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밸류체인타임스=연하진 칼럼니스트] 최근 자녀의 건강한 미디어 사용과 부모-자녀 간 소통을 주제로 외부 강사를 초청해 강의를 진행했다. ‘나쁜 대화’와 ‘좋은 대화’에서 예시 영상을 차례로 보여 주었는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청중은 ‘좋은 대화’ 영상이 재생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딸에게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멈출 수 없는 ‘욱’
화를 참기 어려운 건 비단 부모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동·청소년 가운데서도 충동적 분노가 늘고 있다. 미국 미시간대 연구에 따르면 과도한 미디어 사용은 감정 조절 기능을 저해하고 충동성을 높인다. 지루함을 느낄 때와 유사한 뇌 상태가 유발되고, 이해·공감 영역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출처: unsplash
건강보험공단의 통계는 훨씬 더 선명하다. 2015~2020년 사이 간헐적 폭발성 장애(일명 ‘분노 조절 장애’)로 진료를 받은 인원이 30% 넘게 증가했고, 2022년에는 추가로 16%가 늘었다. 2021년 전체 범죄 가운데 우발적 범죄의 비율은 19.1%에 달한다.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서 한국인의 절반이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10%는 전문 치료가 필요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마음의 완충재가 소모되다
감정 조절의 어려움은 단순히 미디어 과사용 때문만이 아니다. 감정을 받아 주고 조율해 줄 ‘지지적 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현실이 더 큰 문제다. 지지적 자원이란 안정된 가정, 따뜻한 대인관계, 사회적 성취처럼 마음의 완충재가 되어 주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경쟁이 일상인 사회에서 관계 자체를 맺기 힘들어지면서 이 완충재가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 분노에 대한 사회적 허용 범위가 넓다는 점도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감정 표현 방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알게 모르게 분노에 관대하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적 신호를 넘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불필요한 감정 폭발ㅡ일명 ‘욱함’을 뜻한다. “좋은 말로는 안 통한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 자주 듣는다. 그만큼 ‘욱’이 효과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서 강의에 참석했던 부모들처럼 많은 이가 ‘화를 내지 않고는 아이를 가르치기 어렵다’는 전제를 품고 있다.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성장해 부모가 되었을 때 동일한 방식으로 소리를 지르며 양육한다. 분노가 세대를 타고 대물림되는 것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욱하면 멜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멜로드라마조차 사랑의 표현을 고함과 분노로 묘사하곤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소리치고, 가녀린 손목을 거칠게 끌어당기는 장면은 ‘뜨거운 사랑’으로 미화돼 오랫동안 밈처럼 회자됐다. 재벌 남자 주인공의 격한 감정 표현은 ‘그만큼 사랑하니까’라는 식으로 소비되며, 오히려 박력 있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포장된다.
극적인 드라마 속 고함과 격렬한 몸짓은 표현의 미숙함이자 분노와 충동 조절의 실패 사례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분노로 표출되면 이후 위기 상황에서 더 큰 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잘못된 분노 표출은 ‘화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를 담고 있고, 나아가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토양이 된다. ‘사랑의 박력’으로 포장된 미성숙한 분노 미화 문화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출처: unsplash
‘욱’ 권하는 사회
국민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의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에서 한국 사회가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정서적 성장의 기반을 놓쳤다고 진단한다. 감정 조절은 부모에게 배우지만, 드라마·예능 같은 대중매체 역시 ‘욱’을 당연시하며 분노를 술 권하듯 권장한다고 지적한다.
2년 전 방송에 출연한 네덜란드인 아버지의 양육 관련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25개월 된 아이가 스스로 식탁에 앉아 식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도우면서도, 아이가 자기 힘으로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조급하게 개입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던 한국 부모의 전형적인 양육 방식과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화를 내지 않고도 아이의 자립심과 자신감을 키우는 방식은 한국 부모들이 돌아봐야 할 새로운 대안이었다.
자녀 양육은 물론 일상 모든 관계에서, 불필요한 분노 없이도 자신의 생각과 필요를 분명히 전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어릴 때부터 그런 대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을 뿐이다. 감정을 걸러낸 대화는 자율성과 책임감을 키우며, 상호 이해를 높여 불필요한 상처를 없앨 수 있다.

배우지 않았어도 비폭력 대화가 가능하다
이를 실천하는 건강한 대화를 돕는 방법 중에 대표적으로 마셜 로젠버그(Marshall Rosenberg)의 ‘비폭력 대화(Nonviolence Communication)’가 있다. 자신의 욕구(Needs)와 감정(Feelings)을 스스로 인식하고, 공격과 비난 없이 원하는 바를 요청하는 기술로, 감정의 격류를 잠재운 채 분명한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게 돕는다.
역사적·사회적 배경 탓에 건강한 감정 표현이 어려운 문화에서 자랐더라도, 반응 방식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이제 우리 사회는 분노에 너그러운 전제를 벗어 던져야 한다. ‘화내지 않고도 충분히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인식, 그 기본값을 다시 설정할 때다.
