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https://www.biography.com/artists/claude-monet)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칼럼니스트] 인상주의를 탄생시키며 수많은 대작을 남긴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는 오늘날 인상주의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수많은 예술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술의 길을 처음 걸었을 당시, 그리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은 “대충 그린 낙서 같다”는 혹평을 받았고, 전시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수많은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지만, 모네는 이상하리만큼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바라본 빛을 믿었고, 자신이 느낀 빛의 색을 의심하지 않았다. 빛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끝까지 그것을 좇으며, 자신의 신념을 어둠 속에 두지 않았다.
그 화가는 자신의 예술을 끝까지 좇았다
오늘날 인상주의의 거장으로 불리는 모네는 처음부터 인상주의로 예술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대상을 포착하고 빠르게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캐리커처를 그리며 예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851년 르아브르 중등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한 모네는 학교 공부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화폭에 담을 대상을 찾아 르아브르 거리를 돌아다니며 주변 인물들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입소문을 타며 제법 안정적인 수입을 안겨주었고, 이는 가업을 잇기를 바라던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모네의 캐리커처를 본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은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모네에게 또 하나의 예술 세계인 ‘외광회화’를 권했다. 19세기 당시 외광회화는 많은 장비를 동반해야 했고, 사실적이고 정교한 회화가 주류였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제작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야외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외광회화를 시도하는 화가는 드물었다.
그러나 모네는 이러한 불편함마저 잊을 만큼 자연의 빛에 매료되었다. 그는 자연의 순간을 화폭에 담기로 결심하며 외광회화에 깊이 빠져들었고,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에 개의치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1862년, 군 복무 중이던 모네는 장티푸스에 걸려 복무를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전역 후 그는 전통 미술 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보수적인 아카데미 대신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 등 젊은 화가들을 만나며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통 회화를 원하던 아버지는 결국 재정적 지원을 끊었다. 가난은 그의 삶을 옥죄었지만, 모네는 자신이 좇아온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만의 화풍을 향해 나아갔다.
1873년, 모네는 르누아르와 피사로 등 동료 화가들과 함께 새로운 전시 단체를 결성했고, 1874년 4월 첫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그는 다섯 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중 하나가 1872년 아침의 풍경을 담은 「해돋이」였다.
전시 목록 담당자는 작품명이 지나치게 평범하다며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모네는 제목에 ‘인상(Impression)’이라는 단어를 더해 「인상, 해돋이」로 제출했다. 이 작품은 훗날 ‘인상주의’라는 명칭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전시 반응은 냉담했다. 많은 이들은 작품을 조롱하며 “붓질조차 서툰 아마추어들”이라고 비난했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Louis Leroy)는 「인상, 해돋이」를 두고 “벽지 무늬의 밑그림만도 못한 막연한 인상”이라며 혹평했다.
그럼에도 모네와 동료 화가들은 이 조롱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시대에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었던 이 예술은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예술 사조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모네는 비난의 한가운데서 오히려 예술사의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킨 것이다.
모네에게 긍정이란 현실을 외면하는 가벼운 낙관이 아니었다. 그는 무시와 조롱 속에서도 자신을 어둠에 가두지 않았고, 예술이라는 영감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시야가 흐려지는 날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을 놓지 않았다.
"모두들 내 작품을 논하고 이해하는 척 한다. 마치 이해해야만 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랑하면 될 것을.."
-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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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칼럼니스트]
(출처 : https://www.biography.com/artists/claude-monet)
[밸류체인타임스=황지민 칼럼니스트] 인상주의를 탄생시키며 수많은 대작을 남긴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는 오늘날 인상주의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수많은 예술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술의 길을 처음 걸었을 당시, 그리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은 “대충 그린 낙서 같다”는 혹평을 받았고, 전시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수많은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지만, 모네는 이상하리만큼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바라본 빛을 믿었고, 자신이 느낀 빛의 색을 의심하지 않았다. 빛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끝까지 그것을 좇으며, 자신의 신념을 어둠 속에 두지 않았다.
그 화가는 자신의 예술을 끝까지 좇았다
오늘날 인상주의의 거장으로 불리는 모네는 처음부터 인상주의로 예술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대상을 포착하고 빠르게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캐리커처를 그리며 예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851년 르아브르 중등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한 모네는 학교 공부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화폭에 담을 대상을 찾아 르아브르 거리를 돌아다니며 주변 인물들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입소문을 타며 제법 안정적인 수입을 안겨주었고, 이는 가업을 잇기를 바라던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모네의 캐리커처를 본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은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모네에게 또 하나의 예술 세계인 ‘외광회화’를 권했다. 19세기 당시 외광회화는 많은 장비를 동반해야 했고, 사실적이고 정교한 회화가 주류였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제작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야외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외광회화를 시도하는 화가는 드물었다.
그러나 모네는 이러한 불편함마저 잊을 만큼 자연의 빛에 매료되었다. 그는 자연의 순간을 화폭에 담기로 결심하며 외광회화에 깊이 빠져들었고,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에 개의치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1862년, 군 복무 중이던 모네는 장티푸스에 걸려 복무를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전역 후 그는 전통 미술 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보수적인 아카데미 대신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 등 젊은 화가들을 만나며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통 회화를 원하던 아버지는 결국 재정적 지원을 끊었다. 가난은 그의 삶을 옥죄었지만, 모네는 자신이 좇아온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만의 화풍을 향해 나아갔다.
1873년, 모네는 르누아르와 피사로 등 동료 화가들과 함께 새로운 전시 단체를 결성했고, 1874년 4월 첫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그는 다섯 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중 하나가 1872년 아침의 풍경을 담은 「해돋이」였다.
전시 목록 담당자는 작품명이 지나치게 평범하다며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모네는 제목에 ‘인상(Impression)’이라는 단어를 더해 「인상, 해돋이」로 제출했다. 이 작품은 훗날 ‘인상주의’라는 명칭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전시 반응은 냉담했다. 많은 이들은 작품을 조롱하며 “붓질조차 서툰 아마추어들”이라고 비난했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Louis Leroy)는 「인상, 해돋이」를 두고 “벽지 무늬의 밑그림만도 못한 막연한 인상”이라며 혹평했다.
그럼에도 모네와 동료 화가들은 이 조롱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시대에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었던 이 예술은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예술 사조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모네는 비난의 한가운데서 오히려 예술사의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킨 것이다.
모네에게 긍정이란 현실을 외면하는 가벼운 낙관이 아니었다. 그는 무시와 조롱 속에서도 자신을 어둠에 가두지 않았고, 예술이라는 영감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시야가 흐려지는 날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을 놓지 않았다.
"모두들 내 작품을 논하고 이해하는 척 한다. 마치 이해해야만 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랑하면 될 것을.."
-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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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타임스 = 황지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