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매직', 전환점이 주는 힘 | 밸류체인타임스

연하진 칼럼니스트
2025-09-07
조회수 2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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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unsplash


[밸류체인타임스=연하진 칼럼니스트] 뜨거운 8월 햇볕을 견디다 보니 어느덧 절기상 처서를 맞이했다. 그러나 마법처럼 처서를 기점으로 더위가 사라진다는 이른바 '처서 매직(magic)'은 올해도 찾아오지 않았다. 평소 남들보다 더위를 덜 타는 편인데도, 바깥에 나가기만 하면 금세 옷이 땀에 젖는다. 자주 걷는 산책길 나뭇가지엔 비둘기고 까마귀고 열기 속에 부리를 벌린 채 숨을 헐떡인다. 



기상 전문가들은 기후 변화 탓에 이제 '처서 매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기사에서는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일 수 있다며 앞으로 닥칠 폭염 재앙을 경고하기도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상에서도 '처서 매직'은 옛말이라며 저마다 겪은 무더위 고충을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실제 기온 하강보다는 선선한 날씨에 대한 기대감이나 희망 사항을 처서 매직이라는 표현에 담았다고 덧붙였다.



찜통 더위 속에서 올해도 내 눈엔 어김없이 가을 신호가 보였다. 늦은 오후에서 저녁 사이, 햇빛은 더 노랗게 익어 있었다. 낮에 귀가 찢어질 듯 우는 매미 소리가 지나가면, 저녁 무렵엔 풀벌레 소리가 얕게 번지게 시작했다. 광복절에 선명하게 파래진 하늘빛에 가을임을 확신했다. 



기온 하강은 없어도 '가을 매직'은 작동했다. 숨이 막힐 듯 더운 날씨 속에서도 ‘이젠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폭염에 질색하는 지인들 앞에서도 내가 발견한 가을 신호를 들먹이며 "그래도 절기는 절기다, 덥긴 해도 가을이 왔다"라고 말하곤 했다. 지난 입추 무렵, '입추 매직'이라는 말이 SNS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미세하게 달라진 날씨를 감지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가을의 시작을 알렸고, 가을을 느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묘하게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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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unsplash


사실 '입추 매직', '처서 매직'이라는 말은 이번에 처음 접했다. 단순히 선선한 날씨를 기대하는 기대감 이상으로, 나에게 가을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매년 여름이면 슬럼프에 빠지는 일이 잦았는데, 특히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힘들었던 해가 있었다. 



그해 7월과 8월, 깊은 좌절감 속에 나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지냈다. 그 막막했던 시간을 끌어내 준 전환점은 상담을 공부하던 시절, 필수 과정이었던 집단상담 실습이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선 날은 처서를 훌쩍 넘긴 어느 날이었고,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푸르렀다. 



인사를 나누는 짧은 시간, 집단 지도자는 울음을 겨우 참는 내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 따뜻한 시선과 질문은 잔뜩 웅크린 내 마음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함께 참여했던 상담 동기생들은 대부분 사회생활 경험이 많고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색함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나는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우울과 자기 세계에 갇혀 있던 나는, 그 순간부터 조금씩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상담에서 지도자와 동기들이 보내준 공감과 지지는 내게 놀라울 정도의 회복을 가져다주었고, 잊고 있던 웃음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때 도전한 단기 인턴 상담은 훗날 내 상담 커리어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생 처음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겪었다. 한여름 내내 칩거하며 무너졌던 몸이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출근길에서 겪은 그 경험은 민망하고 충격적이었지만,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이 그 사건을 내 일상에 깊은 상처로 남기지는 않았다.



그해 가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파란 하늘과 노랗게 익은 햇빛이 선명히 각인된 계절로 기억된다. 그 이후로 나는 찜통더위 속에서도 절기에 맞춰 찾아오는 가을의 신호를 일부러라도 발견하려 애쓰게 되었다. 그 마음은 결국 한여름을 가을로 바라보는, 나만의 작고 조용한 기적을 만들어냈다.



사실 처서는 과학적 기상 용어라기보다는 관습적 표현에 가깝다. 24절기의 기원지인 고대 중국 화북 지역은 우리나라와 기후 환경이 달라 절기와 실제 날씨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최소 수백 년 동안 절기에 따라 형성된 문화와 풍습을 살펴보면 전혀 틀린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처서 무렵이 되면 더위가 한풀 꺾여 ‘처서 매직’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으니 말이다.  최근에는 급격한 기후 변화로 절기의 이름값이 예전만 못하지만, 적어도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에게 처서는 여전히 특별한 힘을 지닌다.



올여름 유난히 건강 문제까지 겹쳐 예전의 여름 슬럼프가 다시 찾아올까 두려웠다. 문만 열면 훅 들어오는 열기에 지치면서도 달력을 들여다보며 다가올 가을을 떠올렸다.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아직 네 개의 가을 절기가 남아 있다. 머지않아 찾아올 선선한 바람과 파랗고 높아질 하늘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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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 무렵의 날씨에 따라 그해 풍흉이 결정된다. 햇살이 왕성하고 하늘이 맑으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다행히 올해는 풍년을 예고하는 날씨다. 처서에는 가을 채소를 파종하는데, 때마침 화분에 심은 2,000원짜리 방울토마토가 뙤약볕을 견디며 싹을 틔웠다. 열매를 맺기까지는 약 3개월 정도 기다려야 한다. 



토마토가 자라나는 시간에 맞춰 나 또한 작은 변화를 시작해 보려 한다. 오랫동안 방치해 굳어진 목과 어깨를 풀고 허리를 곧게 세우며, 틈틈이 자세를 교정하는 습관을 들이려 한다. 꾸준히 하면 방울토마토가 빨갛게 익을 무렵엔 내 몸도 한결 나아져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환점을 기대하게 하는 '처서 매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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