Copyright © 밸류체인타임스.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밸류체인타임스=연하진 칼럼니스트]
[밸류체인타임스=연하진 칼럼니스트] 최근 자녀의 건강한 미디어 사용과 부모-자녀 간 소통을 주제로 외부 강사를 초청해 강의를 진행했다. ‘나쁜 대화’와 ‘좋은 대화’에서 예시 영상을 차례로 보여 주었는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청중은 ‘좋은 대화’ 영상이 재생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딸에게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멈출 수 없는 ‘욱’
화를 참기 어려운 건 비단 부모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동·청소년 가운데서도 충동적 분노가 늘고 있다. 미국 미시간대 연구에 따르면 과도한 미디어 사용은 감정 조절 기능을 저해하고 충동성을 높인다. 지루함을 느낄 때와 유사한 뇌 상태가 유발되고, 이해·공감 영역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출처: unsplash
건강보험공단의 통계는 훨씬 더 선명하다. 2015~2020년 사이 간헐적 폭발성 장애(일명 ‘분노 조절 장애’)로 진료를 받은 인원이 30% 넘게 증가했고, 2022년에는 추가로 16%가 늘었다. 2021년 전체 범죄 가운데 우발적 범죄의 비율은 19.1%에 달한다.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서 한국인의 절반이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10%는 전문 치료가 필요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마음의 완충재가 소모되다
감정 조절의 어려움은 단순히 미디어 과사용 때문만이 아니다. 감정을 받아 주고 조율해 줄 ‘지지적 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현실이 더 큰 문제다. 지지적 자원이란 안정된 가정, 따뜻한 대인관계, 사회적 성취처럼 마음의 완충재가 되어 주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경쟁이 일상인 사회에서 관계 자체를 맺기 힘들어지면서 이 완충재가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 분노에 대한 사회적 허용 범위가 넓다는 점도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감정 표현 방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알게 모르게 분노에 관대하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적 신호를 넘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불필요한 감정 폭발ㅡ일명 ‘욱함’을 뜻한다. “좋은 말로는 안 통한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 자주 듣는다. 그만큼 ‘욱’이 효과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서 강의에 참석했던 부모들처럼 많은 이가 ‘화를 내지 않고는 아이를 가르치기 어렵다’는 전제를 품고 있다.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성장해 부모가 되었을 때 동일한 방식으로 소리를 지르며 양육한다. 분노가 세대를 타고 대물림되는 것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욱하면 멜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멜로드라마조차 사랑의 표현을 고함과 분노로 묘사하곤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소리치고, 가녀린 손목을 거칠게 끌어당기는 장면은 ‘뜨거운 사랑’으로 미화돼 오랫동안 밈처럼 회자됐다. 재벌 남자 주인공의 격한 감정 표현은 ‘그만큼 사랑하니까’라는 식으로 소비되며, 오히려 박력 있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포장된다.
극적인 드라마 속 고함과 격렬한 몸짓은 표현의 미숙함이자 분노와 충동 조절의 실패 사례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분노로 표출되면 이후 위기 상황에서 더 큰 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잘못된 분노 표출은 ‘화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를 담고 있고, 나아가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토양이 된다. ‘사랑의 박력’으로 포장된 미성숙한 분노 미화 문화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욱’ 권하는 사회
국민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의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에서 한국 사회가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정서적 성장의 기반을 놓쳤다고 진단한다. 감정 조절은 부모에게 배우지만, 드라마·예능 같은 대중매체 역시 ‘욱’을 당연시하며 분노를 술 권하듯 권장한다고 지적한다.
2년 전 방송에 출연한 네덜란드인 아버지의 양육 관련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25개월 된 아이가 스스로 식탁에 앉아 식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도우면서도, 아이가 자기 힘으로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조급하게 개입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던 한국 부모의 전형적인 양육 방식과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화를 내지 않고도 아이의 자립심과 자신감을 키우는 방식은 한국 부모들이 돌아봐야 할 새로운 대안이었다.
자녀 양육은 물론 일상 모든 관계에서, 불필요한 분노 없이도 자신의 생각과 필요를 분명히 전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어릴 때부터 그런 대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을 뿐이다. 감정을 걸러낸 대화는 자율성과 책임감을 키우며, 상호 이해를 높여 불필요한 상처를 없앨 수 있다.
출처: unsplash
배우지 않았어도 비폭력 대화가 가능하다
이를 실천하는 건강한 대화를 돕는 방법 중에 대표적으로 마셜 로젠버그(Marshall Rosenberg)의 ‘비폭력 대화(Nonviolence Communication)’가 있다. 자신의 욕구(Needs)와 감정(Feelings)을 스스로 인식하고, 공격과 비난 없이 원하는 바를 요청하는 기술로, 감정의 격류를 잠재운 채 분명한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게 돕는다.
역사적·사회적 배경 탓에 건강한 감정 표현이 어려운 문화에서 자랐더라도, 반응 방식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이제 우리 사회는 분노에 너그러운 전제를 벗어 던져야 한다. ‘화내지 않고도 충분히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인식, 그 기본값을 다시 설정할 때다.
Copyright © 밸류체인타임스.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밸류체인타임스=연하진 칼럼니스트]