

출처=UNSPLASH

고문과 영양실조로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결국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이 죽은지 이틀이 된 후에야 이화 학당의 교장과 윌터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로 달려가 유관순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화학당의 강력한 요구에도 일본은 시신마저 감추려고 했다.


그러자 시신을 넘기지 않으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린다고 하자 몇 가지 조건을 달으며 시신을 돌려주었다. 조건은 “첫째, 유관순의 시신에 관한 사실을 바깥에 알리지 말 것. 둘째, 장례식을 조용하게 치를 것”이었다. 유관순은 이태원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본은 이 공동묘지를 파헤쳐 군사용 땅으로 사용해 지금은 유관순의 묘소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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